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살점이 베여 떨어진 자리로부터 피가 후드득 쏟아졌다.
직전까지는 젖은 의복이 달라붙어 자체적으로 지혈이 되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 통째로 잘려 나가 출혈을 막을 수 없어진 것이었다.
선우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혈도를 짚었다.
하필 오른팔을 다쳤기에 잘 움직이지 않는 왼손으로 꾹꾹 팔 위를 눌렀을 따름이었다.
“…어찌, 어찌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지?”
적혈마검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일행을 떠나보낸 뒤 협곡의 입구에서 있었던 싸움은 처절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칠혈성 중 남은 넷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쓰러뜨리고 이 안쪽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손속을 두지 않은 채 협했으나, 선우연은 쓰러지는 척하면서 여력을 숨겨두었다가 도리어 날카로운 역경을 펼쳐 그들의 발을 묶어버렸다.
작금 이곳의 풍경은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난장판이 되어있는바. 일다경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주변에 끼친 여파는 작지 않았다.
“무엇이 말인가.”
“…어찌 그렇게 태연하게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는 말이다. 먼저 간 일행이 원망스럽지도 않는 것이냐?”
그 말에 선우연은 피식 웃었다.
왼쪽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꺼풀에 눌어붙은 것인지, 아니면 상처를 입어 실명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왼팔은 이들에게 목숨을 건 역공을 펼치기 위해 희생시킨바. 일전에 백내이에게 당했던 상처가 재차 벌어지며 더 심한 모습이 되었다.
이제 팔꿈치 아래로는 감각이 사라져 붙어 있는 것인지도 의아스러울 따름이었다.
“네놈들도 같지 않느냐.”
“…같다고?”
“목숨 걸고 중원을 침공한 것이 사리사욕 때문이라고 하지 않겠지. 그 신마니, 악마니 하는 녀석을 믿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는 것이 아니더냐.”
선우연은 짧게 숨을 토해냈다.
상대가 대화를 걸어온 사이 운기를 통해 피폐해진 육신 사이로 한 줄기 내기를 불어넣었다.
남은 것은 둘. 처음 닥쳐왔던 네 명 중 한 명은 왼팔을 대가로 목을 쳐냈고, 다른 한 명은 방금 상처를 감수하며 가슴에 치명상을 입혔다.
지금은 저 뒤로 물러나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절망적인 상황인 것은 변함없었다. 그중 가장 강해 보이는 적혈마검과 백혈귀창이 건재하게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사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헛된 일이다. 우리만 네놈들을 추격했는지 아느냐. 당장 협곡 안에 들어간 이들만 할지라도 백은 넘을 것이다.”
“그 정도는 괜찮다. 나는 너희들만 막으면 된다.”
선우연은 믿었다.
비록 정상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친우들이 어쭙잖은 녀석들에게 쓰러질 리 없지 않은가.
“오라. 내 너희를 벰으로서 화산의 정기가 아직 이 땅에 꺼지지 않았음을 널리 알리겠다.”
날이 다 빠진 검이 들어 올려졌다.
이름 모를 혈천신교 마인의 것이었지만, 그 위에 떠오른 푸르스름한 강기만은 정순하기 짝이 없었다.
‘내 숨이 붙어 있는 이상 저들의 단 한 발자국도 이 뒤로 내딛지 못하게 하리라.’
독안(獨眼)으로 필사의 각오가 일렁인다. 선우연은 올라오는 각혈을 삼키며 자신의 기세를 피어올렸다.
여기서부터는 서로 악만 남은 기세 싸움이었다.
교관님이 자신들에게 목숨을 건 실전을 이야기할 때 항상 강조하던 것이 있지 않은가.
싸움은 항상 기세로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뭔가 있는 척을 한다면 상대는 그것을 경계하느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고.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을 패퇴시키는 것으로 힘이 거의 다했지만, 단전에 내공을 쥐어 짜냈다.
도중 잠시 망설임이 들었지만, 자신의 앞에서 두 눈을 부라리고 서 있는 두 마인을 보고는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웅웅─.
선천진기까지 담긴 검이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며 선명한 날을 세웠다.
설령 다시 검을 쥐지 못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어차피 그날 한 번 죽지 않았는가. 다시 살아난 목숨, 저들을 위해 바치는 것은 절대 아깝지 않았다.
