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그게 무슨 말이오! 싸우기도 전에 후퇴하자니!”
“별수가 없지 않습니까! 두 배가 넘는 숫잡니다! 두 배가!”
남궁연과 천우희가 막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휘소는 척후병이 보내온 정보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운남 전선에 존재하는 병력은 이만에 가까운 숫자. 하지만 원래 대치하고 있던 혈천신교의 군세와 더불어 새로이 나타난 적들은 그 두 배인 사만을 가볍게 넘는 규모였다.
옛적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운남 전선의 무인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자 했다.
하지만 새로이 합류한 연합군의 고수들은 압도적인 전력 차에 개죽음을 당하느니 물러나 새로운 전열을 다지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는!”
쿵.
화산의 고수 한 명이 핏발 선 눈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장문인을 비롯해 문도 수백이 이 차가운 땅에 몸을 뉘었소.”
피를 토해내는 듯한 그 절규에 좌중이 침묵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소. 대의, 오직 그것 하나만으로 목숨을 불태우며 전선을 지켰소이다. 설사 연합군의 지원이 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물러나지 않았겠지.”
지금은 어떤가.
전황을 보자면 작금의 위기보다 더 위험했던 적도 많았다. 수많은 패주를 이어왔지만, 단 한 번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 땅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한 번의 전투밖에 겪어보지 못한 놈들이 눈앞에 들이닥친 숫자에 겁먹어 도주를 운운하는 꼴이라니.
“산아, 진정하거라.”
매화검성 선청우는 조용히 그를 달랬다.
화산의 고수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지만, 사문의 큰 어르신이 자신을 직접 말려온 체면을 생각해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수많은 이가 운남 전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소이다.”
선청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새로이 합류한 연합군의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본디 이쪽으로 지원 온 이들은 아직 변변찮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예비대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 그들을 불러와야 했을 정도로 이쪽 전선의 상황은 심각했던바. 마음 같아선 그들이 도망친다고 하여도 남은 이들끼리 전선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전쟁은 의지만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선청우는 깊게 깨닫고 있었다.
“사천 전선이 유지 중이라면 후퇴는 악수요. 하지만 위쪽이 무너진 이상 이곳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악수가 되었지.”
“…그런.”
“후퇴하도록 하세. 이미 저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니 부상자 먼저 후방으로 보내고 본대가 출발하는 것이 좋겠군.”
장내에 침묵이 감돈다. 선청우는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으로 좌중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시간은 그리 많이 줄 수 없소. 지금부터 일각 후. 자원은 모두 버리겠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알겠습니다.”
후퇴 결정이 났으니 저마다 병영의 각지로 흩어지며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지휘소는 순식간에 휑하니 비웠고, 자료 폐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 가운데 선청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후.”
후퇴 결정을 내렸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연합군 중 지원자를 받아 닥쳐드는 군세의 발목을 붙드는 후발대를 다시 편성해야 하는바. 그들은 십중팔구 전부 죽게 될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주호의 도움으로 한 차례 죽음을 유예받았지만, 결사의 각오는 저버리지 않았다.
화산에는 선우연을 비롯해 장래가 유망한 후기지수들이 많았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늙은 몸뚱이를 저 위에 내던질 수 있었다.
“…저희가 조금 늦었군요.”
“천 소저.”
곧 지휘소 막사의 휘장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의 모습에 선청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호 그 친구는 어디에 있소?”
슬쩍 뒤를 바라보았지만, 따라오는 이는 없다. 그 물음에 천우희는 저 멀리 지평선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천 쪽에서 오는 군세의 발목을 붙들러 갔습니다. 최대한 빨리 후퇴할 것을 종용해달라고 부탁받았는데 다행히 잘 상의 되었나 보군요.”
“그런.”
선청우는 이를 악물었다.
저번 역시 그가 앞서 진군해오는 혈천신교의 군세를 막아 세운 것은 이미 전해 들었다.
하지만 이번은 궤가 다른바. 자신들의 후퇴를 위해 시간을 끈다면 정말로 고립될 수도 있었다.
“…걱정되지 않소?”
선청우는 천우희의 그런 태연한 기색이 의아했다.
그만큼 그를 믿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걱정되지요. 미치도록. 솔직히 말하자면 같이 도망치자고 하고 싶어요. 혼자만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천우희는 옅은 미소와 함께 선명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니까.”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미련할 정도로 대의를 쫓는, 비록 그것이 헛된 것임을 이미 옛적에 알아차렸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그것이 주호라는 남자였다.
“후발대, 편성하실 거죠? 제 휘하 사신문 고수 오백 전원 그쪽에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묵묵히 그의 뒤를 받쳐줄 뿐이었다.
***
선도경은 이제 약관을 눈앞에 둔 화산의 후기지수였다.
본래라면 내년으로 스물이 되어 정천 학관의 입관 시험을 치르고 강호의 무대에 오르는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던바. 하지만 중원을 지키겠다는 대의 하나만으로 같은 화산의 문도들과 같이 이곳 운남으로 건너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싸워나갔다.
그 사이 스승이 죽고, 사형들이 죽고, 사제들이 죽어나갔다.
