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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271화 (271/300)

#271화

주호는 이를 악물었다.

극한으로 운용된 혼원일극신공이 신검 위로 잿빛 기운을 피워올리며 검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신마 역시 그것에 대항하듯 혈천(血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핏빛 기류를 흩뿌리며 담담히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제길.’

하지만 신검은 여전히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격차가 나는 것인가. 주호의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가 펼쳐졌다.

치지직─!

혼원일극신공의 잿빛 기운이 신마의 핏빛 혈류를 중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기보다 더 윗선의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던 그 혈류가 녹아내리며 흩어졌고,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으로 감싸인 신검의 날은 기어코 신마의 손에 닿았다.

물론 그 손을 베어버렸다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 치도 되지 않는 짧은 자상과 함께, 시뻘건 선혈이 날을 타고 흘러내렸을 따름이었다.

“…….”

신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자신이 그의 공격에 상처 입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주호는 신마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아압!”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단 한 순간의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신검의 궤적이 맹렬하게 몰아치며 신마를 닥쳐갔다.

청룡검법, 검식, 그리고 그가 만든 세 개의 초식까지.

입신지경의 고수가 작심하고 펼친 무공이 끼친 여파는 지대한바. 마지막 삼 초식 나찰(羅刹)이 펼쳐진 직후에는 이미 반경 몇 장은 초토화된 뒤였다.

혼돈을 비롯한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선청우나 후기지수들까지 그것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물러났다.

오로지 신마와 주호만이 그 황폐해진 땅 가운데 오롯이 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다만, 신검을 멈춘 주호의 어깨가 들썩였다. 기세 좋게 검을 휘두른 것은 좋았지만, 직전의 일은 요행에 불과했던 것인지 단 하나의 공격도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입신지경에 오른 직후 아무리 격렬하게 싸워도 지친 것을 느낀 일은 얼마 되지 않은바. 지금은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인지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가증스럽구나. 어찌나 닮았을까.”

신마의 눈동자는 이전과 달리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투명하지 않았다.

그 안에 서린 것은 지독한 분노와 멸시. 그리고 주호의, 혼원일극신공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격렬한 감정이었다.

신마는 곧 손을 들어 올렸다.

주호의 검을 막아내느라 손바닥에 작은 생채기가 났던 오른손이었다.

‘이기어검? 심검?’

신마는 어떤 공격으로 닥쳐올 것인가. 이전 남궁한과 선청우를 공격했던 수법은 읽어내지 못했다. 선청우 때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온몸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어떤 공격이 오든 즉각 반응하리라. 하지만 그 직후 펼쳐진 것은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피잉─.

신마의 손끝으로 시뻘건 혈류가 뭉치더니, 이내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허공을 꿰뚫었다.

지법? 탄공? 그것을 무슨 무공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무공이 맞는 것일까.

이쪽에 도달한 것은 보았다는 인식보다 더 빠른 찰나의 찰나. 하지만 주호는 정말로 본능적인 위기감 가운데 신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것으로는 신마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컥.”

그 어떤 적과 맞서도, 그 어떤 무공을 받아내도 버텨내었던 신검의 날이 무참히 부러져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주호의 가슴을 꿰뚫어버린바. 마치 꽃이 피어나듯 뿜어진 피가 땅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주호의 무릎이 꿇렸다. 부러진 신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짧은 찰나에 피가 다 빠져나가 버린 듯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야가 붉게 물든다. 천천히 얼굴을 훑으니 눈코입, 심지어 귀까지 시뻘건 피로 흥건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웩.

심한 내상으로 인해 시커먼 사혈이 토해져 나왔다. 그것을 끝으로 주호가 의식을 잃었을 때, 그 앞으로 다가간 신마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주호의 앞으로 다가간 신마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분에 넘치는 힘을 탐한 대가다. 목숨으로 치러도 부족한 것이지.”

칠공에서 각혈하며 죽어가리라.

신마는 싸늘한 어조로 그리 고했을 찰나, 두 개의 기운이 맹렬한 속도로 그에게 닥쳐왔다.

저 멀리 휩쓸려 나갔던 남궁한과 주호의 신위로 잠시 물러났던 선청우가 그의 위기를 보고 달려든 것이었다.

“같잖은.”

신마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이전과 같이 한 손으로 가볍게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직후, 비틀거리는 무릎에 의문을 표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바. 신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혼돈이 준비한 이 몸은 구할 정도 적응을 끝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혼 쪽인 듯했다.

“…음.”

무황에 의해 수백 갈래로 찢어진 영혼을 수백 년에 걸쳐 겨우 한곳으로 모았다.

이제 남은 것은 주호의 몸에 깃들어 있는 반절. 하지만 그것의 흡수에 실패하자 이쪽에도 균열이 생기며 심상치 않은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비키거라.”

신마는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주호가 죽으면 그 혼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러니 가급 적 산 채로 안에 있는 혼을 가져와야 했다.

“흡!”

하지만 남궁한과 선청우는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맹렬하게 피어오른 수백 줄기의 강기가 사방에 흩뿌려지며 신마의 전진을 막는다. 그사이 은밀하게 다다른 신창원이 쓰러진 주호의 신형을 둘러업은 채 빠른 속도로 전장을 이탈했다.

다시금 남궁한과 선청우가 합공해왔을 때, 영혼의 균열을 재차 느낀 신마의 손끝이 떨렸다.

