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음.”
선우연은 자신을 향한 주호의 시선에 몸을 움찔했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보라는 것이 명확한바. 그렇기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어디에 말한 적은 없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의 목적지는 운남이다. 쉬이 동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마교도 가지 않았습니까. 중원 안인 운남 정도야 뭐.”
당천유가 슬쩍 말을 보태왔지만, 그는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랑은 상황이 다르다. 마교는 조용히 잠입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운남은 그곳에 진입한 혈천신교의 군세와 싸워 몰아내야 한다.”
“이곳과 같은…….”
“같지 않다. 운남은 전선이 무너져 패퇴가 일상이 되었다.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수십은 죽어나가고 있겠지.”
“…….”
후기지수 가운데로 침묵이 감돈다. 엄숙한 경고가 살갗을 파고들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호의 시선이 남궁연을 향했다.
분명 남궁한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했을 것이다. 운남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번만큼은 사리라고 했을 터.
치기 어린 마음으로 가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너도…….”
-천 언니는 되고 저는 안 되나요?
귓가에 들려온 전음에 주호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들의 이목을 배려해준 듯싶었지만, 주호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복잡할 뿐이었다.
-운남은 정말로 위험하다. 단순히 네 생각만 하지 말거라. 너는 남궁 세가의 후계자가 아니더냐.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어요. 그러자고 지금까지 열심히 수련한 것 아닌가요?
-무르다. 입신지경 혹은 그에 준하는 고수들조차 숱하게 죽어나가는 곳이다. 네가 어찌하려고?
-그렇다면 교관님은 어찌하려고 가시는 건가요?
서로 한 치의 밀림 없는 말싸움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길어지는 침묵에 다른 이들 역시 둘이 전음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러다간.’
남궁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호의 거부는 결국 자신의 걱정에서 기인한 것. 그러니 이쪽에서 강하게 나설 방법이 없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활로를 갈구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머리를 스치는 번뜩임에 두 눈을 크게 떴고, 아련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한테 부끄러운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주호는 경악성을 토해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내상을 입어 주화입마에까지 빠질 뻔했던바. 그렇기에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나중 일을 말하는 거예요.”
“…….”
주호가 생각 이상으로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남궁연은 살짝 주춤하며 말을 덧붙였다.
“…후.”
우려하던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호는 미간을 붙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농담이었지만, 처음으로 동침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 아닌가.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진짜였으면 목숨이 성치 못했겠지.’
전쟁 통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남궁한이 자신을 찢어 죽이려 할 터.
주호가 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궁연은 잘못했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너희의 몸은 너희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각자 속한 사문이 있지 않으냐. 앞날이 창창한 가운데 사지로 걸어가게 하는 것은 너희를 가르친 교관으로서도 못 할 일이다.”
“앞날이 창창한 건 저희 모두를 합친 것보다 교관님이 더 그러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교관님을 운남으로 보내는 것도 저희 사문들이지요.”
당당히 말을 내뱉은 당천유는 뒤이어 선우연의 등을 크게 후려쳤다.
“…컥.”
“그리고 죽을상인 이 녀석을 혼자 보낼 수는 없잖습니까.”
주호는 자신이 무어라 말해도 이들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뒤이어 진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도록 하여라.”
“…교관님은 겁부터 주셔서 문제입니다.”
“맞아요.”
투덜거리는 후기지수들의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 주호는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었다.”
“좋은 스승이네.”
“제자들을 사지에 몰아넣게 되었는데?”
“말을 또 그렇게 해.”
팡!
천우희는 선우연이 그랬던 것처럼 주호의 등을 크게 후려쳤다.
***
“지금이라도 전선을 버리고 후퇴해야 합니다. 도무지 가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
매화검선 선청우는 참모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빗발치는 비보와 시시각각 죽어나가는 이들까지. 장문인의 죽음 이후 운남 전선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해와 사천에선 한 치의 양보 없는 접전이 일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혈천신교가 승기를 잡은 것은 운남이 유일한바. 그들은 이곳이 활로라는 것을 깨닫고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하루. 하루만 버티면 되네. 지금 하남과 연합군에서 보낸 지원군이 지척에 당도하지 않았는가. 저들도 서두른다고 했으니 늦어도 하루면 도착할 수 있을 터네.”
“…어렵습니다.”
“어떻게도 어렵겠는가?”
선청우는 자신이 직접 전선에 나서서 틀어막겠노라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참모의 대답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의 말없이 끄덕여진 고개에 선청우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자신까지 당해버린다면 화산이, 운남 전선이 괴멸되어 버릴 터.
그는 복잡한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네.”
이미 끝자락까지 몰렸다.