아직 어린 그였기에 마음이 꺾일 법도 했지만, 먼저 간 이들의 유지를 가슴에 담고 힘이 풀리는 무릎을 굳건히 세웠다.
그렇기에 장문인이 죽고 전선이 뚫렸음에도 도망치지 않았고,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스스로, 다른 이들과 함께 끝없이 되뇌며 최면을 걸었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던가.
“…끄윽.”
메마른 줄 알았던 눈가로 눈물이 차오른다. 선도경은 후퇴를 위해 최소한의 짐만 꾸리는 상황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굵은 눈물을 본 다른 이들 역시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붉어진 눈시울, 억눌러진 흐느낌, 저마다의 분함과 슬픔을 담은 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턱.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자 선도경은 등 뒤로 몸을 돌렸다.
“…대사형.”
“눈물을 거둬라. 우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후퇴가 결정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이미 선청우가 통보한 일각이 거의 끝나가는바. 적들은 목전까지 닥쳐온 상태였으니 지체할 틈이 없었다.
“모두, 서두른다! 준비가 끝난 자는 막사 앞으로 집합하도록!”
장내에는 선우연보다 위계가 높은 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웅혼한 내공과 패도적인 기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기나긴 후퇴 행렬이 이어졌다.
최우선은 부상자를 실은 마차였다. 그 뒤를 어린 후기지수들이 따랐고, 본대가 이어 발걸음을 옮겼다.
“우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라… 이젠 제법 멋도 부릴 줄도 아는군.”
연합군의 제일 후미.
언덕 위에서 떠나는 행렬을 바라보던 당천유는 누군가의 흉내를 내듯 한껏 낮춘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럼 나도 거기서 울어 재껴야 성에 차겠는가.”
“그러면 그것도 제법 볼만한 광경이겠군.”
선우연은 당천유의 놀림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남궁 소저!”
그러던 차 당천유는 저 밑에서 이쪽으로 올라오던 남궁연을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병영의 확인은 끝났소?”
“네. 방금 전부 끝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전부 떠난 걸 확인했어요.”
“남은 건 저들의 발목을 붙드는 건데.”
후퇴의 준비가 모두 끝났을 때 선청우는 후발대를 조직했다.
산발적인 작전을 통해 적들의 발목을 묶을 작정으로, 후기지수를 비롯한 아직 젊은 신진 고수들의 지원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연을 비롯한 주호의 제자들은 남기를 희망한바. 선청우는 그 의지는 둘째치고 지닌 무위가 여타 원로 고수 못지않게 성장한 그들의 전력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교관님은 괜찮으시겠지.”
“워낙 강하신 분 아닌가. 이전에도 홀로 군세를 막아 세우셨으니 괜찮으시겠지.”
“맞아요. 천 언니랑 사신문의 고수들이 지원하러 갔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어이!”
그때, 저 밑에서부터 그들을 부르는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비산, 철대환, 그리고 천후까지.
후발대의 작전 개요를 듣고 왔는지 그들에게 내려오라 손짓하는 중이었다.
“가지.”
선우연의 말에 다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항상 승리할 순 없지만, 이번 후퇴의 아픔은 너무나도 쓰라렸다.
***
주호는 혼자의 몸으로 무려 한나절 가까이 사천에서 밀고 들어오는 혈천신교의 군세를 막은바. 그 전공에 힘입어 연합군의 후미를 지키는 본대는 후발대는 얼마간 훌륭히 제 목적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틀째 되는 날 한계를 맞이했고, 사흘째에는 다들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허억, 허억.”
선우연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숲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지만, 그건 곧 자신을 쫓는 적들도 마찬가지란 소리일 터.
사흘 동안 한시도 쉬지 못해 입안에 단내가 날 정도로 피로했으나 저들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다들 잘 도망갔으려나.’
선우연은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동료들을 걱정했다.
각자 어지간한 고수는 가볍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닥쳐드는 적들은 그 무위가 무색해질 만큼 많은 숫자였다.
이젠 더 시간을 끌지 않고 단숨에 밀어붙이려는 듯 그들은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 후발대를 추살해나갔다.
족히 일, 이천은 가볍게 뛰어넘는 숫자. 사흘간 선우연의 손에 죽은 이가 거의 백 명가량이었지만, 저들은 겁먹지 않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어올 뿐이었다.
쐐애액!
앞쪽 거목의 나뭇가지로부터 몇 명의 괴한이 떨어졌다.
선우연은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고, 괴한들은 땅에 닿기도 전 핏줄기를 뿌려대며 쓰러졌을 따름이었다.
다다다닥!
괄목할 만한 쾌검술이었다.
이전보다 한층 더 진일보한 성장세였지만, 선우연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들을 마주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즉, 포위망의 가장자리까지 다다랐다는 것이다. 그는 저 너머에 도사리는 기척을 가늠하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마동에서 겪었던 그 환몽은 지금을 가리켰던 것인가.’
천마신교의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무렵, 혈천신교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동에서 수련 당시 겪었던 환몽이 그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불현듯 생각나는 것을 보니 작금의 일을 먼저 알려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꽈아악.
선우연은 지척에서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검을 다잡았다.
환몽과 같은 결말로 생을 끝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