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마옥불제(魔玉佛帝)는 포달랍궁을 대표해 혈천신교의 군세에 합류한 라마승이었다.
사실 포달랍궁은 중원에 대한 큰 욕심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타락한 불계라 불렀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조금 틀린 이야기였다.
포달랍궁 역시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규율과 역사가 있으며 여태껏 그것을 지켜왔다.
그럼에도 혈천신교와 함께 중원을 침공한 것은 그들의 폭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혈천신교는 세외의 폭군이자 절대자. 그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사라진 세력이 셀 수 없다. 포달랍궁 역시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며 발아래 엎드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저 머릿수만 채우면 그만이라 생각했거늘.’
무수히 많은 팔이 찢기고 악불(惡佛)의 목이 갈라졌을 때 마옥불제는 중원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
“…아미타불. 덧없는 삶이었도다.”
나지막하게 읊어진 그 말은 포달랍궁의 불제(佛帝)라고 불렸던 고수의 유언이었다.
하늘 위로 시뻘건 피가 치솟음과 동시에 그 장대한 몸이 반으로 갈라졌고, 이내 큰 소음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
세외의 절대 고수인 십패천이 단 한 명에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죽음을 맞이하자 전장은 침묵에 잠겼다.
포달랍궁의 라마승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강함을 익히 보아왔던 혈천신교의 무인들까지 모두 멍한 표정. 먼저 상황을 깨달은 연합군의 고수들이 반색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검신께서 십패천 중 둘을 무찌르셨다!”
“적들의 수괴가 모두 죽었다! 이대로 밀어붙여!”
매화검존을 쓰러뜨린 것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십패천의 고수 둘을 쓰러뜨린 것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전공이었다.
막, 멍하니 있던 혈천신교 고수의 가슴을 꿰뚫은 천우희나, 남궁연 같은 후기지수들 역시 그 기세에 편승해 더욱 거칠게 검을 휘두른다. 그 모습을 보고 전황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온 것을 깨달은 주호는 마찬가지로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선청우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자네는 어찌하려는가?”
“저 앞쪽 전선도 도움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선청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호가 보인 신위에만 넋을 잃고 있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바. 더불어 앞쪽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문도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진경이, 진경이를 부탁하네.”
“난매검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그 친구가 저 앞의 전열을 이끌고 있어. 이 빌어먹을 놈들은 따로 고수를 빼서 지휘관의 목덜미를 노려오는 습성이 있으니 곤욕을 치루고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난매검 선진경이라 함은 일전 화산에 들렸을 때 안면을 튼 사이였다.
그렇기에 지체할 것 없이 몸을 돌렸고, 저 앞에 있던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우희!”
“알았어.”
삐이익-!
주호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입을 오므리자 날카로운 소리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사신문의 고수들을 모으는 고유의 신호법. 그와 동시에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활약하던 이백의 고수들이 흐르는 물처럼 아군 사이를 빠져나와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앞쪽 전열을 지원한다.”
“존명.”
사실 주호는 병법이나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해야 하는 병력 운용에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병법 따위는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힘으로 적들을 찍어 누르면 그만이 아닌가. 실제로 십패천의 둘을 무참히 쓰러뜨린 것으로 역전의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닐 테지.’
주호는 전장을 가로지르며 저 지평선 너머를 향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들이 이곳을 방어하는 데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저들 역시 필사적으로 공격해올 터.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거라는 혼돈의 말이 아직 귓가에 선한 것을 보니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큰 듯했다.
웅웅!
곧 최전선에 도달한 주호는 신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발아래로 무수한 시신이 깔린 전장은 이미 지옥도로 변한바.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에서 이목을 잡아끌기 위해선 화려한 한 방이 필요했다.
쿠구구궁-!
수십 줄기의 강기가 마치 용이 제 몸을 꿈틀거리듯 확연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전장을 질주했다.
고작 청룡검법의 일 초식인 청룡잠운이었지만, 신검의 끝에서 맹렬하게 피어오른 그 검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위력을 보였다.
“……?!”
난매검 선진경은 돌파당하기 직전인 전열 가운데 자신에게로 짓쳐 드는 세 명의 마두를 상대로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혈천신교의 별동대가 이쪽 전선을 우회해 후미로 공격을 시도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곳은 이미 전열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정예 고수들이 대부분 이쪽에 포진되어 있기에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는바. 그 상황에서 후미를 지원하게 된다면 이쪽 전선을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제기랄.”
하지만 그 역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거늘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먼저 간 장문인을 따라 황천길을 걷게 될 상황이었기에 온몸에 감각을 곤두세웠을 찰나,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전장을 휩쓸어버리는 수십 마리의 청룡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꿈인가 생시인가.
혹시 자신은 이미 죽어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기엔 손에 쥔 검이 너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마인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자네!”
반색하며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선진경의 모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같은 화산파의 문도 아니랄까 봐 보이는 반응 역시 비슷했다.
“뒤쪽은, 뒤쪽은 어떻게 되었는가!”
“연합군의 지원이 도달했습니다. 십패천 중의 둘인 청귀와 마옥불제를 쓰러뜨리고 오는 길이지요.”
