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익숙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눈으로 뒤덮인 산세는 방향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험난했지만, 그곳을 몇 번이고 오갔던 주호가 헷갈릴 리는 없었다.
“…후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채 회복되지 못한 몸의 상처였다.
얼마 걷지도 않았거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신마의 마기에 꿰뚫린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자아내며 신경을 건드렸고, 옷 사이로 파고드는 싸늘한 한기는 등 뒤로 식은땀을 자아냈다.
경지에 오르고 난 뒤 이런 적은 없었기에 사뭇 낯선 느낌이다. 주호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쓴웃음을 참지 못하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인가.”
이윽고 멈춰 선 곳은 산중턱에 자리한 절벽이었다.
비동의 안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기 위한 여파로 만들어진 지형이었지만, 눈 덮인 모습이 꽤 자연스럽다.
슬쩍 주위를 살펴 이곳에 다다른 인적이 없는 것을 발견한 주호는 짧게 호흡을 내뱉고는 손을 뻗었다.
꽈드득.
얼어붙은 절벽이 신음을 토해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연조차 거스르지 못할 막대한 무형지기가 그 위를 짓누른 것이었다.
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공력을 움직인 것뿐인데 속이 울렁이며 입안으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곳으로 오는 도중 꽤 몸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은 먼 듯싶었다.
‘우선은 몸의 회복이다.’
주호는 사신문의 도움을 받아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동선을 숨겼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 가운데 그들의 습격을 받는다면 막아낼 도리가 없는바. 그렇기에 마음 놓고 내상을 치료할 여유도 없었고, 최대한 여정을 서둘렀을 따름이었다.
뒤를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으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 이곳을 발견할까 싶어 안으로 들어간 뒤 눈으로 입구를 뒤덮었다.
곧 비동 안의 적막한 어둠이 오랜만의 방문을 반긴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을 따름이었다.
비동 안은 원래 그 밑을 흐르는 지하수 때문에 습하기 그지없다. 겨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고, 얼마간 앞으로 나아가자 기억대로 살짝 습하면서도 꿉꿉한 느낌이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변한 것은 없나.”
주호는 비동을 가로지르며 감회에 젖은 눈으로 그 가운데를 둘러보았다.
이전에는 천우희의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석을 얻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다시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추억에 젖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줄 알았거늘,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변함이 없는 비동의 모습에 정겨움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비동의 끝. 재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무황의 모습 역시 변함이 없었다.
몇백 년 전에도, 지금도, 어쩌면 자신이 죽은 그 이후에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
혹시 누군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예전의 자신처럼 기연과 우연을 바라고 있을 터.
“적당한 무공이라도 남겨 놓을까.”
이미 무황의 유산인 상태창은 자신이 익혀버렸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양도할 수 있을 방법을 모르니 아마 자신의 선에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할 터.
후인(後人)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 놓는 것도 괜찮은 생각으로 보였다.
툭.
재단 앞에 짐을 내려놓은 주호는 곧바로 몸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비동까지 오는 데도 시일이 꽤 걸렸다. 전장의 상황은 하루마다 휙휙 바뀌고 있는바.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다가 또 소중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에 움직임을 서둘렀다.
챙겨온 영약과 약재를 모두 먹은 지 일주일째.
벽에 기대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주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후우.”
눈을 붙인 지 이각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은 더 이상의 수면을 허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고 있노라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선우연과 계속 시선이 마주치기 때문이었다.
주호는 떠나기 전날 밤에 찾아온 위천강에 의해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었다.
후기지수 일행이 어떻게 도망쳤고, 그 끝에서 무엇이 있었는지.
특히 위천강은 직접 선우연의 시신을 수습한바. 괴로워하면서도 그 모습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왼팔은 잘렸고, 한쪽 눈은 찢겨나갔다. 온몸에는 깊은 자상이 가득했고, 발목은 가까스로 붙어 있을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있는…….’
말해달라고 한 것은 주호 쪽이었다. 하다못해 제자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굳이 위천강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꿈속의 선우연은 아무런 말을 해오지 않았다.
차라리 악에 받친 모습으로 모두 네 탓이라고 원망이나 저주를 해왔으면 마음이 편해졌겠지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슬픈 미소를 지은 채 그저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심마(心魔)였다.
정말로 지독한 심마였다.
물론 그것에서 헤어나올 방도는 있었다.
그가 익힌 청룡신공은 더없이 순수한 정(正)의 기운. 정신을 집중한다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이한 생각 정도는 어렵지 않게 몰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주호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보. 적어도 신마를 쓰러뜨리고 그의 복수를 이룰 때까지는 선우연을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리라.
절그럭.
주호는 이왕 깬 김에 가볍게 몸을 풀고자 검을 집어 들었다.
신검(神劍)은 부서졌다.
도망치던 와중 잔해조차 회수하지 못한 채 영영 손을 떠나버렸다.
청룡의 상징인 신검을 그리 해먹었으니 문주인 하월벽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주호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위로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검은 주호에게도 애착이 있던 것. 앞으로 그만한 검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사흘 뒤.