조금 아쉬운 것이라면 더는 저들 사이에 껴서 웃고 떠들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련을 지우고 검을 쥐었다. 몸의 근육을 당기고, 한쪽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눈 한쪽이 암전되었으니 남은 하나로 모든 정보를 처리해야 했다.
입가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적들은 이제 호흡할 여유도 주지 않을 테니 숨을 가다듬어놓아야 했다.
쐐애액!
적혈마검과 백혈창귀가 동시에 달려들었을 때, 선우연은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매화검법은 버렸다.
매화검법은 사계를 맞이하는 매화처럼 변화를 기조로 한 환검. 어지러이 피어난 매화를 그려낸 것이니 필연적으로 움직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몇 번이나 더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알맞은 검법은 아니었다.
선우연은 두 눈을 감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철대환의 권각술은 한 마디로 묵직하다 할 수 있었다. 신법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비무라도 한다면 유령을 쫓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거우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그것이 철대환의 무공이었다.
당천유는 간결함의 정점에 다다라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독하는 것이 은밀하기 그지없다. 당소혜 때문에 한동안 독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동생이 회복한 뒤로 그간 쌓인 것을 해소하듯 독을 펑펑 뿌려댔다.
도망치면서 적들을 가장 성가시게 하고 또 많이 쓰러뜨렸던 것은 아마 그가 아닐까 싶었다.
남궁연의 검은 한 마디로 유려하다고 정의할 수 있었다.
검의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 가는 몸에서 어찌나 강한 힘이 나오는지. 그녀가 펼치는 창궁무애검법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처음엔 자신보다 하수였지만, 순식간에 따라잡혀 이제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악비산은 우직한 성격이나 모습과 달리 그 몸은 민첩했다. 또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머리마저 지니고 있어 처음 싸우는 이라면 그 인식에 빠져 곤욕을 치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천강이 펼친 무월십이검이라 하는 검술은 처음 들어보았다.
선우연은 그것이 매화검법에 비견될 만한 고절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산의 문도들이 들었으면 그런 근보도 이름도 없는 무공과 화산을 비교하냐고 질타를 가했을 터.
하지만 매사에 가벼운 행실을 보였던 위천강이 간혹 비무에 진심을 드러냈을 때 보이는 신위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패도적인 것이었다.
천후. 보이되 따라잡을 수 없던 경지였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따름이었지만, 지금은 그가 휘두르던 도의 움직임이 눈에 훤히 보이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기기긱.
팔의 관절이 신음을 토해내며 꺾이자 검의 궤적이 뒤틀렸다.
평생을 그리던 매화가 지워지고, 그것을 태우는 불꽃의 흐름을 그려냈다.
주작도법의 형을 흉내 낸 것이었다. 물론 내공의 운용도, 구결도 달라 그저 껍질만 뒤집어쓴 것에 불과했지만, 그 변칙적인 움직임에 적혈마검이 진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지막.
‘교관님의 검.’
완전무결(完全無缺).
그 하나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경지에 오르고서도 교관님의 적수공권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는 만큼 다른 이들과 달리 흉내를 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선우연은 시답지 않은 것은 다 지워버렸다.
딱 하나, 딱 한 가지만 가져올 수 있다면 만족할 따름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지만, 정신은 온전히 그것에만 집중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완성을 훔치는 것? 아니, 완성을 빼앗는 것이었다.
결론에 다다르자 온몸에 세포가 활짝 열리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산세에 이는 겨울바람 하나하나의 흐름이 느껴졌으며, 저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선명한 적의가 피비린내처럼 코끝을 찔렀다.
퍽.
백혈창귀가 내지른 창끝이 왼쪽 어깨를 스친다. 하지만 극한에 다다른 선우연의 집중력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위에서부터 아래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교관님께서 만드셨다는 초식.’
일 초식 일섬(一閃).
한 번의 번뜩임. 깨달음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흉내 내보려 따라 했지만, 천후를 따라잡는 경지로는 부족했다.
더불어 통제를 벗어난 왼팔이 흔들린 탓에 균형이 살짝 무너진바. 이제 기회는 몇 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선우연은 검을 다잡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힘을 실어 흔들림 없이 땅을 지탱하고자 했다.
‘화산의 무공은 완전히 버린다.’
