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교관님,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시잖아요.”
남궁연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으로 모습을 드러내길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두꺼운 솜옷을 걸쳤다곤 하나 아직 병자의 몸으로 이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엔 부담스러울 터.
하지만 그는 얼마간을 더 침묵한 끝에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착잡한 얼굴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항상 당당하던 그의 기세와는 달리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인바. 남궁연은 그것에 눈물이 차올랐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버님을 대신해 가주 대리로 남궁세가를 이끌 거예요. 이쪽 산하에 들어온 문파도 많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당천유 역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패 당정학은 이번 도주 작전에서 한쪽 팔을 잃는 큰 상처를 입은바. 무인에게 있어, 특히 암기와 독을 사용하는 고수에게 있어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잠정적으로 은퇴가 결정된 바였다.
자연스러운 형태로 가주의 자리는 당천유가 물려받게 되었고,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가문과 그 세력을 이끌게 되었다.
“나는 같은 문파의 고수들과 움직일 것 같소.”
“나는…….”
천후는 사신문으로 복귀, 악비산은 말하다 말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아버지랑 형제들이 사천에서 전부 죽은 탓에 강제로 가주 자리에 오르게 생겼다.”
“들었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남은 핏줄 가운데 자네만큼 명성과 실력이 두드러진 이가 없으니.”
“본가의 그 귀찮은 노인네들이 문제지.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절연하는 것이었는데.”
악비산이 산동악가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가운데 남궁연의 시선이 철대환에게로 향했다.
“나는 소속된 문파가 없소.”
“그럼 나랑 함께 가겠나. 그렇지 않아도 고수가 부족하거든. 뭣한다면 당가주 대리로 자넬 가문의 빈객으로 초빙하겠네.”
“당가의 빈객이라. 그래 주면 더할 나위가 없군.”
철대환은 사천당가의 빈객으로 거취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용히 있던 위천강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뭐, 난 이전과 같네. 교를 이끌어야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당대 천마가 교주직을 내려놓았고, 소교주인 위천강은 훌륭하게 신교 내에 있던 역도들을 격퇴했다.
지금에선 완전히 그 세력을 단일화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상황. 반대로 말하자면 위천강이 없다면 천마신교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구나.”
잠자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던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훌륭하게 자라주어 미소라도 짓고 싶었지만,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 얼어붙었기 때문인지 입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교관님께서 전면으로 나설 생각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당천유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왔다.
“되었다.”
하지만 주호는 그들의 말을 부정했다.
육체가 꺾여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패배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선우연의 죽음으로 인해 심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것은 그 어떤 심마(心魔)보다 강대하고 끈질기게, 아마 평생을 달라붙어 괴롭혀올 터.
가슴을 옥죄는 고통 가운데 주호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안휘로 가겠다.”
“…안휘, 말씀이십니까?”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천과 운남의 수복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안휘라니. 더러는 그곳에 뭐라도 있나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을 따름이었다.
“…….”
단 둘, 천우희와 남궁연만이 그 의중을 파악하고 속으로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지금까지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그 메마른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의 활약은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것이었다.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면 그 주역으로 뽑기에 차고 넘칠 정도가 아니던가.
“…폐관수련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
철대환이 해온 조심스러운 질문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가장 중요한 국면이 닥쳐오기 전에 나오려고 노력하마. 그래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주호는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일전 천우희의 병을 치료할 약재인 청석을 찾으러 그곳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무황이 비동은 워낙 특이한 곳이었으니 잊지 않았을 터. 그 시선을 받은 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러 갈게요.”
“고맙구나.”
그 말을 끝으로 주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중 발목이 꺾여 비틀거리자 뒤를 따라가던 천우희가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함께했다. 그들의 신형이 숲 너머로 사라졌을 때 남궁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서둘러 움직이죠.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으니.”
“…그럽시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중요한 국면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그들은 각자 있어야 할 위치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언제 다시 모이게 될지 모르는 그 날을 기약하며.
***
이틀 뒤 깊은 밤.
등 뒤로 봇짐을 맨 한 남성이 연합군 병영을 은밀히 나섰다.
보초를 서고 있는 고수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으로,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 위로 단 하나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을 표홀한 보법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때때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아 어딘가 몸이 불편한 곳이 있는 듯했다.