“청귀와 마옥불제를? 자네가 혼자서?”
선진경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그 모습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검존께서 도와주셨지요. 덕분에 녀석들의 의표를 찌를 수 있었습니다.”
“검존께서…….”
깊은 한숨을 내쉰 선진경은 울컥한 표정이었다.
장문인의 사후로 제일 마음고생 했을 사람이 아닌가. 장문인 대리를 맡으면서도 밑 사람들을 위해 굳건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속은 분명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와중 기어이 복수를 이뤄냈다는 사실에 이때까지 겪었던 고충이 한 번에 떠오른 것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일단 이곳부터…….”
쿠구구궁-!
지축을 울리는 진동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장대한 기세를 지닌 고수가 나타난 것이라면 자신 혼자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지평선 끝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보다 곱절은 더 많아 보이는 적들의 군세였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이 숫자도 겨우 막아내고 있는 판국이거늘 상대는 더 여력이 있단 말인가. 족히 이만은 더 돼 보이는 규모에 선진경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안 될 이야기지만, 즉각 철수해야 하네. 뒤쪽으로 지원이 왔어도 적들과 뒤엉킨 상태이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주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지원군의 후발대가 있습니다. 한 시진 안팎으로 이곳에 당도하겠지요.”
“…시간이 문제로군. 내 예상대로라면 한 시진은커녕 일각조차 버티지 못할 걸세.”
“시간이 부족하다면.”
짧게 숨을 내뱉은 주호는 눈짓으로 그에게 이곳을 부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면 됩니다.”
쿵.
힘껏 땅을 박차 뛰어오른 그의 신형이 까마득한 높이까지 솟구쳐 올랐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전장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고, 메마른 대지를 짓밟으며 이곳으로 닥쳐들던 혈천신교의 군세 앞에 내려섰다.
“까마득하구나.”
푹.
신검을 바닥에 꽂아 넣은 주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두 팔에 힘을 가득 실었다.
‘후발대가 당도할 때까지 전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곳에 온 이유가 없다.’
구태여 사지에 오는 것을 자처하며 이곳에 발걸음을 한 모든 이유가 퇴색되어버린다. 주호는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구우우웅─.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땅 위를 굴러다니던 돌멩이와 부스러기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을 때 주호의 기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말 그대로 하늘을 멸하려 뿜어진 기파가 혈천신교의 군세를 휩쓸었다.
주호의 등장에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던 것을 직감하고 있던 몇몇 고수가 솟구쳐 그것을 막아내려 했으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거친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렸다.
“…후.”
주호는 연기가 흘러나오는 두 팔을 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은 격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는 줄어듬이 없었다. 혼원일극신공이 끊임없이 운용되며 그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했고, 이전과 달리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살귀라 불려도 변명할 거리가 없겠군.”
주호는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법 진심을 담아 펼쳐낸 초식은 가히 수백여 명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갔다.
시체 따위는 없었다. 그 영역 안에 휩쓸린 이는 그저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평야 위를 시뻘겋게 물들였을 뿐이었다.
쉬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주호는 신검을 집어 들어 지척까지 닥쳐든 시뻘건 검강을 쳐냈다.
“오랜만이군.”
“…우리가 그리 살갑게 인사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사흉수의 일좌에 있는 궁기는 서늘한 눈빛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냉정하군. 네놈의 수하들이 저렇게 많이 죽었는데.”
“수하?”
궁기는 주호의 말에 피식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저 값싼 소모품일 뿐이다. 몇 명이 죽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냉정한 말이로군.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예전과는 달라.”
사천에서의 싸움 당시 퇴각 신호를 듣고 후퇴하던 그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궁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되었다. 더는 이 싸움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 설사 네놈이 도망친다고 하여도 세상 끝까지 따라가 쳐 죽이리라.”
“간도 크군. 도올이라고 했던가. 네놈의 동료처럼 팔을 하나 잃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무인에게 있어 팔이 잘린다는 것은 목숨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치명적인 일. 하지만 궁기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검을 세웠다.
“없던 육체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는데, 팔 한 짝 정도야 재생시키지 못할까.”
무황에게 죽임을 당한 신마(神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궁기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이리 말해올 정도라면 신마의 부활이 정말로 목전에 다다랐다는 것일 터.
최악의 경우 저 너머에 멀쩡한 몸으로 나타나 자신의 앞까지 나올 수도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알려줄까.”
“시답지 않은…….”
“시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려 네놈들이 섬기는 그 케케묵은 망령과 관련된 일이니.”
자신이 섬기는 신이 모욕당하자 궁기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즉시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뒤이어 나올 말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은 몰랐겠지만, 사실 삼백 년도 더 전에 신마를 갈가리 찢어 놓으신 무황께선 나와 같은 청룡이셨다.”
생전 처음 듣는 비사에 궁기의 두 눈이 부릅 뜨인다. 주호는 짙은 미소와 함께 신검을 세우며 찬란한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피어올렸다.
“이번엔 그 의지를 이어받은 당대의 청룡인 내가 반쪽짜리 신마의 몸을 도륙 낼 차례다.”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가루를 내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