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67화 (267/300)

#267화

황실이 중재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강호 전역을 강타했다.

새롭게 구축된 귀주 전선 역시 밤낮 가리지 않고 그 화제로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더러는 최소 그 기간에는 싸움이 없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황실이라. 이거 또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군.”

선우연은 침상에 기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후기지수들은 전부 그가 요양 중인 막사에 모여 둘러앉아 있는 상태. 어차피 중요한 수술도 끝났으니 더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취지였다.

“나는 일단 가야 하네. 아버지는 둘째 치고 소혜가 걱정이 되거든.”

“얼마 전에 연락이 왔지 않는가. 둘 다 무사하다고.”

“맞아요. 당 가주께서 최우선으로 챙겨주셨다고요. 참으로 감사하죠.”

철대환이 못 말린다는 시선으로 고개를 젓자, 남궁연은 주예향이 마치 정말로 자신의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동행할 생각인데, 자네는?”

“아마 함께할 듯싶군.”

악비산의 시선에 사신문의 임무로 인해 오랜만에 합류한 천후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황실 주체로 회담이 열린다는 것은 마교도 참가한다는 것이겠지?”

“…천강, 그 자식도 오겠군.”

천마가 은거한 이상 소교주인 그는 천마신교를 이끌어갈 차기 교주로서 대표석에 오를 터.

근 몇 달 만에 다시 보게 될 친우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제는 자네로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당천유의 시선에 선우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운남 전선에서 싸우던 이들은 이제 귀주 전선에 합류하여 새로운 군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화산은 너무나도 큰 피해를 본바. 아직 전쟁 중이지만, 장문인을 비롯한 문도들의 희생을 기리고 다시 원래 있어야할 자리를 찾기 위해 섬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팔이 세 개가 되기 직전이었거늘,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군.”

“잘 치료되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사실 좀이 쑤셔 죽겠네. 신경의 치료도 대강 끝났고, 의선께서도 이제 며칠만 더 경과를 보면 움직여도 된다고 하셨네.”

“말은 정확히 하세.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재활이라고 하셨네. 정녕 외팔이 검사로 살아가고 싶은가?”

“매화 검법을 펼치는 독수 검객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화산에 새로운 전설이 쓰여지겠어. 그간의 정을 보아 그 옆에 자네 이름도 겸사겸사 넣어주겠네.”

“…정말 빌어먹게 고맙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것을 보니 이미 그 의지가 확고한 것일 터. 당천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출발은 이틀 뒤에요. 화산파뿐만 아니라 함께 가고자 희망하는 이들이 몇 있어서 호북을 경유해 돌아갈 거라고 하네요.”

“이틀이라, 충분하군요.”

남궁연의 말에 선우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왼팔을 바라보았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장기를 심하게 다쳐 사경을 헤매는 중상자가 수백이다. 살 거죽이 조금 갈라졌다고 해서 언제까지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이미 옛적에 각오한 바였다.

후기지수들이 앞으로의 일로 회동하고 있을 무렵, 주호는 귀주 전선을 이끄는 천공검 신창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단둘이 대화하는 자리는 이것이 처음이군요.”

“그렇습니다.”

신창원은 개인적으로 주호에게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이전부터 검절이란 별호로 명성을 떨친 신진 고수. 전쟁 이후로는 굵직한 전공을 세우며 중원을 대표하는 절대 강자로 떠오르는 위치까지 도달하지 않았는가.

“일단 감사를 드립니다. 검절께서 나서주지 않으셨다면 귀주 전선이 이토록 자리 잡지 못했을 테니까요.”

신창원은 진심을 담아 짧게 고개를 숙였다.

사천에서 운남으로 내려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거기에 십패천의 마두 둘을 쓰러뜨렸고, 심지어 홀로 혈천신교의 군세가 전선에 들이닥치지 못하도록 얼마간 붙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뛰어넘었다. 만일 이 전쟁이 중원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그 찬란한 영광 가운데 검신이 있으리라.

“…아닙니다. 발 빠르게 귀주 전선을 펼친 신 대협의 공적 또한 크지요.”

신창원이 주호에게 관심이 있던 것처럼, 그 역시 신창원에게 제법 관심이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 무위는 초절정 완숙에 들었다. 전쟁 이전 천공검이라는 별호와 신창원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자라는 것이었다.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주호의 의중을 눈치챈 듯 신창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천무문이란 문파에 속해 있습니다. 말이 문파지 일인 전승으로 내려오는 곳이지요. 본래는 스승님의 유지를 받아 강호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지만, 화마가 턱밑까지 닥쳐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대단하신 겁니다. 그 짧은 틈에 사람들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어 내다니.”

이름을 떨칠 인지도가 있는 것도, 든든한 뒷배가 있던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만 같은 이 남자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 이 전선을 구축해냈다. 그 하나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할 업적이었다.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고자 만남을 청한 건 아니지만, 어째 화제가 이렇게 되었군요.”

신창원은 이 분위기가 사뭇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주호 역시 마주어 미소를 지어줄 찰나, 그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번 회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홀로 지내면서도 강호의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찜찜해서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한참 늦은 시기에 황실이 개입한 것도 그렇고, 굳이 사천을 회담의 장으로 삼은 것도 그렇지요.”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미심쩍은 요소가 많았다. 설마 황실의 직인이 찍힌 직인을 위조할 생각을 하진 않을 테니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황실의 존재는 사실일 터.

문제는 그 방향성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었다.

“중재라고 해도 그리 큰 개입은 하지 않겠지요. 이때까지도 그랬으니.”

