#279화
천마 위태무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고작 이 년 만에 경지에 올랐다는 것인가.
“말도 나오지 않는군. 그 녀석, 독하게 작심하였구나.”
“…무황을, 스승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녀석은 내 말년을 심심치 않게 해준 호적수였으니.”
호적수.
그 말에 주호는 흥미를 드러냈다.
당시 천하제일인이었던 천마와 후세에 고금제일인지라 칭송받은 무황 중 누군가 더 강했을까.
주호의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은 천마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네 스승이 말해주지 않았느냐? 이 위태무와의 전적은 녀석에게도 제법 자랑스러운 것일 텐데.”
“아, 그것이…….”
주호는 아차 하며 머리를 긁었다.
이쪽에서 얼마가 지났냐는 그 물음에 중의적인 뜻이 담겨 있었던 듯했다. 그렇기에 오해를 풀고자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혼란을 드렸습니다. 스승님께서 활동할 당시와는 삼백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년이라 한 것은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삼백 년?”
천마 위태무의 눈이 흔들렸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라는 듯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호는 그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
“삼백 년. 벌써 그리 시간이 흘렀단 말인가.”
깊은 한숨이 배어 나온다. 위태무는 목이 타는지 순식간에 찻잔을 비웠고, 아련한 눈빛으로 정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월 무상하군. 만마의 종주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때가 바로 어제 일 같거늘.”
“시간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하기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군. 그래서, 여기에는 왜 다시 온 것이냐.”
“…이전엔 그 이유도 모른 채 다짜고짜 절 공격하셨습니까?”
“네 녀석은 발치에 벌레가 꿈틀거리는데 밟아 죽이지 않느냐?”
무엇이 이상하냐는 듯한 그 대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겉모습은 어디의 신선같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그 잔혹한 마도의 정점이다. 차라리 능청스러움을 가장했던 위천강 쪽이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었다.
“설명해보거라. 어떻게,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인지.”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주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해나갔다.
천마 위태무는 상태창에 기록된 사념.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거리낄 것도 없어 그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내까지 전부 끄집어냈다.
탁. 탁.
주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천마는 한쪽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 탁자 위를 단조롭게 두드렸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무량, 그 친구와 처음 만난 것은 본좌가 말년에 접어들어서였다.”
“…무량.”
“음? 몰랐던 것이냐.”
무황(武皇) 진무량.
몇 년 만에 듣는 무황의 본명에 주호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표정을 읽은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보아하니 그런 기록도 남겨두지 않았군. 용케도 혼자 거기까지 잘 성장했어.”
“다 상태창 덕분이지요.”
“본좌도 상태창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군. 아마 본좌에게도 숨겼거나 사후에 만든 것이겠지.”
섭섭한 기색은 없었다.
막역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숨기는 것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었지. 머리카락도 눈처럼 새하얬던 것이 처음에는 저 멀리 빙궁의 출신이라 오해했었다.”
천마는 두 눈을 감은 채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당시 세상은 중원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 한창 중이었다.
신강에서 출병한 천마신교와 무림맹을 필두로 뭉친 정도 연합. 서로의 검 끝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한 치의 밀림 없는 공방을 펼쳤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천하제일인 천마 위태무, 자신이었다.
수많은 고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앞을 가로막았다.
중원을 지키겠다는 신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사욕, 천마라는 강자를 꺾고 싶다는 호승심.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품에 안은 채 검을 뽑아 들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본좌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이는 없었다.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무황 진무량의 등장은 정말로 생뚱맞았다.
사천과 호북을 넘어 중원 무림의 심장을 보고 있을 당시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바. 다른 이들처럼 가벼이 치워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제법 재미있는 제안을 건네 왔다.
“녀석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검(神劍)을 대가로 걸었다. 열 초식을 버텨낸다면 본좌가 물러날 것을 종용했고, 버텨내지 못한다면 신검을 넘김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맹세했지.”
“그런…….”
생각지도 못한 비사였다.
무황이 자신의 목숨과 신검을 대가로 천마의 발걸음을 막았을 줄은. 위태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결과는 뻔하다. 녀석은 악착같이 버텨내었고, 본좌는 인정했을 따름이다.”
그래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물러나는 것은 천마 위태무 본인으로 한정했지, 천마신교가 물러난다고 하진 않았으니.
하지만 상징과도 같은 천마가 물러나자 전선이 삐걱거리며 고착 상태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중원으로서 보자면 더 없을 기회였으나, 위태무는 자신과의 일전 이후 이쪽 곁에 머물며 떠나지 않는 무황을 보곤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물었지. 세상에 고수들이 많다곤 하나 정점은 단 한 명뿐이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네놈이 본좌의 명예를 거머쥘 텐데 어찌하여 일선에 나서지 않느냐.”
자신을 제외하고 작금 무림에 있어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고수는 없었다.
조금만 발품을 판다면 천하를 발아래 꿇릴 수 있거늘, 어찌하여 이쪽 곁에 머문단 말인가.
