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맹주님, 저건…….”
“…물러나게.”
단철량은 수하를 물리며 혈천신교의 군세를 가르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오는 한 대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전장의 감도는 전운은 여느 때처럼 치열하기 짝이 없다. 연합군은 동이 트기도 전에 물밀듯이 밀려온 적들을 상대로 싸워나갔고, 정오에 이르자 그것이 절정에 다다랐다.
흩날리는 눈발은 전장의 열기가 무색하게 스러진 시체 위로 떨어져 얼어붙는다. 여느 때라면 저들도 슬슬 후미로 물러나 숨을 고르려 할 터.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차 한 대에 의해 모조리 깨어져 나가고 말았다.
대해(大海)를 가르듯 그 많던 군세가 옆으로 비켜나며 절대적인 복종을 표한다. 이윽고 그것은 전장의 최전선까지 도달해 멈춰 섰다.
끼이익-.
혼돈이 그 앞에 다가가자 문이 절로 열린다. 크게 뜬 눈으로 그 안을 바라본 단철량은 짙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귀기 어린 기운에 몸이 흠칫 떨렸다.
‘…이건.’
한 쌍의 새하얀 눈동자.
아무것도 담지 않았기에 더 섬뜩한 그 안광과 마주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맞서 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다. 격이 다르다. 한계니 불가능이란 말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불가해의 존재를 마주하니 모든 것이 덧없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자신과 나란히 선 모두가 그것을 느껴 경직된 분위기 가운데, 죽음을 각오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림맹주라는 무거운 책임감 덕분이었다.
자신은, 자신만은. 설사 죽는다고 하여도 물러나선 안 됐다. 자신 한 명으로 이 전장의 선 수많은 이가 꺾여버릴 수 있다. 설령 죽더라도 하나의 상징이 되어 이들의 의지를 묶어야 했다.
저벅.
단철량은 그 두려움을 모두 받아들이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폐부를 훑는 공기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으며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 몸이 짓눌리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생애 이런 적이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긴장이 들었다.
“본인은 무림맹의 맹주이자 연합군의 수좌로 있는 단철량이라 하오. 귀하께서는…….”
쿵.
천천히 자신의 소개를 하며 시간을 끌려던 단철량의 주위로 막중한 압력이 찍어 눌렀다.
비유나 심상의 느낌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압박이 온 천지를 짓누르며 그의 무릎을 비틀거리게 한바. 비교적 가까이에 있던 고수들 역시 그것에 휘말렸는지 피를 토해내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이 어찌.’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가 아닌가.
물론 주호와 자신이 차이가 나듯 상하 관계에 어느 정도 격차는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리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올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쪽보다 한 차원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소리였다.
“누가 말하는 것을 허락했지.”
“…큭.”
권태로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가 담담히 내뱉어졌지만, 단철량은 신음을 토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신마(神魔).
불현듯 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인간으로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불가해의 존재. 하지만 단철량은 이를 악문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쿠우웅!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낼 듯 수십 년간 쌓아올렸던 자신의 전부를 이끌어 내었다.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내리찍어오는 신마의 기세와 부딪쳐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부터 균열을 만들어낼 정도였으니.
“내가!”
단지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의 격차지만, 단철량은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사문에, 자신에게 검선(劍仙)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이 중원에, 자신의 뒤를 쫓아온 수하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중원의 검선(劍仙)이노라!”
낙일(落日) 검법.
사일 검법과 더불어 점창파의 이대 검법으로 일컫는 정점의 검법.
한계를 뛰어넘어 검선이라는 고수의 손에서 재정립된 검술이 그 삶을 원료로 태우며 찬란하게 펼쳐졌다.
‘낙일(落日)은 하루의 끝을 고하며 다음 날을 준비하는 때.’
남겨둔 씨앗은 많았다.
예순여덟 평생을 살아오며 스쳐 지나간 이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친지도, 가장 가까웠던 수하의 모습도 아닌, 고작 몇 년 남짓한 인연인 한 청년의 것이었다.
강호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며, 종래엔 큰 활약을 보여 검신(劍神)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시시콜콜한 노인의 잔소리라는 명목으로 자신이 말년에 얻은 깨달음은 모두 그에게 전해주었다.
남은 것은 저 불가해의 존재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히는 것. 격이 높다면 같이 진흙탕에 뒹굴어 더러워질 것이며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이 목숨을 대가로 팔 한 짝 정도는 가져갈 각오를 하였다.
그리한다면, 자신의 뒤를 이어 우뚝 설 남자가 저 존재를 쓰러뜨려 주리라.
단철량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흠.”
신마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떨어져 내린다. 아주 먼 옛날, 점창의 장문인이 펼쳤던 낙일이란 이름의 검법과 흡사한 광경이었다.
입신지경에 다다른 고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 필사의 각오로 펼쳐낸 최후의 검.
예전이었더라면 손뼉이라도 쳐주었겠지만, 삼백 년이란 세월은 그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혼돈이 자신의 기세를 일으키는 기색을 보였다.
신마는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그를 제지했고, 손끝으로 한 줌의 기운을 모았다.
“혈천(血天)의 도래를 알리는 첫걸음이로다.”
가벼이 내뱉어진 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핏빛 궤적이 그려졌다.
단순히 그러한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쭉 이어진 궤적은 떨어져 내리는 태양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듯했다.
“…….”
하지만 신마는 너무나도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덜컥.
자신의 진원진기까지 담아 검을 휘둘러가던 단철량은 자신의 검날 위에 걸리는 낯선 감촉에 두 눈을 떴다.
몇 걸음. 단 몇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되거늘 어째서 자신의 검은 움직이지 않는가.