최후의 요충지인 이곳에서까지 물러난다면 사천, 귀주, 광서로 가는 길을 내주게 되었다.
선청우는 전선을 위해서라면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형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처음 운남 전선으로 왔을 당시 연합군은 당연히 압도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적들의 전력은 예상의 수배를 웃돌 정도로 강대했다.
더욱이 십패천이라 불리는 세외의 절대 고수들은 중원의 하늘과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던바. 고작 한 번의 교전에서 연합군은 크게 무너졌고, 화산의 꽃이 꺾이고 말았다.
“…후퇴 명령을.”
“알겠습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선청우는 후퇴를 명했고, 참모진은 더없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최후의 저지선이 남아 있었다. 선청우는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불태울 작정이었다.
둥둥둥둥─.
그러던 찰나 적습을 알리는 다급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선청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지휘소가 있는 이곳은 전선에서도 후방에 있었다.
적들이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것은 앞쪽 전선에 무언가 큰 변고가 생겼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가자 화산파의 무인이 달려왔다.
“장로님! 적들이 전선을 우회해서 이곳까지 당도했습니다!”
“우회라면 전선 쪽은 어떤가.”
“그곳은 아직 전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병영 앞으로 수천에 달하는 적해(赤海)의 파도가 물밀듯이 닥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쪽의 이변을 깨달은 앞쪽 전선 쪽에서 급히 뒤로 병력을 물렸지만, 쉽사리 그 불길을 진화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막아라!”
“이곳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화산파의 고수들이 핏발 선 눈으로 연합군의 무인들을 다독이며 검을 빼 들었다.
이윽고 그 물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곳곳으로 거센 피바람이 일었다.
“으아악!”
“팔이, 팔이!”
“이 개새끼들아아아!”
지옥이 따로 없었다.
파죽지세로 밀려가는 전황에 선청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짙은 강기를 뿜어내며 전세를 바꾸고자 했다.
“내가 화산의 검선(劍仙)이다!”
수십의 고수가 순식간에 도륙당한다. 선청우의 활약에 화산파와 연합군의 고수들이 환호하며 함께 사기를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저 멀리서부터 쇄도하기 시작하는 두 개의 커다란 기운에 전장 위로 암운이 드리웠다.
콰앙-!
마치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전장 한 구역이 휩쓸려나간다. 자욱한 먼지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단 두 명의 인영이었다.
‘형님. 나도 여기까지인가 보오.’
선청우는 원수들의 모습을 보며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자신의 제자인 남사일은 장문인의 자리를 승계받기 위해 본산에서 폐관 수련하며 자하 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러니 스승된 도리로서 화산의 이름이 덧없게 지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그 꽃을 활짝 피워 내리라.
“오너라─!”
깊은 내공이 담긴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존 선혁우의 목숨을 앗아간 십패천 중 둘과 맞서 싸우기 위해 기세를 다지는 것이었다.
청귀(靑鬼)와 마옥불제(魔玉佛帝)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선청우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의 도복. 연배를 보아 얼마 전에 죽인 화산파 장문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가.”
“아미타불. 장문인의 사제인 매화검선이 아닌 듯싶소. 자신의 사형을 따라가려는가. 참으로 애틋하기 짝이 없구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맛있어 보이는 군.”
청귀는 제 별호처럼 푸른빛을 띠는 검을 들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 혼자라도 뛰쳐나가 선청우와 싸우려는 모습이었지만, 마옥불제는 손에 쥔 염주를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의 말씀을 잊었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돌파해야 하오.”
“쯧.”
청귀는 진한 아쉬움을 표했지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동시에 나섰을 찰나 선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앞서 말했듯 후회는 없다. 단지 앞으로 있을 찬란한 화산의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만이 나왔다.
우우웅─.
평생을 익혀 온 매화 검법의 정수가 검 끝에서 터져 나온다. 진한 매화 향이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청귀와 마옥불제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에게 쇄도했다.
“…은퇴하시기엔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
적어도 팔다리 하나씩은 가져가리라.
목숨을 도외시한 초식으로 그들에게 치명타를 입히려 나섰을 찰나, 귓가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선청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쉬아아아아악-!
하늘을 전부 뒤덮었을 정도로 강맹한 기세가 그들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손쉽게 선청우를 쓰러뜨릴 줄로만 생각했던 청귀와 마옥불제는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초식을 회수한바. 둘 다 팔을 교차한 채 허무히 뒤로 튕겨 나갔다.
툭.
전장에 내려선 주호가 오만한 눈빛으로 신검을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한 잿빛 기운이 그 끝에 피어오른바. 동시에 뒤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연합군의 지원이 닥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