무리 없이 신공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몸을 회복한 주호는 비동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굳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온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상태창.”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태창을 불러온 주호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 위를 뒤적거렸다.
경지가 상승함에 따라 상태창에 의도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적을 인식하는 것과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는 것은 상태창에 쓰인 정보를 읽는 것보다 그가 느끼는 것이 더 빠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상태창의 능력은 여전히 그에게 큰 도움이 될 따름이었다.
[가상 전투 훈련을 활성화합니다.]
가상 전투 훈련.
상태창의 능력 중 하나로, 지금껏 파악해본 바로는 비동 내에서만 발동한다는 한정 조건이 달려 있었다.
촤르륵.
무려 오백여 명에 달하는 인명록이 펼쳐진다. 일(一)부터 오(五)까지의 등급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강한 고수가 자리했다.
이 년 전, 처음 비동을 나올 당시 주호가 쓰러뜨릴 수 있었던 최대의 적은 삼(三)등급 초반의 절정 고수. 슬쩍 바라보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마 무황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들이겠지.’
그 한 명 한 명의 무공과 싸움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무황은 이 모두와 싸워봤다는 이야기일 터.
오백 여 명의 고수를 꺾은 자.
말 그대로 가히 무황(武皇)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름이었다.
주호는 인명록을 끝까지 올렸다.
최상위에는 당시 입신지경에 다다라 있던 고수들이 있었다.
소림, 무당, 남궁, 화산…….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그 최상위에 있는 것은 신마(神魔)가 아니었다.
천마(天魔) 위태무.
위천강의 까마득한 선조로, 주호 역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역대 천마 중 가장 강했다지.”
당대 천하제일고수.
활동한 시대가 무황과 겹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명록에 있는 것을 보니 그와도 손속을 나눈 것으로 보였다.
이전 주호는 천마라는 이름에 감화되어 큰 모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가상 전투 훈련에서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었다. 비록 현실처럼 실감 나고 환상통이 남았으나, 말 그대로 가상의 전투인 훈련인바. 그렇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천마와 대련을 선택했고.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죽었지.’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오만한 시선, 그 하나뿐이었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사흘 정도는 식음을 전폐하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끙끙 앓았던 기억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옛 추억에 한숨을 내쉰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마의 이름을 선택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가상 전투 훈련 가운데서는 지닌 한계가 없어졌다.
육체도, 내공도, 심력도 제한되지 않는다. 오직 의지로만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본다면 심상의 공간이라 불러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웅웅웅.
가상 전투 훈련이 활성화되자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비동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정신만 상태창이 만든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
새파란 하늘.
신선이라도 거닐 것 같은 정원.
그곳에 떨어진 주호는 날카롭게 감각을 곤두세웠다.
천마 위태무는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고수다. 어지간한 입신지경의 고수보다 강할 터. 여차하면 신마와 비견될 만한 강자일 지도 모른다. 현실과 가상은 다르지만, 만일 그를 꺾을 수 있다면 신마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구나.”
“…….”
귓가로 들려온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주호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간 해왔던 수많은 가상 전투 훈련 가운데 상대가 말을 내뱉은 저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과정을 따랐고, 대화란 것이 성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 위태무는 정원 한쪽에 있는 정자 난간에 기대 가늘게 뜬 눈으로 주호를 바라봐왔다.
“한참도 전에 본 아해인가. 저쪽에서도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 정도 경지에 올랐을 줄은.”
“…천마 위태무.”
“그래. 본좌가 바로 신교의 주인인 위태무다.”
천마는 피식 웃으며 이리로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움직임 하나에서도 미증유의 기운이 느껴지는바. 주호가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나아가자 그는 자신 앞에 자리한 탁자로 눈짓했다.
“앉아라. 오랜만의 손님이니 응당 대접해주어야겠지.”
“…….”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주호는 마음의 검을 날카롭게 벼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쪼르륵.
진하게 우러난 차가 잔에 담긴다. 들라는 눈짓에 주호는 천천히 그것을 손에 쥐고 맛을 음미했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감각은 모두 현실과 같다. 혀와 코끝을 감도는 청량한 향기에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떠냐. 본좌 평생 손수 차를 우려낸 적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수발을 들 사람이 없어 나름 연습을 해보았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따라주는 것치고는 제법 평범한 맛이로군요.”
“쯧. 그럴 땐 빈말이라도 영광이라 하는 것이다. 이 천마 위태무가 따라주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있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쪽에선 얼마가 지났느냐. 십 년? 아니면 이십 년?”
“…….”
주호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말은 즉슨, 천마 위태무는 이곳이 현실과 다른 공간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표정에서 놀람을 알아본 천마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재차 조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명색이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불렸던 본좌다. 그것 하나 느끼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그러한 자가 없었습니다.”
“본좌와 어쭙잖은 이들을 비교하지 말거라. 뭐, 그렇다고 해도 본좌가 본좌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네놈과 처음 마주했을 때였으니. …그래서 본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냐.”
물음.
잠시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던 주호는 이내 직전 대화를 떠올리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 이 년이 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