“…….”
그렇게 쉬지 않고 나아가던 중, 남자는 도시로 가는 눈 덮인 가도 앞에서 멈춰 섰다.
“자는 걸 확인했을 텐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당신의 상태가 엉망이라는 거지.”
주호가 한숨을 내쉬자 천우희가 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루 뒤에 떠난다고 했잖아. 신승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고.”
“서신으로 작성해 남겨두었다. 괜히 마주했다가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나아.”
“두고두고 말이 나올 텐데? 도망친다고 말이야.”
“그것 역시 적당히 둘러대 달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실제로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니.”
“…방도는 있어?”
“모른다. 하지만 해볼 생각이다.”
주호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무황의 비동으로 행선지를 잡은바.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미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감각이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같이…….”
“같이 가겠다는 소리는 삼가도록.”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같이 못가니까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말하려 했어.”
새침하게 대답한 천우희는 곧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에게로 다가와 흐트러진 옷깃을 꼼꼼히 여며주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바라보던 주호와 시선이 마주쳤고,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기습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다.
깊은 밤의 날씨는 싸늘했지만, 서로 맞닿은 부분은 달뜬 숨결이 뒤섞여 뜨거워졌다.
잠시 후 그녀와 떨어진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별 인사 한번 요란하군.”
“아쉬워? 그래도 눈밭에서 옷을 벗을 순 없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로 만족해. 아니면 막사로 돌아가던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사가 끝났으면 가보겠다는 듯 주호는 단호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천우희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연이가 서운해할 거야!”
“그 아이에게도 서신을 남겨주었다. 전달은 부탁하지.”
“…내건?”
“당신은 나올 줄 알았으니까.”
천우희는 못 당하겠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리하지는 마.”
“누가 할 소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몸 성히 있도록.”
지평선 너머로 기나긴 발자국이 이어졌다.
이윽고 주호의 신형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천우희는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무리하지마.”
내뱉어진 새하얀 숨결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덧없이 흩어졌을 따름이었다.
***
안휘성.
중원을 둘러싼 여러 세력의 전쟁이 한창인 만큼 성내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황실과 관이 제 기능을 하고 있고, 무림의 세력이 미쳐 날뛰지 않는 이상 옛날과 같이 민초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간접적인 영향은 지대했고, 삶이 피폐해지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툭툭.
주호는 삿갓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나흘간의 여정 끝에 이곳에 들어선바.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기에 조금 요양한 후 비동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자네 그거 들었나. 또 섬서에서 맞붙었다더군.”
“이번엔 누구인가?”
“궁기라고 하네. 그 사흉수라고 있지 않는가. 아주 미쳐 날뛰었다고 하더군.”
“쯧쯧, 말세로다.”
주호가 연합군을 떠난 뒤 혈천신교는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가까스로 정비를 끝낸 상황. 수많은 고수가 죽거나 부상을 입어 은퇴했지만, 기라성 같은 신진 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그중 돋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었으니.
남궁세가의 남궁연.
사천당가의 당천유와 철대환.
사신문의 천우희, 천후.
산동악가의 악비산.
천마신교의 소교주 위천강.
천우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후기지수의 연배지만, 어지간한 고수 못지않은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더불어 그들이 모두 검신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아 젊은 나이에 초절정 완숙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주호의 이름이 또 한 번 칭송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간에선 그는 무림맹주 검선 단철량을 꺾은 신마(神魔)와의 교전으로 인해 서로 중한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행히 신승이 잘 조치한 것인지 도망 운운하는 이야기는 퍼져 있지 않았다.
‘잘들 하고 있구나.’
객잔 내의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호는 차를 마셨다.
처음에는 너무 무작정 생각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제자들은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그들이 빛나는 것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차를 마시는 도중 코끝으로 매화 향기가 스쳐 지나간다. 한겨울에 매화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호는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휘에 도착한 후 이틀간의 요양을 거친 뒤, 벽곡단을 비롯해 비축 식량을 잔뜩 구매했다.
그러곤 그것들을 모두 짊어진 채 눈으로 뒤덮인 설산을 올랐고, 다시금 무황의 비동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