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76화 (276/300)

#276화

모든 무공을 펼쳤다.

이제는 형(形)마저 흩어져 자연스럽게 녹아든 청룡검법과 검식부터 자신이 만들어낸 삼 초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똑같은 결과로 귀결될 따름이었다.

-분에 넘치는 힘을 탐한 대가다.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도 부족한 것이지.

가슴을 꿰뚫는 서늘한 감촉.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위로 주먹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지만, 적해의 기운이 끈덕지게 그의 생명을 붙들었다. 마치 이곳은 그가 죽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처럼 명줄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다시 신마와의 싸움이 반복되었다.

싸우고, 죽고, 싸우고, 죽고.

셀 수 없을 정도의 장면이 눈앞을 지나간다. 이것이 실체가 아니라 허상 속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주호는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단서를 찾아야 한다.’

신마는 처음 순간 자신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손 위에 얕은 상처를 입었다. 그 직후부터는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무언가 돌파구가 있다는 소리일 터.

하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 번 반복되자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꿰뚫리는 감촉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관성적으로 검을 휘두르긴 했으나, 정해진 결말에 더는 의욕을 잃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끝없이 반복되던 세계 가운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막, 신마가 쏘아 보낸 강선에 가슴이 꿰뚫리고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려던 찰나 주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짙은 약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기억의 편린이 이어지는 탓에 신마에게 쓰러진 직후 바로 깨어난 듯한 감각이 팽배했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솜이 물을 머금은 듯 무겁기 짝이 없다. 몸 안에 한줌의 내공조차 남지 않은 것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소모된 것으로 보였다.

“음.”

강적과의 싸움 이후 자주 병상에 눕곤 했었지만, 이토록 정신까지 피폐했던 적은 없었기에 낯선 기분까지 들었다.

마른세수로 얼굴을 쓸어낸 주호는 탁자 위에 있던 주전자를 쥐었다. 오래 누워 있던 것인지 갈증이 심했기에 그것을 쉴 새 없이 들이켰지만, 피폐해진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전부 도로 토해내고 말았다.

“…젠장.”

주호는 입가를 닦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꼴사납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치우고 싶었지만, 조금 움직일 때마다 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러와 그대로 침상에 다시 몸을 뉘었다.

“상태창.”

오랜만에 읊는 이름에 허공으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그와 별개로 시야 한쪽에 수많은 알림이 존재하는바. 별로 신경 쓸 내용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전부 꺼버리고 상태창에 시선을 집중했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었군.’

허공에 투영된 신체 형상이 이전에 입었던 상처를 표시해왔다.

심장을 빗겨 나간 것은 천운. 하지만 그 이외에 장기나 기맥의 손상이 지대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주호는 조심스레 밖의 기척을 가늠했다.

몸에 구속구나 금제 따위가 없는 것을 보니 혈천신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 듯해 보였다.

이 몸에 깃든 신마의 반절이 중요한 것이지 자신이란 존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연합군의 사기를 찍어 누를 소재로 활용했을 터.

그때 막사의 문을 열고 누군가 천천히 들어왔다. 쟁반 위로 죽과 약 같은 것을 담고 있는 천우희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주호를 보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은 괜찮아? 아,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천우희는 뜨거운 손길로 주호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사스러운 곳까지 뻗치는 손길에도 반항할 기력이 없었던 주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정말, 어떻게 된 줄 알았어.”

“…그 정도로 심각했었나?”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칠 주야를 업혀 왔어. 의선께서도 처음엔 보시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더라고. 당신 몸 안에 있는 그 정체 모를 기운이 끈덕지게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천우희는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 못하겠는지 목이 메었다. 주호는 그런 그녀의 눈가가 부어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일이 많이 지났을 테니 진정하고도 저 상태다. 자신이 누워 있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리라.

“…….”

천우희는 다시금 감정이 복받쳤는지 쟁반을 한쪽에 내려놓고 주호를 껴안았다.

그 따스한 온기가 저물지 않았음을 확인하려는 듯하면서도, 주호의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품에서 그의 품 안에서 훌쩍였을까. 자신의 머릿결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는 주호의 손길에 부끄러워진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새빨개진 눈가를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검제나 매화검선께서는 무사하신가?”

“…두 분 다 큰 내상을 입으셔서 요양하고 계셔. 족히 몇 주는 은거하셔야 할 상처라네.”

“그럴 테지.”

주호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일격에 당한 자신조차 이런 상처를 입었다. 쓰러진 자신을 구출해내고 신마에 대적했으니 그들 역시 적지 않은 여파를 감당해야 했을 터.

곧 천우희는 담담히 주호가 쓰러진 직후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검제와 매화검선이 신마를 막아선 직후, 독패와 천공검이 후기지수 일행을 이끌며 도주했다.

곧 그 둘 역시 닥쳐드는 추격대를 막기 위해 뒤를 지킨바. 목숨은 부지했으나 독패는 오른팔을 잃었고, 천공검은 눈 한쪽이 실명되었다.