품는 건 그 의념이면 족했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일섬의 모습을 떠올리며 반복했다. 교관님께서는 귀찮을 텐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그 초식을 선보여 주셨다. 비무도 몇 번 했기에 그 과정과 움직임은 머릿속에 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기억의 편린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주마등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저 끝자락이나마 닿기를 원한다. 이 비루한 목숨을 불태우는 것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으로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은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린 어느 날로 되돌아갔다.
-보아라.
기억 속의 주호는 검을 잡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볍게 내리그었다.
무언가 고절한 초식이라도 알려주나 싶어 흥미 깊게 보았던 자신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냥 벤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냥 일직선으로 벤 것이다. 너는 할 수 있겠느냐.
-왜 못하겠습니까.
선우연은 주호를 따라 허공을 직선으로 베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주호는 고개를 저었을 따름이었다.
-아니다.
-뭐가 아닙니까?
-네 검에는 흔들림이 많았다. 아무런 미동 없이 완벽한 일직선을 그려야 한다.
-…그게 무슨.
-완벽이란 말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위에서 아래로. 그저 가벼운 직선일 뿐이지만,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은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귀결된다. 너는 네 검이 곧은 직선을 그렸다고 생각했겠지만, 궤도가 비틀려 있었다. 창피할 필요는 없다. 다른 대부분 역시 그러할지니.
-…너무 비약하신 거 아닙니까? 혹시 이거 무슨 선문답입니까?
공기니, 먼지니.
검날이 얼마나 날카로운데 그런 것 하나 베지 못하고 궤도가 뒤틀리겠나.
-그리고, 마음은 무엇입니까.
선우연 자신은 일류 경지에 이르러 검과 하나가 되는 신검합일을 이루었다.
검에 의념을 싣는 일 따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바. 하지만 주호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중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이다.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수가 된다는 것은 그 무의식을 부정하고, 의식적으로 완벽함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다.
선우연은 당시 그 말이 이해되질 않아 슬쩍 친우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모두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신과 같이 이해하질 못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교관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척.
한 손으로 검을 잡고 하늘 위를 향해 바로 세운다. 위에서 아래로. 그 아래를 베어내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섞인 불신(不信). 단지 그것뿐이었다.
쐐애액!
커다란 동작은 필연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내는 법. 백혈창귀의 창끝이 허공을 날카롭게 꿰뚫으며 선우연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잠!”
옆에 있던 적혈마검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제 동료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백혈창귀는 확신을 가진 채 끝까지 창을 내지른 직후였다.
파아앗-!
하늘에서부터 땅을 향해 내리그어지는 검 위로 작열하는 빛이 타올랐다.
검강 따위가 아닌 선명한 격의 발현. 분명 그보다 한 차원 위의 경지였다.
저저적─.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궤적에 휘말린 백혈창귀의 이마로부터 턱 끝까지 새빨간 실선이 그어진바.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떠밀려 반으로 갈라진 채 쓰려져 내리고 말았다.
“…….”
손 쓸 틈도 없이 목숨을 잃은 백혈창귀의 모습에 적혈마검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선우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음을 토해내었다.
백회가 열렸다.
상단전이 깨어나며 새로운 경지에 접어듦을 알려왔다.
초절정 경지를 넘어선 무언가.
머리가 시원해지며 그간 자리 잡고 있던 복잡한 응어리가 탁하고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가슴에 일렁이는 불꽃은 꺼지기 직전인바. 남은 한쪽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무거웠고, 검을 쥔 팔은 이제 올라가지 않았다. 회광반조라도 오면 좋으련만, 조금 전에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것으로 기력이 다한 것인지 몸이 비틀거렸다.
“…인정하마.”
그 앞에 선 적혈마검은 검을 세우며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의 실책이었다. 네놈을 쓰러뜨리려면 애초에 이쪽도 목숨을 걸었어야 했다.”
함께 왔던 네 명 중 이제 남은 것은 자신 하나뿐. 그렇기에 적혈마검은 침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화산의 검객이여, 이름을 알려다오. 내 비록 적이지만, 최대의 경의를 담아 자네에게 죽음을 선사하리라.”
“이름이라.”
선우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낭만이 넘치는 최후가 아니던가.
이제껏 생사결을 벌이던 적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모습이라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자신에게 경의를 보내는 상대에게 답했다.
“그저 오너라. 화산의 검에 이름은 필요 없으니.”
어느 봄날,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하여 우연(偶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