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허억, 허억…….”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거친 숨소리들이 협곡 안에 울려 퍼졌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점차 사그라들 정도로 멀리 왔을 때, 남궁연은 입술을 씹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선우연이 자신들을 위해 남았다.
말은 어느 정도 발을 묶고 도망친다고 했지만, 수많은 적이 둘러싼 가운데 그리 쉬이 몸을 내뺄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는 중 그녀는 철대환의 등에 업힌 주호를 바라보았다.
끈에 둘둘 묶여 그가 달려나갈 때마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힘없이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두 눈을 뜨고 조금 늦었다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주호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관님, 제발, 제발.’
제발 눈을 뜨셔서 저희를, 선 공자를 구해주세요.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생각이었으나, 이것밖에 기댈 구석이 없었다.
수련 끝에 경지에 올라 여러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따름이었다.
정작 중요한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꼴사납게 도망만 치지 않은가.
남궁연은 남몰래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한 명이라도 처진다면 남은 이들도 힘들어지게 되는바. 이럴수록 더 정신을…….
“앞에 매복이다!”
천후의 날카로운 일갈이 일행 사이를 갈랐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길목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적들이 살의를 내보이며 이쪽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이, 이……!”
천후가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홍령도를 휘두르기보다 먼저 두 눈이 새빨개진 남궁연이 땅을 박차며 벼락처럼 검을 내질렀다.
파아앗-!
굵은 강기 다발이 하늘을 뒤덮듯 온 천지에 떨어져 내렸다.
비기 만천검우(萬天劍雨).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을 해석해 그녀가 만들어낸 절초가 들이닥친 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렸다.
평상시라면 감탄을 내뱉었을 신위. 하지만 일행은 굳은 얼굴로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우욱.”
하지만 그 반동 역시 작지 않았다. 땅에 내려선 남궁연은 몇 걸음 채 움직이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토해냈다.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이전에 입었던 내상이 재차 도진 것이었다.
“소저!”
당천유가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숨을 고를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여유는 없었다.
“저깄다!”
“놓치지 마! 여기서 잡는다!”
협곡 좌우로 뒤쪽에서부터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을 습격해온 것이었다.
“…설마.”
철대환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그들이 온 방향은 선우연이 지키고 있던 길목. 설마 그를 쓰러뜨리고 이곳까지 닥쳐온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이 등장한 적들에겐 교전의 흔적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선우연이 막고 있는 길목과는 별개로 이곳에 당도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쐐애액!
당천유는 암기를 아끼지 않고 뿌려댔다.
원래 지니고 있던 것들은 이곳까지 오며 전부 사용해버린바. 지금 그의 손에 쥔 것들은 나무를 깎거나 돌을 갈아 만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혈접이란 별호답게 당천유가 뿌린 암기들은 당가 비전 암기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선보였다.
“끄아악!”
“당가의 고수다! 암기뿐만 아니라 독도 유의해!”
어지간한 고수일지라도 그 한 수를 막아내지 못하고 급소를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더러는 당천유가 당가의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독을 조심했지만, 독 역시 암기와 같이 이미 옛적에 다 떨어졌을 따름이었다.
“쯧.”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보며 당천유는 혀를 찼다.
어느 경지 이상의 고수들은 이런 급조한 암기로는 쓰러뜨리기 어려웠다.
적어도 우모침 몇 개만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지만, 아쉽게도 수중에 잡히는 것은 나무를 꺾어 만든 목침뿐이었다.
“흡!”
선두에선 악비산이 맹렬하게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승인 백호에게서 받은 창은 부러져버린 뒤. 그 이후에는 검을 주워 쓰거나, 아쉬운 대로 나무를 깎아 봉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던 와중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마두와 조우했고, 어렵지 않게 쓰러뜨린 뒤 녀석이 사용하던 창을 손에 넣었다.
파바박-!
쇠를 통째로 넣어 묵직하기 그지없다. 그저 날이 조금 무디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파괴력만은 이제껏 사용했던 창들 중 발군이었다.
‘돌아가면 좋은 창이나 하나 구해달라고 해야겠군.’
장인은 도구를 탓한다고 하지 않지만, 무기의 아쉬움은 너무나도 컸다.
제대로 된 무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선우연이 굳이 길목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남지 않았어도 되었을 터.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그를 구하러 가고 싶었으나, 여기서 한 명이라도 몸을 내빼면 다른 이들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었다.
“…….”
특히 남궁연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만천검우의 초식을 펼친 것이 그것을 앞당겼을 뿐, 얼마간의 차이였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혈천신교의 고수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벼락처럼 자리를 박차 그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갈비뼈 사이에 박힌 검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내력을 사용해 거칠게 뽑아내었겠으나,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그러하기엔 힘들었다.
서걱.
뒤이어 닥쳐온 적들이 날카롭게 검을 내지른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음에도 몇 군데 자상을 입은바. 종래엔 적수공권을 펼쳐 그들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퍽!
