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제발, 제발…….”
위천강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쉴 새 없이 땅을 박찼다.
눈으로 가득 뒤덮인 협곡 위로 희미하게 찍힌 발자국들이 가득하다. 어차피 길목은 한 곳밖에 없기에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며 친우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스읍─.
달려 나가는 와중 위천강은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제일 먼저 집중한 것은 후각.
선우연이 매화 검법을 펼칠 때마다 정말로 매화 향이 솔솔 퍼져나가곤 했다.
매화만리향인지 십만리 향인지 하는 초식을 사용했을 땐 정말로 온 천하에 뿌려지지 않았는가.
한때는 그 냄새가 옷에 짙게 배어 질색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직 그가 싸우고 있노라면 농밀한 매화 향이 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와야 할 터였지만, 코끝을 스치는 것은 비릿한 눈의 냄새밖에 없었다.
바람이 거세지며 옷자락이 펄럭인다. 단정히 정리해두었던 머리카락 역시 잔뜩 헤집어졌고, 나풀거리는 그것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다 쥐어 뜯어버리고 싶었으나, 수하들이 그게 무슨 짓이냐며 울상을 지을 것이 뻔하기에 꾹 눌러 참고 저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
굳어 있던 위천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비록 초췌하고 엉망이긴 했지만, 익숙한 뒷모습이 저 멀리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꼴이 적들에게 된통 당한 듯하다. 그래도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보니…….
푹.
그 등 위로 검 한 자루가 삐죽 솟아오른다. 뿜어진 핏줄기는 바닥에 쌓인 눈으로 흩뿌려졌고, 그 신형 역시 천천히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
위천강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움직이던 다리가 한층 더 가속화해 신형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쇄도한바. 막,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던 적혈마검은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콰아아앙!
손쓸 새도 없이 기습을 당한 적혈마검이 저 멀리 나가떨어진다. 위천강은 그러거나 말거나 황급히 자리에 멈춰선 채 쓰러진 선우연을 살폈다.
뻥 뚫린 가슴의 상처로 피가 울컥울컥 솟아오르고 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그 부위의 혈도를 점하며 출혈을 멈췄고, 상비약으로 지니고 있던 연고와 약재를 그 위에 쏟아 부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게! 출혈량을 보니 심장은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어! 폐에 피가 차기 시작해 숨쉬기는 힘들겠지만, 금방 의원에게……!”
막, 새로운 영약을 꺼내 그의 입에 넣어주려던 위천강의 움직임이 멎었다.
반쯤 뜨인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다. 초점뿐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생기란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씨팔……!”
위천강은 급히 몇 군데 혈도를 더 두드리며 선우연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영약을 삼키게 했다.
워낙 귀한 것인지라 순식간에 액체로 변해 흘러 넘어갔고,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터였다.
“…….”
하지만 선우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손끝은 시퍼렇게 변색되었고 온기랄 것조차 느껴지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가는 와중이었다.
“제발, 제발 정신 차려보게! 내가 왔다고!”
위천강은 필사적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종래엔 멱살을 잡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그 뺨을 때렸지만, 입가에 서린 희미한 미소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
희미한 맥조차 잡히지 않았다.
동공도 꺼진 지 오래였고, 그 찰나에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완전한 생명의 정지. 죽음이라 부르는 그 현상에 위천강은 입을 벌리며 턱을 떨었다.
무엇이.
무엇이 그리 급해서 이리 일찍 가버린 것인가.
아니, 자신이 늦어버린 것일까.
위천강은 소리 없는 오열을 내뱉으며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격전의 시대를 살면서 그 누구보다 주위의 죽음을 많이 지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천강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몸을 붙잡은 손이 수전증이라도 온 것처럼 덜덜 떨리고, 토악질하듯 울음을 토해내었다.
천마신교의 교주를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그가 보일 추태는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이 벅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존경할 만한 무인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저 멀리 땅을 구르다 겨우 몸을 수습한 적혈마검이 다가와 말했다.
그의 얼굴과 팔 위로 시커먼 줄이 그어져 있다. 생명력을 대가로 막강한 힘을 얻는 암천(暗天)을 발동한 탓이었다.
“내 비록 혈천신교의 교인이지만, 죽음을 앞두고서도 의연했던 그 모습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살기와 함께 폭풍 같은 마기가 휘몰아친다. 하지만 위천강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겉옷을 식어가는 친우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산발이 된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손과 발이 추위에 괴사하지 않도록 꽁꽁 동여맨다. 이윽고 그 정리가 끝났을 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교의 소교주인가. 쯧,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군. 네놈들이 여기까지…….”
“닥쳐라.”
이 산세를 뒤덮은 겨울 한기보다 더 지독하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마와 손, 드러난 피부 위로 시퍼런 힘줄이 잔뜩 튀어나와 있다. 위천강은 이 얼어붙은 날씨를 태워 버릴 정도의 거센 귀화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 앞에 선 원수를 바라보았다.
“하하.”
적혈마검은 옅은 미소를 내뱉었다.
긴밀한 사이였던 것인지 꼴에 분노하는 모습이 제법 웃기다. 자신이 보낸 경의는 온전히 저 화산의 고수에게로 향하는바. 마교의 소교주 따위에게 바칠 생각은 없었다.
‘소교주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마교 측의 세력도 제법 움직였다는 것이겠지.’