“혼돈.”

캉!

나지막한 부름에 반응한 혼돈이 신마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쫓아라.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여도 좋다.”

“존명.”

파아앗!

혼돈이 대답함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사흉수와 칠혈성의 고수들이 모조리 자리를 박차며 달려나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남궁한과 선청우 역시 도주한 지 오래. 혈천신교의 고수들이 맹렬하게 그 뒤를 쫓을 뿐이었다.

“…….”

신마는 옅게 숨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렸다.

반신을 마주한 것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격렬히 싸웠기 때문일까. 전신으로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이제 머지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등 뒤로 펼쳐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수백 년을 기다려왔다.

그 끝이 머지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사천은 혈천신교의 영역권이 되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들이 다다르는 모든 곳마다 적들이 상주했으며, 시시각각 꼬리를 쫓는 이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직선으로 간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이지만, 꼬이고 꼬인 덕분에 회담 결렬 후 이틀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사천 일대를 헤매고 있었다.

“…교관님께선?”

“출혈은 멎었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이 없으셔.”

“제기랄.”

그들이 숨어든 곳은 어느 산맥 중턱쯤에 자리한 버려진 절이었다.

주호의 상태가 점점 좋지 않아졌기에 일단 이곳에서 쉬어가기로 한바. 응급처치는 대충 끝냈지만, 창백한 안색의 그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도 좀 쉬거라. 망은 내가 보고 있으마.”

“…저도 돕겠습니다.”

독패 당정학과 천공검 신창원이 후기지수들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섰다.

하늘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그나마 멀쩡한 담벼락에 걸터앉은 둘은 한동안 산세 밑을 바라보며 혹시나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적들이 있을까 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창원 쪽이었다.

“…독패께서는 어찌 느끼셨습니까.”

“신마라 불리는 고수에 대해서 말인가.”

“예. 저는, 저는…….”

신창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틀이 지났음에도 그 압도적인 신위는 잊히질 않았다. 자신 역시 높이 바라보아야 하는 입신지경의 고수를 아이 다루듯 날려보내는 꼴이라니.

심지어 그 둘은 도주 가운데 소식이 두절 되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판별이 되지 않는 시국이었다.

“나도 두렵네. 그건 인세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야.”

“대체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

그의 물음에 당정학은 슬쩍 절의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지 못했는가. 주호 저 친구의 공격이 먹히는 것을.”

“실낱같은 상처였습니다.”

“검제와 매화검선은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했지.”

“…검신은 무언가 다르다는 겁니까?”

“나는 그렇게 믿네. 저 나이에 그런 경지에 이르렀어.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기연과 개인의 노력이 절묘하게 작용했다곤 하지만,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야.”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이다.

그 말에 신창원은 주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기이한 이끌림을 느꼈다.

검제와 매화검선조차 대항하지 못했던 존재를 상대로 찰나지만 대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아직 여물지 않을 따름이네. 그러니 무조건 그만은 살려야 해. 한 번 겪어보았으니 다음은 다를 것이야.”

근거 없는 믿음이었지만, 당정학은 그리 확신했다.

“그렇……!”

대답 도중 신창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저 멀리서부터 이쪽에 접근하고 있는 이들의 기척이 느껴진 것이었다.

“…내 시간을 벌어보겠네. 자네가 저들을 추슬러서 움직이게.”

“알겠습니다.”

곧 후지기수 일행은 신창원의 인도에 따라 절을 버리고 야밤의 산행길에 올랐다.

다행히 다들 경지에 오른 덕분에 길을 가는 데 별일이 없었고,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움직였던 당정학 역시 머지않아 그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도주하는 경로조차 혈천신교의 손바닥 안이었다.

쐐애액!

짙은 음영 가운데 암기가 쏟아진다. 제일 선두에서 그것을 쳐낸 신창원이 뭐라 하기도 전에 후기지수들은 저마다 닥쳐 드는 적들을 상대로 싸울 준비를 끝마쳤다.

적막했던 산세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하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치열한 싸움을 이어나간바. 어렵지 않게 매복자들을 정리했지만, 그들은 단지 발걸음을 묶기 위한 덫일 뿐이었다.

“여기 있었군. 쥐새끼 같은 놈들.”

궁기 천아성.

사흉수 중 한 명인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당정학이 입술을 씹었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간 입신지경의 고수들이 보이지 않던 것으로 보아 검제와 매화검선이 활약해주고 있는 듯싶었지만,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자신들의 꼬리를 붙잡고 말았다.

이대로 발목을 묶인다면 정말로 다 함께 죽는다. 그렇기에 당정학은 신창원에게 눈짓하며 뒤쪽에 있던 아들에게 외쳤다.

“계속 나아가라! 멈추지 마!”

파바바밧-!

독패 당정학이 펼친 만천화우가 어둠으로 뒤덮인 산세에 작렬한다. 그 맹렬한 기세는 궁기조차 한 수 접어주었을 정도로 거센 것이었다.

동시에 신창원이 혈천신교의 고수들을 도륙하며 궁기에게 달려들었다.

정면 싸움으로는 어차피 승산이 없다. 그러니 치고 빠지는 질척이는 수법으로 그들의 발목을 묶을 작정이었다.

“달려!”

그 모습을 본 당천유가 발작하듯 외치자 주호를 엎은 철대환을 중심으로 후기지수들이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돌파했다.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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