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65화 (265/300)

#265화

이틀이 더 지났다.

선우연은 수북이 쌓인 눈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도망치던 와중 얼마나 많이 싸운 것일까. 우습게도 그간 막혀 있던 경지는 사선을 넘나드는 싸움에 자연스럽게 허물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초절정의 경지. 하지만 그것으로도 쉴 새 없이 닥쳐드는 적들을 모두 감당해내기에는 부족할 따름이었다.

“윽.”

선우연은 눈을 뭉쳐 눈 위에 입은 상처를 문지르며 새하얀 김을 뱉어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이라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리에 머무르자면 귀신같이 뒤를 쫓아온 적들이 공격해오는바. 두 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새하얀 눈 위로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나갔다.

부스럭.

귓가를 스치는 소음에 선우연은 호흡을 죽인 채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할지라도 이토록 피폐해지면 건강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의 이마는 달군 불덩이라도 들어있는 듯 열이 오른 상태였다.

다시금 눈을 뭉쳐 그 위에 치덕거리는 것으로 체온을 낮춘 선우연은 가늘어진 눈으로 저 앞을 바라보았다.

‘다섯, 아니 여섯인가.’

허기졌고, 어지러웠으며, 피곤했고, 울렁거리지만, 그 모든 욕구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깨달음.

벽을 허물고 넘어서 새로운 경지로 들어갔다. 본래라면 긴 시간과 수련을 들여 그것을 하나하나 정립하고 사고(思考)하는 과정을 지났어야 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검날 가운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찰나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을 가슴 한구석에 집어넣고 필사적으로 그 느낌을 잊지 않으려 되뇌었다.

쐐애애액!

침묵의 대치 가운데 찰나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우연은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에 자신의 존재가 들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츠즈즈즈.

얼어붙은 겨울 위로 찬란하게 피어나는 매화꽃이 만개한다. 그 잎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날카로움을 가진 칼날이 되었고, 아름다움에 홀려 지척까지 다가온 이들의 몸을 헤집는 흉기로 변했다.

캉!

“……!”

거의 동시에 다섯을 쓰러뜨린 직후 마지막 남은 이에게 닥쳐갔을 찰나, 선우연은 생각지도 못한 반동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화산의 소신룡인가.”

다른 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마두였다.

파각.

얼마 전 마인에게서 빼앗아 사용하던 검이 신음을 토해내며 한계에 다다랐음을 토해냈다.

서로 같은 초절정의 경지. 하지만 자신 쪽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얼굴도 제법 반반하고, 가지고 놀기엔 좋겠군.”

마인은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사뭇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연은 그 징그러운 모습에 몸서리를 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남색가한테 내 순정을 빼앗길 듯싶더냐!”

아끼고 있던 공력이 휘몰아치며 검 위로 피어오른다. 불규칙적으로 흩날리던 검기가 완전한 형상을 이뤘고, 검강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발악인가. 그런 것도 나쁘지 않지.”

가벼운 언행과 달리 그 힘은 진짜였다.

순식간에 발현된 한 쌍의 검강이 서로의 검을 잡아먹을 듯 격렬하게 부딪치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우연이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기에 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파아앗-!

매화만리향의 초식이 해일처럼 주위를 휩쓴다. 마두는 그가 동귀어진의 수법을 쓰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짙은 미소와 함께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 몸으로 어디까지 발버둥칠 수 있……!”

사아악-!

하지만 맞닿는 검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예상과는 다르다. 마두는 황급히 공력을 끌어올렸지만, 선우연의 검이 기다란 궤적을 남기며 그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툭.

검 끝이 깨끗한 눈 위에 닿는다. 날을 타고 흘러내린 짙은 핏방울이 천천히 그 순백의 색을 물들여갈 때, 반으로 갈라진 마두의 몸이 양옆으로 쓰러져 내렸다.

“…우웩.”

선우연은 그 한순간을 위해 진원진기까지 끌어다 사용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감수하고 저지른 짓이라곤 하지만, 바닥을 적시는 토혈의 양을 보니 가슴이 막막해졌다.

‘당장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공을 운용할라치면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닥쳐왔다.

큰 내상은 아니었으나, 이대로 계속 싸워나갔다가 심해지기라도 한다면 그것대로 답이 없는 일이었다.

선우연은 환몽에서 보았던 대로 어딘가 몸을 숨길 구석이 없을까 싶어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이 좋게도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 발자국을 가려주었고, 이내 사냥꾼이 만들어 놓은 듯한 함정 하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조금 좁지만 괜찮은가.’

방치된 지 꽤 지난 듯 얼어붙은 동물의 사체와 삭아버린 함정이 선객으로 자리하고 있다.

선우연은 함정의 한쪽을 제거하고 조금 더 깊게 땅을 파고들며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휴식을 취했다.

두껍게 쌓인 눈조차 그의 흔적을 지워주지 못했던 것인지 몇 번인가 근처를 서성이는 인기척이 있었다.

심지어 눈으로 뒤덮인 함정을 들여다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얼어붙은 동물의 사체를 보곤 평범한 함정이라 판단한 듯 날붙이로 몇 번 찔러보더니 금세 떠나버렸다.

선우연은 그 사이 힘을 회복하려 했다.

금창약으로 상처를 돌보고 혹시 몰라 챙겨놓았던 단환으로 손상된 내기를 회복했다.

‘내상은 대부분 치유했지만, 소모된 진원진기가 문제로군. 영약이라도 구해달라고 해야겠어.’

문제가 된 것은 역시 억지로 끌어다 쓴 진원진기였다.