상처투성이가 된 손날을 쭉 뻗어 상대의 목을 분지르고, 그가 놓친 검을 허공에서 채어 자신의 뒤를 공격해오는 이의 가슴으로 내던졌다.
혈천신교의 고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었지만, 그 직후 거의 동귀어진을 각오한 채 달려드는 남궁연의 기세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흡-!”
한계에 다다른 호흡을 토해낸 뒤 반사적으로 휘둘러지는 상대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다. 그러곤 정권을 내질러 상대의 단전을 후려쳤다.
“…컥!”
혈천신교의 고수는 두 다리가 잠깐이나마 땅에서 뜨였을 정도로 강대한 충격을 받았다.
시뻘게진 두 눈을 부릅뜨고 눈과 귀에서 피를 쏟아낸다. 단전과 함께 내부 장기가 망가졌을 정도로 막중한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으.”
쓰러진 적의 앞에서 남궁연 역시 주저앉았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적들은 쉴 새 없이 이쪽에 닥쳐드는바. 일행의 짐이 되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으나, 자꾸 감기는 눈만이 야속하기만했다.
퍽!
그 직후 누군가의 발이 남궁연의 배후를 기습하려던 이의 머리를 깨부순 채 날려 보냈다.
찰나간 자신이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숨을 고르시오. 아직 그럴 여유는 있으니.”
“…고마워요, 철 공자.”
남궁연은 적들의 옷자락을 찢어내 팔다리를 질끈 동여매는 것으로 지혈했다.
그와 동시에 저 너머에서부터 또 한 무리의 인영들이 닥쳐왔다.
와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시뻘건 무복을 입은 이들이 적어도 수십이다. 방금 싸웠던 이들과 달리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도 섞여 있는바. 이제껏 담담히 일행을 이끌었던 천후조차 낯빛이 어두워질 정도였다.
‘…이제는 누가 남아 발을 묶고 말고 할 때가 아니다.’
천후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막, 악비산이 마지막 남은 적의 목숨을 끊던바. 그는 바로 위에서 이쪽을 향해 닥쳐오는 적들을 보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지옥이 따로 없군.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구나.”
“…다들 집중해주시오. 나는 교관님의 탈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같은 마음이니.”
찰나 동안 운기한 것으로 조금 기운을 찾은 남궁연이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나도 마찬가질세.”
“두말하면 입 아프지.”
당천유와 악비산 역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바. 잠시간 그들을 바라보다 철대환과 시선을 맞이한 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준비하게.”
결사의 각오를 마쳤다.
천후는 홍령도를 다잡으며 끓어오르는 피를 억눌렀다.
담담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역시 이들에게 정이 들었다. 길목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남은 선우연이 미치도록 걱정되었지만, 자신까지 흔들렸다간 여기까지 온 것이 허사가 될 수 있었다.
“─주작신공.”
내공을 아끼기 위해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던 신공의 기운이 홍령도의 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 역시 자신의 진신절기를 펼칠 준비를 끝낸바. 이윽고 적들이 지척에 다다랐을 때, 천후는 힘껏 땅을 박찼다.
아니, 박차려 했다.
핑─!
협곡 위, 울창한 숲으로부터 한 발의 화살이 길고 높게 쏘아져 내렸다.
그것은 천후 일행과 혈천신교 고수들 사이에 툭, 하고 떨어져 내린바.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그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무수한 화살의 비가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렸다.
쏴사사사-!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다고 느낄 정도로 매서운 공세였다.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해나갔다.
이윽고 화살 비가 끝났을 때,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바.
펄럭─.
수라와 악귀의 형상이 그려진 천마신교의 휘장이 펄럭인다. 그 가운데 나와 있던 위천강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회담 장소를 이상한 곳으로 알려주더니 이런 수작을 벌이고 있었구나!”
그의 시선이 자신들의 친우들을 향했다.
철대환 등에 업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주호, 그리고 며칠 밤낮을 고생한 듯 초췌한 행색까지.
위천강은 이를 갈며 짤막하게 내뱉었다.
“전부 쳐죽여라.”
“존명!”
그 뒤로 들이닥친 천마신교의 고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몸을 날렸다.
천후를 비롯한 후기지수 일행은 그런 그들의 등장이 그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다들 괜찮은가!”
위천강은 서둘러 친우들에게로 다가왔다.
얼마나 고생한 것인지 명문 정파의 자제란 것들이 개방의 거지들과 비교해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게!”
위천강은 짐짓 농을 던지듯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했다.
그간 이들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인가. 목숨 한 번 구해준 것으로 퉁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 생색은 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위 공자, 위 공자…….”
“그래, 소저. 내가 왔소. 그러니 걱정하지…….”
위천강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남궁연을 토닥임과 동시에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면면 중 익숙한 얼굴이 하나 없는 것을 발견하곤 제자리에 우뚝 섰다.
“우연이 그 친구가 적들의 발을 묶기 위해 홀로 협곡 입구에 남았네. 부디……!”
정신을 차린 당천유가 다급하게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천강의 신형이 빛살처럼 그곳을 향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