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이 후안무치한 놈들! 역시 함정이었구나!”
당정학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원의 고수들이 적의를 드러내자,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병장기를 뽑으며 그들과 대치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여전히 느긋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혼돈만이 작게 웃음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함정? 그딴 건 없다. 우리가 그 정도로 치졸하진 않거든. …대신, 딱 한 분을 모셨을 따름이다.”
“……!”
혼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호의 두 눈이 커지며 바로 옆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벽 너머, 무언가 있었다.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스물여섯 평생을 살아오며 축적되었던 본능과 경험이 맹렬하게 경고하며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후퇴를 종용합니다.]
[후퇴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가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상태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급함을 고하듯 정돈되지 않은 문장이 우수수 떠오른다. 주호는 황급히 등 뒤를 바라보았을 때,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느낀 남궁한과 선청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콰가각!
하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벽이, 아니 그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며 막대한 압력을 뿜어낸다. 주호는 신검을 뽑으며 일갈을 내질렀다.
“모두 피해!”
혼돈? 궁기?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뒤쪽에 있는 이들까지 전부 휩쓸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혼원일극신공이 극한으로 운용되었다. 수련의 성취로 어느 정도 단전에 그 기운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닥쳐오는 기파는 고작 그것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끄으윽!”
전신을 짓이기는 기파에 주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수만의 군세와 입신지경의 고수를 눈앞에 두고도 버거워했던 적이 없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촌각조차 버티지 못한 채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콰아아앙─!
주호가 막아내지 못한 기파가 폭풍처럼 사방을 휩쓴다. 연약한 객잔 따위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들은 자욱한 먼지와 함께 그 잔해에 깔려버렸다.
“다들 떨어지지 말거라!”
당정학이 후기지수들을 챙겼을 때, 남궁한과 선청우, 그리고 신창원은 쏟아져 내리는 잔해 너머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혈천신교의 고수들과 대치했다.
‘다행이라면 저들도 같이 휘말렸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휘몰아친 공격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객잔의 잔해에 매몰된 것은 혈천신교의 고수들 역시 마찬가지. 큰 허점을 보였으니 금세 닥쳐오리라 생각했으나, 그들은 혼돈을 중심으로 방진을 짠 채 요지부동이었다.
“자네, 괜찮은가.”
“…움직일 만합니다.”
주호는 남궁한의 도움으로 파묻혀 있던 잔해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을 일그러뜨리며 넘어온 기파에 정면으로 맞섰던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무복은 벌레가 파먹은 듯 너덜너덜했으며, 전신에 생겨난 크고 작은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그 위를 얼룩지게 만들고 있다.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낸 주호는 넝마가 된 무복의 옷가지를 풀어헤치며 신검을 쥐었다.
‘내상은 그리 심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늦게 물러났으면 뭉개지는 것은 객잔이 아니라 내가 되었겠지.’
쿠구구궁─.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무너져 내리는 잔해들 가운데 다시금 미증유의 기운이 존재감들 드러냈다.
주호를 돌보고 있던 남궁한과 선청우, 그리고 신창원이 곧바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이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슈우욱.
떨어져 내리던 모든 것이 다시금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들 역시 허공섭물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입신지경의 고수가 몇 명이나 있는 가운데 이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이건.”
신창원이 깊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거늘 이곳은 사지(死地)였는 듯싶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한 이는 한 명도 없다. 그렇기에 다시 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귓가를 스치는 발걸음 소리에 몸이 우뚝 굳어버리고 말았다.
“…….”
비단 신창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들조차 장내를 가득히 채우는 아득한 존재감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저것이.’
그 선두에 서 있던 주호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이 폐부를 조이는 듯했다.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하는 잔해 아래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오는 새하얀 백발, 솜씨 좋은 명장이 깎은 조각상 같은 아름다운 외모. 적해(赤海)가 보여주었던 기억과는 딴판인 모습이었지만, 주호는 본능적으로 그가 신마(神魔)임을 알 수 있었다.
“…….”
손끝이 절로 떨렸다.
머리카락과 눈썹, 그리고 피부뿐만이 아니라 그 눈동자 역시 새하얗기 그지없다. 시선을 마주했으나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너로구나.”
일말의 감정조차 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중원의 고수들과 대치하고 있던 혈천신교의 고수들이 모두 부복하며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드러냈다.
신마는 그런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천지 가운에 오직 주호를 바라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파아앗.
객잔의 잔해와 먼지들이 남김없이 하늘로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황량한 들판만이 펼쳐졌을 따름이었다.
쿠르릉.
저 멀리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한겨울 날씨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그것을 바라보는 남궁한의 얼굴엔 깊은 수심이 끼었다.
‘어찌 한 존재가 세상에 이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명백히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남궁한은 신마가 처음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어 단철량을 쓰러뜨렸을 당시 다른 지역에서 싸우고 있어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검선 정도 되는 고수가 그리 허무하게 패퇴한 것이 믿기지 않아 상대가 무언가 술수를 부렸으리라 생각했지만,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 기운에 벌써 전의가 꺾여버렸다.