운기로도 채워 넣을 수 없는 부분이니 추후에 다른 방법을 이용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반나절 동안의 휴식으로 얼추 몸을 회복한 선우연은 입구가 얼어붙은 함정을 깨부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밖은 새카만 어둠이 다가와 있던바. 아쉽게도 청명한 만월이 하늘을 밝히고 있어 짙은 음영을 기대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툭.

선우연은 한결 가벼워진 움직임으로 나무 높이 달린 가지들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별자리와 달의 위치를 가늠해 대략 방향만 유추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사히 빠져나갔으면 좋겠는데.’

특히 당천유 그놈이 문제였다.

암기와 독은 사람을 살상하는데 있어 특별한 위력을 지녔지만,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주위에 널린 것이 암기로 쓸 재료라고 반박할 수 있는바. 하지만 비슷한, 혹은 더 상위 경지의 고수를 상대하는 데 돌멩이나 나뭇가지로만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마주치는 녀석을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선우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 있는 한 기척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싸워? 아니면 이대로.’

당장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소란이 몰리면 또다시 피 튀기는 추격전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신나게 뛰어가던 것을 멈추고 기척을 은밀하게 했을 찰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묵직한 기운에 그는 헛바람을 토해냈다.

쿵-!

고요했던 숲 사이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선우연은 떨어져 내린 검보다 괴한의 몸 끄트머리에서 나풀거리는 새하얀 붕대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백내이.”

이전의 마두와는 달리 정말로 버거운 검강급 고수였다.

선우연은 찰나 동안 고민했다.

이번에도 또 진원진기로 허점을 노려?

하지만 그러다가 상태가 나빠지면 정말로 운신할 수 없을 정도가 될지 모른다. 그 수법이 통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콰직.

딛고 서 있던 나뭇가지가 무참히 부러지며 둘은 몸이 얽힌 채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찰거머리 같은 자식!”

몸이 금강불괴처럼 단단한 백내이라면 모를까, 선우연은 그대로 추락한다면 크게 다칠 터.

그렇기에 거칠게 그 가슴팍을 걷어차는 것으로 거리를 벌린 후 지상에 착지했다.

그 뒤로부터는 피 튀기는 혈전의 시작이었다.

선우연은 가능하다면 맞붙는 것을 피한 채 도주하고 싶었으나, 그 의도를 알아챈 듯 백내이가 사생결단할 기세로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농밀한 검강과 검강이 거칠게 부딪치며 무수한 편린을 흩뿌렸다.

한치의 밀림도 양보도 없는 경합. 짐짓 자웅을 겨루는 것 같았지만, 일검일검 부딪칠 때마다 선우연의 표정이 점점 경직되었다.

‘내가 밀린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응당 있어야 할 호흡의 조절이 없다. 내력이 끊임없이 검 위로 흘러나와 검강을 유지하며 그대로 사흘 밤낮을 더 싸울 수 있는 기세였다.

선우연은 이를 악물고 맞서 싸웠지만, 그보다 먼저 한계를 맞이한 것은 수십 번의 충돌을 반복한 검이었다.

파각!

검의 반절이 깨어져 나가며 철 쪼가리가 흩뿌려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선우연은 가슴을 베어오는 기습에 한순간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에라이, 씨팔!”

뒤가 없어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동귀어진의 수를 펼쳤다.

왼팔은 버릴 각오로 찔러 들어온 손을 향해 쭉 뻗었고, 진원진기와 함께 남은 내기를 모조리 끌어모아 부러진 검 위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웅웅웅-!

살이 찢기고 뼈가 토막 나는 더러운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검을 힘껏 찔렀다.

백내이의 몸은 과연 철괴와 같았다. 그렇기에 선우연은 급소 중 가장 얇고 치명적인 부분인 목을 공략했고, 선명한 빛을 내며 이글거리는 검강이 게걸스럽게 그 목을 물어뜯었다.

뚜둑, 두두둑.

백내이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선우연의 왼팔을 넘어 그 몸을 통째로 베어낼 심산인 듯 검을 옆으로 돌렸지만, 그는 오히려 팔을 뻗어 갈라진 손으로 검을 움켜쥐는 것으로 한순간의 틈을 벌었다.

콰득.

결국, 먼저 한계를 맞이한 것은 백내이 쪽이었다.

머리를 잃은 시체는 검은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고, 선우연은 걸레짝이 된 왼팔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치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끄윽, 더럽게 아프네.”

검지와 중지 사이로 검이 파고든 탓에 왼팔이 세로로 길게 잘려나갔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다행이었으나, 출혈량이 너무 많아 그리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아.”

선우연은 지혈하는 것도 포기한 채 그대로 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몇몇인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른 깊은 어둠 가운데 숲을 배회하는 이들의 정체는 뻔할 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여자 만날 걸.”

가족, 동생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남궁연의 그 아름다운 외모였다.

차라리 그녀를 잊고 다른 여자를 만났더라면 후회라도 하지 않았을 것을.

‘…솔직히 외모만 따지자면 내가 더 낫지 않나?’

죽음을 목전에 둔 가운데 선우연은 누군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느꼈다.

곧 생사를 확인하듯 발끝으로 팔을 툭툭 쳐 왔지만, 모든 것이 귀찮아진 그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말했다.

“어차피 곧 죽으니까 그냥 가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검을 쥔 오른손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반 토막 난 그 검의 끝을 심장에 박아줄 심산이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살아는 있는 듯하구나.”

“……!”

익숙한 그 목소리에 선우연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시야가 울렁거렸지만, 달빛에 비치는 그 훤칠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너무 늦으신 것 아닙니까.”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반가움에 실실 웃던 선우연은 직전에 떠오른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얼굴은 내가 더 낫네.’

그래도 그녀가 어째서 반했는지는, 이제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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