“…스승께선 무어라 답했습니까?”
“녀석은 다가올 더 큰 싸움을 준비한다고 했었다.”
천마 위태무에게 있어서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였다.
천하제일인. 그보다 더 강대한 고수가 있다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무황의 경지가 머지않아 자신을 뛰어넘자 천마 위태무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본좌의 기억은 그의 무공이 완성하는 것을 본 것까지다. 아마 등선에 이르렀겠지.”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천하제일의 고수였던 천마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무슨 표정을 짓는 것이냐. 말 그대로 등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선, 아니 본좌의 경우엔 마선(魔仙)이 되어 천계에 올랐겠지.”
“마선? 천계니, 뭐니 하는 것이 정말로 있습니까?”
주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이 세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겠느냐. 관리하고 보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 본좌가 사실 순순히 물러난 것도 등선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당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천마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무공을 가다듬으며 말년을 준비하고 싶었으나, 밑의 놈들이 하도 성화였기에 그 열을 달래려 어쩔 수 없이 군세를 일으킨 것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입 아프다. 그래, 주제로 돌아가자면 녀석은 근원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무공을 만들고 있었지. 분명 그 이름이…….”
“혼원일극신공입니다.”
주호는 가볍게 손을 뻗으며 그 위로 잿빛 기운을 일렁거렸다.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순수한 기운.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천마 위태무는 고개를 들어 주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신공을 손에 넣었다면 그것을 열심히 수련하면 되는 일이거늘.”
“저는.”
주호는 기이한 운명을 느꼈다.
이 또한 무황의 안배인가.
그는 상태창 속에 남겨진 천마 위태무의 사념이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삼백여 년 전의 스승님과 같이 당신을 꺾기 위해서 왔습니다.”
“본좌를 꺾는다고.”
천마 위태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삼백여 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었음에도 이 오만방자한 모습은 어찌나 스승과 제자가 닮았는가.
“오너라. 네 스승은 열 초식이면 충분했으니 제자인 네 녀석은 다섯 초식으로 격하시켜주마.”
“오십 초식도 부족하실 겁니다.”
“혀끝의 오만함은 네놈 스승보단 낫구나.”
과거 천하제일인과 현시대의 천하제일을 바라보고 있는 고수의 대결. 시대를 뛰어넘은 싸움이 가상의 공간에서 성립되었다.
***
“…….”
깊은 어둠 가운데.
신마(神魔)는 태사의에 앉아 적막한 고독을 씹고 있었다.
대계(大計)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십, 수백 년을 준비해온 계획들은 하나하나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혈천신교의 군세는 사천과 운남을 넘어 그 뒤쪽까지 위협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무림맹주 검선 단철량이 패퇴하고, 그 뒤를 이은 남궁세가주 검제 남궁한과 매화검선 선청우까지 물리쳤다.
숨통을 끊어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나머지는 수하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섰거늘 제 몫조차 하지 못한다면 모두 스스로 목을 그어 그 죄를 뉘우쳐야 할 것이다.
“…음.”
신마는 뇌리를 흔드는 충격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마교의 도움을 받은 혼돈의 연구로 얻은 신체 쪽은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지난 수백 년간 하나하나 기워 모아 꿰맨 영혼의 쪽이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여파가 큰 듯하군.’
신마는 자신의 반절을 담고 있는 그릇인 주호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렵지 않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쪽의 영혼들이 잘 수복되기 전까지 자유롭게 풀어놓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무황의 무공을 계승했니, 뭐니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세월의 격차는 쉬이 메꿀 수 없는바. 실제로 자신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해 쓰러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신의 반절이 이쪽의 의지에 반해 돌아오길 거부한 것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자신에게 달려든 검제와 매화검선의 목숨을 취하지 못했을 정도. 비단 정신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겨우 수복해가던 영혼의 결합 역시 흔들리며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그릇의 몸에 있는 것은 반절보다 아주 조금 낮은 수치. 그러니 당연히 이쪽의 의사에 따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조금 더 강경한 수단을 취해야 할 듯싶었다.
“혼돈.”
“예.”
짤막한 부름에 영혼이 연결된 수하인 혼돈이 귀신처럼 나타나 그 앞에 부복했다.
“그릇의 위치는?”
“현재 안휘로 간 것까지 확인되었습니다. 자세한 경로는 수하들이 추적하고 있는 와중입니다.”
“안휘라. 어차피 한 번 거쳐 가야 할 길이로군.”
신마는 위태로이 흔들리던 영혼을 다잡고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흉흉한 안광을 내뿜으며 천하에 선포했다.
“신교의 역량을 전부 집중해 총공세를 펼쳐라. 더 이상의 지체는 용납하지 않겠다.”
핏빛 하늘의 신이 노했다.
하해와 같은 인내심이 메말랐으며, 기나긴 기다림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존명.”
아무런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혼돈의 목소리만이 그 어둠 가운데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