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사흉수는 본디 신마(神魔)의 무공을 사사 받은 네 명의 제자를 뜻했다.
초대 사흉수는 사람을 모아 세력을 구축했고, 그것이 혈천신교의 모태가 된바. 그렇기에 그들의 이름은 혈천신교의 이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천아성은 궁기의 이름을 물려받았을 때가 돼서야 처음으로 그 존재와 마주했다.
혈천신교가 섬기는 신(神).
인세(人世)의 절대자.
감히 그 용안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며, 같은 공간에 자리해 살아남았다는 것조차 감사히 여기게 되었다.
천아성은 그날 궁기가 되었다.
그 뒤로는 혼돈에게 여러 가지 비사를 전해 들었다. 사실 그는 신마뿐만 아니라 혼돈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았다.
혼돈은 처음부터 혼돈이었다.
그 이름을 물려받는 이들이 같은 핏줄이라 얼굴이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아주 먼 옛날 어릴 적에도 분명 비슷한 얼굴이었기에 내심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신마에 관해선 감히 그런 마음조차 품고 있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무황의 계승자 운운하며 신마의 이름으로 우스갯소리를 내뱉었을 때,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오르며 핏줄이 툭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쿵─!
혈천신교의 대군과 아직 피 냄새가 꺼지지 않은 전장 사이로 두 명의 입신지경의 고수가 치열하게 맞붙었다.
궁기의 소호 검법이 마치 호랑이처럼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주호의 검은 청룡처럼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허공을 가득 채웠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릴 정도의 신위. 여파만으로도 땅이 주저앉으며 지형을 바꿔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몇만에 달하는 혈천신교의 군세가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뒤로 물러났을 따름이었다.
툭.
짧은 소강상태. 서로 거리를 두고 잠시간 물러났을 찰나, 주호가 피식 웃었다.
“머지않아 연합군의 후발대가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전장의 우세를 점하고 싶다면 서둘러야 할 텐데 나 한 명에게 발을 묶여서 괜찮겠는가.”
“…한껏 여유를 부리는구나.”
“여유를 부리는 것은 네놈이지. 나였더라면 저 뒤의 놈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다. 다른 사흉수 놈들은 함께 오지 않았나 보지? 도올은 팔이 잘렸으니 둘째치고 혼돈은 동행하리라 생각했거늘.”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이쪽 전선이 활로라면 적어도 상위 고수의 비중을 늘려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야 하지 않겠나.
혼돈은 몰라도 사흉수의 다른 수좌인 도올이나 도철은 함께 오리라 생각했거늘 혈천신교의 군세에서 느껴지는 입신지경의 고수는 궁기 한 명뿐이었다.
‘아니라면 기척을 감추고 때를 노리고 있다?’
구태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있을까.
주호는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궁기의 입가에 스치는 조소를 보고는 뜻 모를 불안을 느꼈다.
주호와 궁기의 싸움은 거의 한 시진이 넘도록 이어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막힌 혈천신교의 군세는 곧바로 우회로를 준비했고, 운남 전선에 직접 닥쳐갔다.
연합군의 지원이 전선에 당도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
몇만에 달하는 인원이 한 번에 부닥치는 광경은 장관이기 짝이 없었다.
각 진영의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병력을 통제해 효율적으로 싸워보려 했지만, 이들은 이미 전장의 열기에 휩싸여 버린 지 오래. 그렇기에 현장의 판단에 맡기며 치열하게 싸움을 반복할 뿐이었다.
“…쯧.”
주호는 연합군과 합류하고 싶었으나, 궁기가 끈질기게 자신의 발목을 묶어두는 탓에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면 좋겠지만, 그것에도 응해주지 않으니 뭐 하자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인바. 자신 쪽에서 나아갔다가 숨겨진 암수에 당할 위험이 있으니 상대의 의도에 엮여들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아까보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데.”
종래엔 궁기 측이 오히려 표정이 가벼워졌다.
이죽거리며 농을 던져올 정도로 바뀐 그의 분위기에 막연하던 위기감은 현실이 되어 주호의 가슴을 엄습했다.
쿵.
결론은 싸움을 끝내는 것이었다.
큰 초식으로 주변을 뒤흔들 만한 여파를 만들어낸 주호는 곧바로 몸을 내뺐다.
혹시라도 궁기가 따라온다면 역습을 가할 작정으로 칼을 벼렸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떠나는 주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쐐애애액-!
주호는 연합군으로 합류하는 도중 마주치는 적들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종종 그가 검신인 것을 알아보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두 일말조차 저항하지 못한 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을 따름이었다.
‘전황은 나쁘지 않다.’
이번 연합군의 지원은 정천 학관 측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비대의 출진이었다.
그 때문에 종종 아는 얼굴이 섞여 있는바. 주호는 그 가운데 친분이 있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담형, 팽 교관님.”
“자네!”
“오랜만이로군.”
혈천신교의 고수들과 검을 겨루던 담우형과 팽대환이 화색을 띠며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둘 다 목숨이 위험해질 뻔했지만, 주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조금 전까지 그들을 애먹게 했던 마인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은 자네가 했지. 몸은 괜찮은가. 저쪽에서 홀로 군세를 막아내고 있었다고 들었네만.”
담우형이 먼저 다가와 주호의 몸을 살폈다.
실상 경지는 그쪽이 더 높았지만, 마치 동생을 걱정하는 듯한 모양새에 주호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자네의 전공은 간간이 듣고 있었네. 관주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어. 관생이 아니라 교관이긴 하지만 학관의 명성이 크게 올랐으니 말이야.”
“하하하.”
“아, 미안하군. 이제는 교관이 아니지.”
“…저 잘린 겁니까?”
