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68화 (268/300)

#268화

“오라버니!”

“향아.”

남궁한과의 인사 직후 주호는 오랜만에 재회한 동생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품에 안았다.

주예향뿐만이 아니었다. 당천유는 당소혜의 전신을 살피며 어디 상처 난 곳이 없는가 찾아 헤맸고, 보다 못한 선우연에게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끝에 그녀를 놔주었다.

“별일 없었지?”

“당가주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분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지요.”

남궁휘의 말에 남궁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운데 슬쩍 주호의 옆으로 다가온 팽우혁은 헛기침을 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입을 열었다.

“운남에서의 활약은 전해 들었습니다. 십패천 중의 둘을 쓰러뜨리고 홀로 혈천신교의 군세를 막으셨다면서요.”

“여기까지 전해졌는가.”

“전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검신(劍神) 주호라 함은 이제 중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억눌렀지만, 한껏 격양된 기색이 가득했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 참은 것인지.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시시콜콜한 일이다. 어쨌든, 너도 향이를 지켜주어서 고맙다.”

“큼. 제가 조금 노력했지요.”

팽우혁은 주호가 떠난 직후부터 주예향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지켰다.

비단 닥쳐드는 혈천신교의 마두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모에 혹한 정파의 고수들까지 추파를 던져오기 일쑤였다.

전쟁 중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짧게 불타는 사랑이 성행했고, 그 가운데 임신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팽우혁은 팽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때로는 독패의 이름을 빌리며 그 승냥이 같은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그 성과가 있던 것인지 요즘 주예향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팽우혁은 애써 모른척하며 자신의 책무를 다했을 뿐이었다.

“팽가주께도 감사를 전해야겠구나. 그분께서는 무탈하시느냐.”

“예. 지금은 호북에 계십니다. 회담을 위해 섬서로 올라오고 있으시지요.”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신교와의 회담 장소는 섬서와 사천 중간에 있는 중립 지대로 정한 지역이었다.

서로 소수의 인수만 대동한 채 나서기로 약조되어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주력 고수들이 모두 섬서의 경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대협.”

그러던 차, 함께 귀주에서 사천으로 올라온 무림맹 청룡단주 초위현이 어두운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죄송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시다.”

맹주에 관한 사안이리라.

그렇기에 주호는 일행에게 눈짓한 것으로 초위현을 따라나섰고, 연합군의 진지를 벗어나 상당히 외진 구역까지 동행했다.

“맹주께서는 어떠십니까.”

“…직접 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주호는 이곳으로 오자마자 남궁한과 단철량을 찾았다.

하지만 남궁한과 달리 단철량은 어느 병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바. 그렇기에 초위현에게 만남을 부탁한 것이었다.

“맹의 안가입니다. 안쪽엔 진법이 펼쳐져 있으니 제 뒤를 따라오시지요.”

“알겠습니다.”

무림맹의 안가.

흔히 널린 것은 아닌지 절진이라 부를 수 있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기관 진식 역시 설치되어 있어 멋모르고 들어왔다간 벌집이 되어버릴 터.

주호는 잠자코 초위현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별천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밖은 눈 덮인 한겨울이었지만, 안가의 내부는 한창때의 봄처럼 따스하기 그지없다.

땅은 부드러웠으며 새싹까지 자라 있을 정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철량의 안위였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가의 경호는 삼엄했다.

몇 명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으며, 안에서 시중을 드는 이 하나하나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이 안에 계십니다.”

초위현이 방문을 열자 그윽한 약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주호는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파리한 안색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단철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절로 이가 악물어진다. 손끝은 잘게 떨렸고, 눈가로 눈물이 차올랐다.

단철량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의 반절은 왼쪽 눈과 함께 짓눌렸고, 쓸려나간 피부 위로 날것의 살갗이 드러나 있다.

검선이라는 별호를 자랑했을 정도로 유려함을 자랑했던 것도 옛말인 듯 굳건했던 두 팔 역시 팔꿈치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다리는 무사하긴 했지만,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끝으로 튀어나온 발끝이 바싹 메말라 있는 것을 보니 그마저도 온전한 상태는 아닌 듯해 보였다.

“…이건.”

가까스로 입을 연 주호는 목이 막혀왔다.

그럼에도 초위현을 바라보자, 그 역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떨구며 입을 열었다.

“목숨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협께서 오면 깨워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지요.”

“…….”

주호는 천천히 병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초췌해진 단철량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이 노인은 아버지이자 스승과도 같았다.

하잘것없던 무림맹 말단 무사일 적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고, 무황의 무공을 계승한 이후에도 그 중심을 굳건히 붙들어 주었다.

“…어째서 이리 볼품없이 누워 계시는 겁니까.”

사천은 맡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그의 부탁을 이루어냈다.