애초에 마교에게는 거짓된 회담 장소를 전해주었다. 그럼에도 벌써 이곳에 드러내었다는 것은 제법 일찍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것일 터. 아무래도 이들을 추격하다가 시일을 너무 많이 소비해버린 듯싶었다.
“허나.”
허나, 그렇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렇게 말할 찰나, 적혈마검은 온몸을 강타하는 아득한 충격에 소리 없는 신음을 토해냈다.
부릅뜬 두 눈에 돋아난 실핏줄이 터져 나가며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든다. 본능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 막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여파였다.
“…커허헉!”
직전과 같이 땅을 몇 번이나 구르며 충격을 흘려냈다. 그 직후 분노에 찬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위천강의 공세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기고만장하구나!”
적혈마검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그 손에 쥔 핏빛 마검이 맹렬한 기세를 부풀리며 허공을 뒤덮는다. 어지간한 고수라 할지라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날 기세였으나, 이성을 잃은 위천강은 오히려 한 발자국 그에게 가까워졌다.
쿵.
위천강이 강한 진각을 내딛자 산세로 심상치 않은 기파가 퍼져나가며 강맹한 마기가 모여들었다.
적혈마검은 그를 보며 조소를 흘리곤 한 발짝 먼저 마검을 베어 갈랐다.
카가각!
맨손과 검이 부닥친다. 서로 강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같았으나, 비슷한 경지에 있다 보니 검과 손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위천강은 수공을 전문적으로 익히지도 않았기에 불리한바.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어 올랐다. 새하얀 눈 위로 시뻘건 피가 흥건하게 흩뿌려졌지만, 그는 한 치의 물러남 없이 오히려 반대 손을 뻗었다.
염라쇄혼장(閻邏碎魂掌)
혼마저 불태워 버린다는 극양의 마공이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적혈마검은 곧바로 검을 빼내 그것을 막아내려 했으나, 위천강의 손이 검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탓에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 손을 도륙 낸다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 역시 치명상을 입을 터.
검이 붙잡힌 적혈마검은 딛고 있던 발을 힘껏 뻗어 위천강의 장법이 전부 펼쳐지기 전에 그 앞을 막아세웠다.
쿵!
서로 부딪치는 기운은 전보다 더 강대했으나, 이번엔 작정하고 대비한 덕분인지 이전처럼 맥없이 밀려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적혈마검의 두 눈이 빛났다.
위천강이 그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살짝 멈칫할 찰나, 그의 마기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검날을 붙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이번엔 그쪽에서 쉴 새 없이 공세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쉭-서걱.
깊숙이 베인 손바닥과 별개로 어깨와 몸 곳곳에 자상이 새겨진다. 처음엔 기습을 당해 당황했지만, 분노에 이성을 빼앗긴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만큼 손쉬운 일은 없었다.
“마교의 이름이 우는구나. 이 정도라면 몇십 년까지 공을 들여 침투할 의미는 없었어.”
스릉─.
그 도발에 응하듯 위천강은 검을 뽑아들었다. 좌수검(左手劍)인지라 적혈마검에게 베인 상처가 벌어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마기를 피어올렸다.
천마검식 일식(一式) 극마(極魔)
천마신공.
강호 제일의 신공으로 꼽히는 무공의 발현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본 적혈마검 역시 신중한 기색으로 전력을 다해 마검을 휘둘렀다.
쿠구구구궁.
세상을 뒤덮는 어둠 가운데 자욱한 기파가 산세를 뒤흔들었다. 지금껏 겪었던 검과는 차원이 다른 여파로 조금 먼 곳에선 눈사태마저 일어났을 정도였다.
“…….”
그 가운데 서 있던 적혈마검은 헛기침을 토해내며 힘겹게 검을 세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전력을 다한 검이 가까스로 동수를 이루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남은 암천의 기운이 삼분지 일에 가깝게 소모되었지만, 이 정도라면…….
“이식(二式).”
천마검식 이식(二式) 탈마(脫魔)
웅혼한 마기의 무게가 사방을 짓누른다. 마치 태산이 찍어 누르는 듯한 그 압력에 적혈마검의 온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끄으아아아아아악!”
무릎이 굽혀지면서도 그는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암천의 기운을 끌어모아 자신을 찍어 누르는 힘에 저항했고,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위력을 자랑하는 초식이다. 상대도 남발할 수는 없을 터.
“삼식(三式).”
“…이런 미친.”
하지만 그 직후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적혈마검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전 것보다 더 강한 것이 남아 있다고?
자신이 천마신교를 과소평가한 것인가.
물론 위천강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그가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은 극마일 뿐. 탈마와 삼 초식은 입신지경에 다다라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교주인 천마에게서 그 심득을 물려받아 이론만은 완성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고, 그렇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초식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천마검식 삼식(三式) 신마(神魔)
마도(魔道) 최강의 절기가 펼쳐진다. 수백, 수천 개의 검이 대지를 휩쓸며, 마치 세상의 종말이 왔음을 고하듯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신마에 휩쓸린 적혈마검은 다른 것들과 함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한바. 자욱한 눈발이 분진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피투성이의 위천강은 선우연의 시신을 들고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리한 초식의 운용 때문인지 안색이 파리하다. 하지만 그렇게 속에 쌓인 무언가를 토해내지 않고서는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흩날리는 눈발이 꺾인 가지에 내려앉았다. 다시 봄이 찾아온다고 하여도 꽃 피기는 어려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