“그만두는 거 아니었는가?”
팽대환의 물음에 주호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 이후에 뭘 할지는 생각해두지 않았지만, 곧바로 학관을 떠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궁연이나 다른 후기지수들이 성장하면서 쑥쑥 커가는 것을 보니 교관 일이 제법 적성에 맞는 듯했다.
서걱.
주호는 그리 대답하며 뒤쪽으로 가볍게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후미에서 그를 기습하려하던 마인 세 명이 동시에 몸이 잘려 나가며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해후는 나중에 풀어야 할 듯하군. 일단 전장의 정리가 우선이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으니 금세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이쪽은 어떻게 일단락됐지만, 사천 쪽이 문제지.”
“무슨 일 있습니까?”
“…듣지 못했는가?”
팽대환의 말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천 전선에 혈천신교의 본대가 직접 나섰다네. 맹주께서 직접 나서셨는데…….”
옆에 있던 담우양이 팽대환을 대신해 설명을 이어 나갔고, 그 내용에 주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신검을 꽉 움켜쥐었다.
***
삼백 년.
범인(凡人)이라면 몇 번은 죽고 사는 윤회를 거쳤을 기나긴 시간.
그는 오로지 존재할 뿐이었다.
아니, 처음엔 ‘존재’라고 말하기에도 미약할 따름이었다.
무황에게 패배 이후 그의 영혼은 수백 갈래로 찢겨나갔다. 본래라면 목숨을, 자아를 연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
하지만 신마(神魔)라는 이름답게 불가능을 이뤄내는 기적에 다다랐고, 지난 삼백 년이란 세월을 찢겨 나간 혼을 되찾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반절은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늘로 솟은 것인지 땅으로 꺼진 것인지 천지의 가장자리까지 사람을 수색해도 그 편린조차 발견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겨우 반(半).
물론 그 정도로도 신마(神魔)라는 이름을 우뚝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지만, 완전이라는 이름에 도달해있던 그에게는 불만족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종으로 부리던 아해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반쪽을 발견했다며 소식을 전해왔다.
신마는 마교에서 혼돈의 눈을 빌려 그 존재를 확인했다.
당대의 청룡, 검신(劍神) 주호.
그 단전 한 구석에 선명히 꿈틀거리는 것은 분명 자신의 반절에 달하는 영혼이었다.
자아가 먹힌 것인지 소멸한 것인지 반응이 없었지만, 신마가 주목한 것은 그 주호라는 아해가 발하는 기운이었다.
-이것은.
태초의 근원.
무황이 만들어낸 극한의 중점.
혼원일극이라 불리는 신기에 가까운 힘이지 않은가.
신마는 곧 앞뒤 관계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 아해는 무황의 무공을 물려받았다.
몇 해 전 무황의 비동이라는 것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신마는 혼돈을 시켜 마교를 움직이는 것으로 그것을 빼앗아 오려 했지만, 생각보다 다른 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손으로 소멸시켜버리려 했던 것이 깊은 지하에 파묻히게 된 것이니.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주호라는 아해가 버젓이 그것을 손에 넣어버렸다.
-질긴 악연이구나.
우습게도 무황의 힘을 계승함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 반절까지 넘어 가버린 듯했다.
무황, 사신문, 청룡.
무황 역시 삼백 년 전 사신문이란 곳에 속해 있던바. 스스로 알리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신마가 조사하기로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당대의 청룡이 무황의 무공을 계승해 자신의 영혼을 넘겨받는 것으로 또다시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똑똑-.
깊게 이어지던 상념은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멈췄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 신마가 문을 향해 시선을 보내니, 그것이 저절로 열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혼돈.
자신이 부린 태초의 수하.
그 역시 육신의 한계를 넘어 혼이 계승된다. 편리를 위한 자신이 내린 은혜였다.
혼돈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예의를 표했다.
“당대의 무림맹주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흠.”
지루하던 차에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무림맹 녀석들은 항상 같은 모습이면서도 다른 이름으로 그곳에 존재했다.
정천, 천무, 무림…….
이 시대에는 무림이라는 이름이 채택된 듯했다.
신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절의 혼을 지닌 주호라는 아해는 운남에 가 있지만, 그리 조급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자아가 소실된 그 영혼은 거대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터. 중원 정벌이라는 대업을 이룬 뒤 흡수해도 늦지 않았다.
그렇기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자 궁기까지 보내놓지 않았는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 아해가 무황의 힘을 온전히 깨우쳐 다시 한번 삼백 년 전의 싸움이 재현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한다면 내가 바로 천하제일이니.’
툭.
마차에서 내려선 신마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밖에 나선 것이 얼마 만일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창백한 피부에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다. 마치 인세(人世)를 벗어난 아름다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게 되는 압도적인 미(美)였다.
“움직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흠.”
혼돈의 물음에 신마는 제 손을 주억거리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보다 마교의 전복을 우선시한 것은 바로 그 육체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였다.
백내이, 적내이, 흑내이 같은 것들은 신마의 육체를 구성하는 연구에서 나온 부산물일 뿐. 오직 최상의 재료들을 이용해 신마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혈천신교가 가진 최대의 과업이었다.
신마는 귓가를 살랑이는 바람에 삼백 년 만의 가벼움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 앞으로 수많은 군중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인 연합군. 살의, 분노, 증오, 두려움.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친다. 신마는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런 감상을 품는 이들이 너무나도 경멸스러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유달리 돋보이는 기세를 지닌 노인이 한 명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검선.”
무리맹주 검선(劍仙) 단철량.
광오하기 짝이 없는 별호다. 검신은 우습기라도 하지, 선(仙)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감히 별호에 집어넣는 것일까.
알리는 없겠지만, 그 한심스러움에 신마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