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63화 (263/300)

#263화

사천 전선이 궤멸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중원 전역을 강타했고, 수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자아냈다.

당장 가까이 몇십 년 전만 해도 중원과 마교 간에 큰 전쟁이 있었다.

무려 만 단위가 죽어간 정마대전.

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중원의 천조 기지인 사천 전선이 돌파당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 가장자리까지 내몰리며 위험했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중원의 저력을 증명하듯 끝에선 모두 몰아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것은 기록된 역사상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림맹주 검선(劍仙) 단철량을 비롯해 연합군 수뇌로 알려진 굵직한 이름의 고수들도 생사 불명인 상황.

일각에선 그들이 전부 죽었다고 가정해 사천을 버리고 새로이 연합군을 규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섬서와 호북에서 검제 남궁한을 중심으로 기존 연합군과 더불어 구파일방 및 세가 연합에서 보내온 지원군이 새로운 전선을 펼쳤다.

귀주와 호남에선 십패천 중 한 명을 꺾음으로 이름을 알린 재야의 고수 천공검(天孔劍) 신창원이 연합군의 잔여 병력과 중소 문파를 규합해 결사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이후엔 한시라도 사천을 되찾아야 했지만, 그곳은 지금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둑이 무너지자 물밀듯이 밀려온 혈천신교의 군세가 그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실을 의식해서인지 민초들은 손을 데지 않고, 오히려 곡식과 재화를 베푸는 것으로 다독인바. 하지만 자신들에게 검을 겨누었던 문파들은 본보기로 삼으려는 듯 풀뿌리도 남기지 않은 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물론 항복하는 곳들은 자신들의 휘하로 거두어들여 사천을 장악하는 데 일조하게 했다.

사천은 중원의 두 번째 심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청성, 점창, 아미, 그리고 당문 등 긴 역사를 가진 명문들이 많았지만, 그들 역시 밀려드는 혈천신교의 군세에 문파를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수많은 문파가 사라지고, 긴 역사를 지닌 터전이 짓밟히고, 남아 저항하던 이들이 스러졌다.

강호에 유례없을 정도로 거세게 닥친 암흑기. 문제는 그것이 고작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사천을 정리한 저들이 언제 내려올지 몰라요!”

“어허, 조급해하지 말게. 천천히 정보를 얻고 해도 늦지 않아. 전쟁이 장난인가? 저들도 큰 피해를 보았을 텐데 어찌 곧바로 내려올 수 있겠나.”

“그리 여유롭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장로님, 선제공격을 진지하게 논해봐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운남 전선은 양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궤멸할…….”

“어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가정하지 말라니까!”

“코앞에 닥쳤으니까 그러는 것 아닙니까!”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사천을 점령한 혈천신교의 군세가 내려온다면 운남 전선은 양방향에서 저들을 맞서 싸우게 되는 초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먼저 군세를 움직여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쪽은 선제공격에는 동의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상황과 정보를 파악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

매화검성 선청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두 의견 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 역시 지금 당장이라도 사천에서 혈천신교의 군세가 밀려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공격하기엔 많은 것이 저어될 따름이었다.

“주호 그 친구는 어디 있는가?”

“검신 대협이라면 주변 정세를 둘러보겠다며 직접 나가셨습니다. 이쪽에서 정해지는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셨지요.”

하다못해 주호에게 의견이라도 구하려 했지만, 그 역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갑론을박은 정오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결론이 나질 않는 가운데 결국 이곳 전선의 지휘관인 선청우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 동틀 무렵까지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정오에 선제공격하는 것으로 하겠네. 다들 그리 알고 준비해주시게.”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서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달랐지만, 지휘관이 결정 내린 이상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운남 전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다들 몸에 밴 습관이었다.

‘이것이 맞는지 모르겠군.’

오직 선청우만이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쥐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

사락.

눈 위를 밟는 감촉은 언제나 새로웠다. 더욱이 그것이 아무도 허락지 않은 새로운 것이라면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옅은 미소마저 배어나올 때도 있었다.

“…….”

하지만 눈 내린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주호의 얼굴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사천에서 시시각각 들려온 비보 때문이었다.

“…단 노인.”

철옹성 같던 고수였다.

입신지경에 오른 이후 꽤 성장을 거듭했다고 해도 아직 그와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나던바. 그런 단 노인조차 신마(神魔)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는 사실이 사뭇 충격적이었다.

주호는 천천히 제 가슴을 쓰다듬었다.

사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신마는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닐 것이다.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적해(赤海)의 기운은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바. 아무리 못해도 반절 이상은 되지 않을까 짐작했다.

만일, 만일 자신마저 그에게 꺾여 사로잡혀 버린다면.