황실이 원하는 바는 각 세력이 합쳐지지 않고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민초를 건드리거나 세금 같은 공납품에 개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관무 불가침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만큼 무림에서도 그런 짓은 엄한 금기에 해당했다.

설사 마도라 할지라도 그러지 않을진대, 패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혈천신교가 황실의 심기를 거스를까.

“…어쩌면 막대한 뇌물로 회유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뇌물? 황실을 어떻게 회유한단 말입니까.”

신창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의 재산은 헤아릴 수 없다. 원하는 것이 모두 그의 것인데 어떻게 회유를 한단 말인가.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아니오. 황제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자들을 회유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

자신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런 방법부터 생각했으리라. 곧 그 발언의 의도를 깨달은 신창원 역시 표정을 굳혔다.

“최악의 상황에는…….”

“우리가 이곳을 비운 틈을 타 진군해오거나.”

혹은 회담의 장 자체가 함정이거나.

본래라면 이런 회담 같은 것은 중립 지역에서 진행하지 않나. 굳이 자신들이 점령한 사천에서 여는 것도 미심쩍은 일이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로군요.”

“내 쪽은 훨씬 이전부터 저들을 상대로 싸워왔다오.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추악한 짓거리를 했는지 많이 알고 있소.”

보통 사람이라면 황실이 개입했으니 회담 간에 그런 추잡한 음모를 꾸미리라 생각하지 못할 터.

하지만 그간 주호가 보아온 것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만도 하고 남는 놈들이었다.

“그래도 주 대협께서는 참석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해야지요. 끝을 보려면.”

주호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셈이었다.

이 전쟁을 끝내려면 혈천신교의 수뇌인 사흉수를 처단해야 하는바. 그렇기에 운남에서도 궁기와 결전을 벌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입으로만 떠들었지 막상 제대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다.

‘아마 이것 때문이겠지.’

적해(赤海).

자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신마의 영혼 반절을 보존하려는 것일 터.

그렇기에 주호는 그들로 하여금 직접 나올 수밖에 없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가지고 직접 회담의 자리로 나설 생각이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이곳에도 잘 일러둬야 하겠소.”

신창원 역시 마음을 다잡은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왔다.

***

여드레가 지났다.

이제 회담까지는 이틀가량이 남은바. 주호를 비롯한 적지 않은 수의 무인들은 귀주 전선을 떠나 호남과 호북을 거쳐 섬서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와중 혈천신교가 습격해오지 않을까, 다들 노심초사한바. 하지만 다행히도 회담을 앞두고 그럴 생각은 없는지 녀석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산파 무인들은 몇 달간의 타지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들어서자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시신을 포함해 전사자들의 운구를 맡은 이를 제외하고는 곧바로 서남부 쪽에 자리한 섬서 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

물론 선우연 역시 마찬가지인바. 이곳마저 뚫린다면 중원 무림의 심장인 하남까지는 한 걸음이었기에 사뭇 비장한 기색마저 그 얼굴에 깃들었다.

“…다들 결사의 각오를 한 표정이로군.”

선우연뿐이 아니었다.

섬서 전선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친 연합군의 무인들 모두 어딘가 결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윽고 지휘 막사에 도달했을 찰나, 남궁한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아주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큰 고생을 했다면서. 무사히 돌아와 주어 고맙네.”

남궁한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입신지경의 고수가 이리 피폐해질 정도라면 그간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주호는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버님…….”

“…연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로구나.”

남궁한은 깊이 숨을 내쉬며 딸을 품에 안았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지만, 서로 사지를 다녀온바. 그리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알겠습니다.”

이번엔 후기지수들 일행 역시 주호를 따라 함께 남궁한의 막사로 들어갔다.

인수대로 차를 따라준 남궁한은 제 딸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차세대 강호를 이끌어갈 잠룡들이 한자리에 모였군.”

“…잠룡이라니. 부끄럽습니다.”

“하하.”

무려 검제에게 직접 칭찬을 듣자 후기지수들은 쑥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빈말이 아니다. 당장 곳곳에서 자네들을 부르는 별호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남궁한은 새삼스럽다는 시선으로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젠 후기지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최소가 초절정 초입, 자신의 딸을 비롯해 뛰어난 자는 그 완숙에 이르지 않았나.

강호 어딜 가도 이 젊은 나이에 이러한 성취를 이룬 자는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보다 낫군.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남궁한이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주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곧 그 화제가 회담에 이르자, 남궁한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연합은 휴전을 받아들일 걸세.”

“역시 그렇습니까.”

“예상했는가?”

“한계라곤 생각하고 있었지요.”

“저들도 점령한 땅 전부를 욕심내진 않을 것이야. 청해와 운남, 그리고 사천 서부 일대를 넘겨주고 화평을 맺자고 위에서 결론을 내렸네.”

주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세에서 뭐라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결정이 나온 것부터 그들이 얼마나 자존심을 죽이고 현실을 직시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숱한 침입과 전쟁을 치렀을 때도 이런 식으로 땅을 내어준 적이 없거늘.

“…화평, 입니까.”

선우연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씹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이 땅에 몰아낼 때까지 결사 항전을 부르짖고 싶었다.

아직 스승의 복수도 하지 못했으며, 저 머나먼 타지에서 쓰러진 문도들의 원한을 풀지 못했다.

남궁한 역시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미소를 지었으나, 깊게 팬 주름이 현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중원은 패배했네. 이제는 다들 싸울 여력이 없어. 여기서 더 전쟁이 지속되었다간 얼마가 지나도 회복하지 못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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