지금은 전부 다 요양 중으로 연합군을 이끄는 건 신승이 하고 있었다.

“…신승께서 하산하셨는가.”

사실 조금 늦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천은 이미 저들의 손에 빼앗긴 지 오래며, 운남은 처참하게 무너져 이제는 정도 무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신승이라면.’

주호는 잠깐 눈을 감은 채 소림에서 벌였던 신승과의 일전을 되새겼다.

소림의 절예는 항마(降魔)의 신공.

마도를 걷는 혈천신교의 것과는 상극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 상대가 신마였으니 아무리 신승이라도 승부를 장담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아이들은 무사한가. 날 업고 칠 주야나 고생했으니 감사라도 전해야겠군.”

당장 혈천신교도 진군해오지 않기에 급한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며 그리 말했을 찰나, 천우희는 표정을 굳히며 입술을 씹었다.

“왜 그런 것이지? …설마.”

주호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호흡이 콱 막히며 폐부가 쪼그라드는 감각을 받았다. 어서 말하라는 그 시선을 받은 천우희는 이내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안타깝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연이는 무사해. 다만, 그.”

“말해라.”

“선우연이라고 있지. 화산의 아이가…….”

“많이 다쳤는가.”

“…….”

나지막한 물음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주호는 손끝으로 저며 드는 그 울림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 아직 상처가 심해! 그리 격렬하게 움직이다간!”

“괜찮다.”

주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어 땅에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뼈마디가 시린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뇌리를 뒤흔드는 충격에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서 한숨을 내쉰 천우희는 두꺼운 겉옷을 그의 몸에 둘러주고는 손을 잡아 이끌었다.

“…따라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주호는 그대로 그녀의 인도를 따라 막사를 나섰다.

한겨울의 추위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연약해진 피부를 난도질했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앞서가는 천우희의 등 뒤를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혈천신교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이 추위도 한몫하고 있을 거야. 한파가 너무 심하거든.”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녀의 말대로 겨울의 추위가 너무 심했다. 더불어 천지를 뒤덮고 있는 새하얀 눈은 세상에 색이란 개념을 하나로 규정하는 듯했다.

그들은 본대의 병영을 떠나 조금 더 외진 구석으로 나아갔다. 중간중간 주호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다가왔지만, 그 표정에 서린 분위기를 읽고는 조용히 물러났을 따름이었다.

천우희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발자국 몇 개가 찍힌 울창한 숲의 입구였다.

잠시간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금 주호의 손을 잡아 이끌며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

숲 안쪽의 작은 공터.

여섯 명의 인원이 작은 봉분을 둘러싼 채 숙연한 분위기로 서 있었다.

서로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각자 선우연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선우연의 명복을 빌었다.

처음에는 누구랄 것 없이 오열하며 슬픔을 토해냈지만, 그를 이 땅에 묻은 지 며칠이 지나자 겨우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천 언니? …교관님도?”

숲의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던 남궁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교관님이라는 소리에 다들 나지막한 탄식을 뱉어낸바. 그들은 모두 천우희의 손을 잡고 느린 발걸음으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주호를 바라보았다.

안색은 파리하고 입술은 메말랐다.

그 정도의 고수가 발걸음이 비틀거릴 정도라면 정말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는 소리일 터.

“…교관님.”

남궁연이 다시금 울먹거리며 주호를 불러왔다.

다른 이들 역시 다시금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는지 굵은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떨군바. 주호가 천천히 그들 쪽으로 다가갔을 찰나, 천후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 합니다.”

그는 회담 이전 주호에게 여차할 때를 부탁받았다.

하지만 끝내 선우연을 지키지 못했고, 이토록 차가운 땅 위에 묻히게 만들어 버렸다.

“시신을 살피니 이미 다리에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짐이 되기 싫었기에 스스로 적들의 발목을 묶는 역할을 자처했겠죠.”

위천강이 그를 변호해주듯 울적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주호는 천천히 그 앞까지 다가가 흐느끼는 천후를 다독여주며 일으켜 세웠다.

“어찌 네 탓이겠느냐.”

전부 다 자신의 오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혼원일극신공을 여기까지 연마한 자신이라면 설사 신마(神魔)라 불리는 존재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릇된 판단은 크나큰 파국을 불러왔고, 결국 자신이 아니라 그 주위의 이들이 피해를 보고 말았다.

사락.

주호는 작은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다못해 시신이라도 보고 떠나보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눈 덮인 무덤은 이미 단단하게 얼어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이장할 생각입니다. 이미 화산의 이들과 이야기를 끝내놓았습니다.”

당천유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주호는 맨손으로 그 위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떨궜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깨어져 나간 것만 같다. 자만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의식을 유지한 채 이들과 함께 도주했더라면 결과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미 이 차디찬 겨울의 바람처럼 닥쳐왔고, 뒤바꿀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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