비록 지금은 패퇴하긴 했으나, 한계까지 운남 전선을 지켜냈고 매화검존의 복수까지 이루었다.

하지만 정작 그 본인은 이리 병상에 누워 있으니, 가슴 한편이 너무나도 아려올 뿐이었다.

“…깨우겠습니다.”

“…….”

주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초위현의 손이 단철량의 백회를 스쳤다.

이윽고 검선이라 불리며 무림맹주로서 중원을 호령했던 거인은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주, 호. 자네, 왔, 는가.”

“예. 제가 왔습니다.”

하나 남은 오른쪽 안구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실명해버린 것이었다.

주호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손마저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찌, 어찌 이렇게 누워 계시는 겁니까. 사천은 맡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안, 하네. 이 늙은이가 그릇된 판단을 하였어.”

주호는 붕대로 둘둘 감싸인 그의 팔 끝을 조심스럽게 잡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남아 있었더라면 단철량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지 않았을까.

괜한 공명심에 운남으로 향해 이 사단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이미 지나간, 결정에, 얽매이지, 말게.”

단철량은 그런 그의 후회를 짐작한 것인지 짧은 말들을 내뱉었다.

주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을 거두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신마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주호가 보기에 단철량은 이미 삶의 한계를 넘어섰다.

당장 보이는 상태창 역시 회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은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일 터.

“…….”

그와 동시에 단철량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라 있지만, 아직 그 두려움은 이겨내지 못한 듯 떨리는 팔의 진동이 주호의 손을 타고 느껴졌다.

“신마는, 불가해의 존재네. 절대, 싸워선 안 돼. 어떻게 해서든, 중원 땅의 일부를, 내어주어서든, 싸움을 피해야, 해.”

“불가해의 존재라니.”

“그는,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야. 인세의 규격을, 벗어난 재앙일세.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 어.”

단철량의 눈꺼풀이 경련한다.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끝에 도달했는지 점차 그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절, 대. 싸우면 안 되네.”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맹주님!”

옆에서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초위현이 황급히 달려들었다.

밖에 있던 고수들 역시 뛰어들어와 상태를 살폈고, 이내 기력이 다해 다시 의식을 잃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보셨다시피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외부에는…….”

“발설하지 않겠소.”

“맹 측에서는 은거하면서 회복 중이시다고 소문을 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시기에 맹주님의 상태가 퍼진다면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검선 단철량은 오랫동안 무림맹주에 있으며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신마에게 패퇴해 임종 직전까지 이르렀다면 충격받을 이가 한둘이 아닐 터.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식을 숨기는 것이 나을 터.

“…….”

무림맹 안가에서 다시 연합군 진지로 돌아온 주호는 자신의 막사에 홀로 틀어박혀 메마른 세수를 반복했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단 노인이 그렇게 되니 마음이 다잡히지 않고 계속 흐트러졌다.

검신(劍神)이란 위명이 연합군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이 맞았지만, 그도 결국엔 한 명의 인간. 연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 울어?”

“…아니다.”

주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그 막사를 찾아온 천우희가 살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초위현을 따라 무림맹 안가로 가는 것까지 보았거늘, 설마 막사 안에서 홀로 흐느끼고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안 좋으셔?”

“…….”

살며시 바로 옆으로 몸을 붙이며 앉아오는 천우희의 말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위로해주듯 그녀의 머리를 품에 안았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생사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아, 그것도 아닌가? 내 목숨은 당신이 살려냈으니.”

그 온기 덕분일까 호흡의 떨림이 잦아든다. 천우희는 연신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위로해주다가, 안정되었음을 느꼈을 때 주호의 등짝을 강하게 후려쳤다.

짝!

“…윽.”

아무리 입신지경이라 할지라도 그리 얻어맞는다면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주호가 고개를 들며 인상을 쓰자, 천우희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눈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당신만 보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얼른 기운 차려. 그리고 조금 있으면 혈천신교와 회담에 참여할 인원을 선별한다고 하더라. 검제께서 당신에게도 참여해달라고 부탁했어. 아, 지금쯤 시작했겠다.”

“…알겠다.”

주호는 다시 마른세수를 하는 것으로 슬픔을 털어냈다.

이 전쟁 가운데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이 어디 자신 혼자이겠는가.

그렇다고 슬픈 것을 참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맙다.”

막사를 떠나기 전, 주호는 천우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전과 같이 힘 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

옅은 미소로 그것을 맞아준 천우희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뒤를 바라보다가, 이내 침상에 주저앉으며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가 자신의 품에 안겨 나약한 부분을 드러내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미를 잃은 어린 양처럼 어깨를 떠는 것이 어찌나 이리 사랑스러울까.

‘…우는 것도 괜찮을지도.’

조금 이상한 취향에 눈을 떠버린 천우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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