완전히 부활한 신마를 막아 세울 자가 이 천지 사이에 존재할까.

비동의 제단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무황이 눈을 뜨고 부활하지 않는 이상 힘드리라.

‘어깨가 무겁군.’

힘을 계승한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더없이 명확해진 그 사실에 주호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여기서 혼자 뭐해?”

“추우신데 들어가 계시지 않고요.”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어느덧 두 여인이 다가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우희는 옷깃으로 새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붉은 외투를 걸친 채 가볍게 손을 뻗어와 주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지. 주작이라도 겨울은 타나 봐.”

툭.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연이 슬쩍 주호의 옆으로 몸을 붙어온다. 마치 팔짱을 끼려는 듯한 자세로 주호의 팔 사이를 파고들었고, 기어코 자신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었다.

“…적극적이네, 동생?”

“추우니까요. 제 몸으로 따뜻하게 해드려야죠.”

한치의 밀림이 없다.

천우희는 이제껏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해왔던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냐며 가늘어진 시선을 보냈지만, 남궁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하하.”

주호는 옅게 웃음을 토해내며 남은 왼손을 들어 천우희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남궁연처럼 직접적으로 부딪쳐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인지 잠시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그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교차하고 서로의 맥박이 합쳐진다. 주호의 큰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천우희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언니, 나이와는 다르게 아이 같으신 면이 있으시네요.”

“우리 나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남궁연의 놀림에 천우희가 울상을 짓자 주호는 다시금 웃음을 토해냈다.

그는 두 여인과 함께 들판을 거닐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옆쪽은 격전지였던 터라 얼어붙은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겨울 가운데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듯 한껏 여유를 만끽했다.

세 쌍의 발자국이 사이좋게 눈 위에 찍히며 길게 이어진다. 주호는 단지 그녀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때까지 쌓인 피로가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글쎄.”

“뭐, 어떻게 될까보다 뭘 할지 정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언니는 뭘 하고 싶으세요?”

“음.”

천우희는 남궁연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씩 웃으며 주호와 맞잡은 손을 들었다.

“불치병인 지병도 회복했겠다 아이나 가질까? 사실 단란한 가족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었거든.”

“…컥!”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주호는 사레가 들렸다.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기에 남궁연이 그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려줄 찰나, 천우희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셋? 다섯? 그때까지 가면 노산인 게 조금 걸리지만, 대환단까지 먹었으니까 괜찮겠지.”

“…교관님 힘내셔야겠네요.”

남궁연이 측은한 눈길을 보내오자, 주호는 입가를 닦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라니.”

“응? 혼인할 거 아니었어? 설마 몸만 목적이었던 거야?”

“네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아, 난 또 뭐라고.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남자가 꽁하긴.”

천우희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주호의 왼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곤 붉은빛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병이 있었잖아. 당장 내년을 넘길 지부터가 불투명했는데, 지금은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는걸.”

죽어도 놓아주지 않겠다.

천우희는 그런 확고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교관님은 뭘 하고 싶으세요?”

남궁연은 그런 천우희에게서 주호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검신(劍神) 주호.

무려 검신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강호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명성으로는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터.

마음만 내킨다면 새로운 문파를 개파해도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리라.

“…글쎄. 아직은 생각해둔 것이 없는데.”

“그럼 교관 일을 계속하시게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군. 생각 외로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 듯해서 말이야.”

“으음.”

“…관생들 입장에선 별로였나?”

“아니요. 저는 좋았는데, 다른 이들은 조금 버거워했잖아요. 교관님이 워낙 빡빡하게 굴리니.”

“그건 너희들 한정에서만 그랬다. 다른 관생들은 기초를 중심으로 다잡아주었으니.”

“아하하.”

“…아니었나보군.”

주호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 적성에 맞으며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거늘, 가르침을 받는 이들의 시선에선 혹독한 스승으로 비쳤던 것인가.

“그래도.”

“그래도?”

“좋은 아버지가 되실 것 같아요.”

남궁연은 사뭇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말해왔다.

천우희가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어린 동생의 이마를 툭 밀었다.

“나이도 어린 게 요망하기는.”

“언니가 나이에 비해 너무 철이 없으신 게 아닐까요?”

양쪽에서 투닥거리는 그녀들 덕분에 주호는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재차 발걸음을 내디딜 찰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며 짙은 눈으로 뒤덮인 지평선 너머를 향했다.

“…교관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 기색을 눈치챈 둘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주호는 상태창 위로 떠오르는 수천, 수만 개의 시뻘건 점들을 바라보며 메마른 침을 삼켰다.

“곧바로 돌아가서 진지에 알려라. 아무래도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지평선 너머 저 멀리 두 여인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인 사천 방향.

수만에 달하는 혈천신교의 군세가 진군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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