“오너라.”
신마가 손을 들어 그 끝을 까딱였다.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완전한 신마의 재림을 기다리며 더욱 고개를 숙였고, 중원의 고수들은 그 알 수 없는 행동에 숨을 가쁘게 내쉬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을 따름이었다.
‘…윽!’
신마의 손끝을 주시하고 있던 주호는 돌연 적해의 기운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반절 남은 신마의 자아는 혼원일극신공에 잡아먹힌 것인지 아니면 일전 사신문에서 봉인당한 것인지 이때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격렬하게 반발하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미쳐 날뛰는바. 잘못하다간 몸이 폭사해 죽을 수도 있기에 그가 창백한 얼굴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자 옆에 있던 남궁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괜찮, 크윽.”
괜찮다며 대답하던 도중 주호는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히 저들은 여전히 부복한 채 일말의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은바. 남궁한은 황급히 그를 살피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열이 문제가 아니다. 기혈이 들끓고 있어.’
저 손끝이 이쪽으로 향해있는 것으로 보아 모종의 수작을 부린 듯했다. 그렇기에 남궁한이 자신의 내기로 그를 도우려 할 찰나, 신마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치적거린다.”
검지와 중지가 살짝 왼쪽으로 꺾인다. 단지 그것뿐인 행위였지만, 남궁한은 제 몸이 항거할 수 없는 거력에 떠밀려 원래 있던 자리에서부터 아득히 먼 곳까지 튕겨 날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선청우가 다급히 남궁한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그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유성이 되어버린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선청우의 기세가 날카롭게 피어올랐다.
“만리향─.”
매화 검법의 절초가 그의 검 끝을 타고 펼쳐진다. 선우연의 것과는 결이 다른 경지. 하지만 천지 가운데 농밀하게 울려 퍼지는 그 향조차 신마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슥.
활짝 펴진 검지와 중지가 가볍게 내리그어진다. 그 궤적 가운데 서 있던 선청우는 마치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을 받고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퍽!
만일 정신을 차린 주호가 그 몸을 들이박지 않았더라면, 화산은 장문인과 더불어 그 사제의 장례까지 치러야 했을 터.
서로 뒤엉켜 바닥을 구른 둘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목숨 빚지신 겁니다.”
“장문인 자리라도 필요한가?”
“…마음만 받겠습니다.”
상황이 이리 심각할진대 언사는 가볍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심각한 분위기라 더 툭툭 내뱉는 걸 수도 있었다.
“남궁 대협이 걱정이로군요.”
“쉬이 죽을 양반은 아니니 괜찮네. 그보다 몸은 어떤가.”
“아까보다는 나아진 것 같습니다.”
선청우와 함께 땅을 구른 탓일까.
밖으로 빠져나가려는듯 들끓던 적해의 기운이 이전과 같이 얌전히 단전 한구석에 자리했다.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 역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오직 신마만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
“안착하였다? 이 몸의 혼이?”
“네놈보다는 내가 나은가 보군.”
“어리석은.”
신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도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었다.
“…후.”
주호는 신검을 바로 세웠다.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작정인지 부복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반면 자신들 뒤쪽에 있는 후기지수 일행은 슬금슬금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저 멀리까지 물러난바. 신마는 하고자 한다면 그들 모두를 쳐 죽일 수 있었겠으나, 과연 절대자의 오만인지 충분한 거리를 벌릴 때까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웅웅.
다시 한 번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신검 위로 휘몰아쳤다.
자신은 무황이 아니었다. 그처럼 압도적인 신위로 신마를 찢어발길 수는 없겠으나, 싸우지도 않고서 패배를 인정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적해도 움직이지 않고 말이지.’
사실 가장 걱정했던 것은 단전에 있던 신마의 혼이었다.
만일 그것이 자신을 빠져나가 신마에게 되돌아간다면. 그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만이 아닐뿐더러, 자신 역시 혼원일극신공의 와해를 뜻했다.
“…가증스러운, 무황의 무공인가.”
신검 위로 넘실거리는 잿빛 기운을 본 신마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선명한 감정의 와류를 보였다.
짙은 불쾌감. 눈앞에 있는 존재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그 위로 깃들었을 때, 주호 역시 땅을 박차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일 초식 일섬(一閃)
무황이 상태창과 적해, 그리고 혼원일극신공을 비동에 남긴 것은 바로 이러한 때를 위한 것일 터.
완전하지 못한 신마.
완전한 혼원일극신공.
그 두 개의 격차라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하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리라.
번쩍-!
신마가 그랬던 것처럼, 신검 역시 세상을 반으로 베어 갈랐다.
하지만 신마는 갈라진 틈 위에 서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턱.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던 검이 도중 무언가에 걸린 듯 막히고 말았다.
“……!”
주호는 손끝을 떨며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분명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설사 혼돈이라 할지라도 정면에서 이것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내지 못할 터.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에 서로 간에 메우지 못할 간극이 있었을 따름이다.”
신마의 손에 날이 붙잡힌 신검은 더 이상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