“……!”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로 핏빛 기류가 얽혀 검을 옭아매고 있었다. 단철량이 이를 악물며 그것을 빼내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듯 그것은 옴짝달싹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 애쓰지 말도록 하여라. 애초에 나와 마주한 순간 너희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 따름이니.”
파아아앗-!
떨어져 내리던 태양이 휘몰아치는 핏빛 기류에 서서히 집어삼켜졌다. 동시에 푸른빛을 띠고 있던 하늘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며 누군가 진득한 피라도 뿌린 것처럼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허억!”
“이, 이 무슨…….”
인간이 부렸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광엄한 조화. 그렇기에 긴장한 기색으로 검선과 신마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연합군의 고수들이 기함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끼이이이이익─!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사방을 진동한다. 동시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쏟아지는 핏빛 해일이 전장 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아, 아악! 으아악!”
“피해라! 파도에 닿지 마!”
“팔이! 내 팔이!”
재해(災害)였다.
고수와 하수 막론할 것 없이 그것에 조금이라도 휘말린 이는 몸이 바스러지며 한줌의 재로 되돌아갔다.
직전까지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하던 이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를 밀치며 앞다투어 도망쳤다.
“하하.”
그 끄트머리에서 단철량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의기이니 새로운 시대이니 하며 필사의 각오를 다졌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이 불가해의 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천지 사이에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중원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막연한 미래에 한숨을 내쉬며 두려움을 표해내던 단철량은 순식간에 들이닥친 적해(赤海)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지원군의 합류로 운남 전선의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전선이 뚫릴 것 같지 않자 혈천 신교의 군세는 저 멀리 물러나 다시 태세를 갖추었다.
그 직후 금방이라도 다시 닥쳐 들어올 듯했지만,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지나도록 잠잠했기에 그들 역시 정비하는 데에 힘썼다.
부상자를 뒤로 물리고 황폐해진 전선을 다시 구축한다. 끊긴 보급로를 다시 정립해 물자를 받았고, 얼마 만인지 모를 달콤한 휴식은 찌들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그런 병영의 분위기와는 달리 수뇌부가 모인 막사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주된 이유는 시시각각 사천에서 전해져 오는 비보 때문이었다.
그쪽 전황이 다시 운남처럼 치열해진 것은 이미 전해 들었다. 혈천신교의 본대가 직접 나서기 시작해 전선 자체가 출렁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고, 이때까지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것 자체는 괜찮았으나, 이들의 얼굴을 굳게 만들어버린 것은 바로 어젯밤에 들어온 소식이었다.
“맹주님을 비롯한 연합군 수뇌 대부분이 생사 불명이라니.”
“전서에 적혀있진 않지만, 전선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고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쪽에 제 지인이 있는데…….”
유례가 없는 상황에 얼마 전 화산파 장문인인 매화검존이 이곳에서 망했던 것보다 더 큰 여파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보를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머지않아 우후죽순으로 퍼져 나갈 터.
순식간에 사기가 꺾여버릴 것이 수뇌부의 걱정이었다.
“…교관님.”
남궁연은 탁자 밑으로 조심스레 주호의 손을 붙잡았다.
비보에 적힌 이름에 남궁세가는 없었다. 애초에 담당하는 구역이 다른바. 그렇기에 큰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생사불명이 된 맹주와 그는 긴밀한 관계가 아니던가.
“괜찮다. 무사하실 것이야.”
검선(劍仙)은 작금 무림의 정점이었다. 혼돈 그 본인이 나선다고 하여도 쉬이 물리칠 수 없을 터. 그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고수가 포진해 있으니 최악의 상황까진 가지 않았으리라.
주호가 그리 애써 생각할 때, 고수 중 누군가 서찰을 팔락거렸다.
“그래서 이 신마(神魔)라는 존재가 문제로군요.”
“처음 듣는 이름이오. 세외 지존이라 일컫는 십패천에도 그러한 이름은 없었는데?”
“듣기로는 혈천신교의 수장이라 하던데.”
“신마. 그렇다면 천마와 같은 맥락에서 오는 이름이라는 것인가. 혈천신교이니 당연히 혈마라 불릴 줄 알았는데.”
“혈교와 혈천신교는 다릅니다. 혈교는 마교의 분교나 마찬가지고, 혈천신교는 세외에 터를 두고 있는 이종의 종교 집단이지요.”
“…검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들끼리 가진 정보로 토론을 하던 중 누군가 슬쩍 주호를 바라보았다.
혼자의 몸으로 수만의 군세를 막아내는 그 신위는 가히 검신(劍神)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
자금에 와서 그 누구도 그가 검신이라 불리는 데 이견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더러는 숨길 수 없는 흠모와 선망의 눈빛까지 보내왔으니, 주호로서는 멋쩍을 따름이었다.
“…일단 정확한 정보의 파악이 우선일 듯싶습니다. 어렵게 운남 전선을 유지했는데 정보의 혼선으로 괜한 움직임을 일으켰다간…….”
“그, 급보! 급보입니다!”
그때, 주호의 말을 끊고 지휘소 안으로 전령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그는 자신에게 쏠리는 이목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바닥에 엎어졌고, 거칠게 숨을 고르며 좌중을 바라보았다.
“사, 사천 전선이 괴멸! 연합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보아 감숙, 섬서, 호북으로 물러난다고 합니다!”
“…사천 전선이 괴멸했다고?”
주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필사적으로 이곳 운남을 지켜내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어떻게 해서든 저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는 교두보를 틀어막기 위해서였다.
운남, 청해도 아닌 사천이 뚫렸다는 것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
“…….”
금방이라도 위아래 양쪽에서 혈천신교의 막대한 군세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위기감에 지휘소는 정적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