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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257화 (257/300)

#257화

주호는 남궁한을 바라보았다.

한 번의 패배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 버린 듯했다.

천하제일 남궁의 위상을 자랑하던 검제(劍帝)는 보이지 않았고, 초췌한 몰골을 한 노인만이 골골대며 침상에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

남궁한은 단철량과 더불어 흔들리던 자신의 중심을 잡아준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이리도 나약한 모습을 보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더욱 가슴이 무거워졌다.

“…너무 약한 소리만 늘어놓았군.”

“아닙니다. 귀중한 조언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검제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귀담아들어야지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나저나 마교에서의 일 좀 풀어보게나. 연이에게 조금 듣긴 했지만, 궁금하구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남궁세가를 이끌며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남궁한조차 생소했던 것들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경청했다.

“…운남에 가겠다고?”

“예.”

흐름의 끝은 당연히 현재 이곳까지 이어지는바. 남궁한 또한 단철량과 같이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음.”

남궁한은 그의 생각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침중한 얼굴로 신음을 토해냈다.

“자네가 간다면 어떻게든 수습은 되겠지. 혹여나 무리할 생각은 하지 말게나. 빼앗긴 전선이야 다시 되찾으면 그만이지만, 떠나간 이가 돌아오는 법은 없으니.”

“명심하지요. …그리고 연이가 함께 가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말인가.”

“운남은 현재 중원에서 제일 위험한 지역입니다. 이곳보다 더 심하다고 하지요. 연이가 그곳에 발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진지한 목소리에 남궁한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은밀히 말해두지.”

“감사합니다.”

“아직 여독도 제대로 풀지 못했을 터인데 길게 붙잡아서 미안하군. 가서 쉬도록 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주호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막사를 나왔다.

“후.”

운남에는 후기지수들을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화산파의 일이 있으니 선우연은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이들까지 구태여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저쪽엔 혼돈을 비롯한 굵직한 고수들이 많다. 마교에서처럼 자신이 언제까지고 지켜주기는 힘든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반발이 있을 건 분명하겠지만.’

마음 같아선 천우희도 이곳에 놓고 가고 싶었지만,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벌써 운남에 가겠다고 말해놓은 상황이니 떠날 채비를 마쳐 놓았으리라.

“음?”

어두운 하늘에서부터 새하얀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추위가 들어선 이후 처음 내리는 눈. 기념비적인 날이라 할 수 있겠지만, 경직된 병영의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제자리에 서서 손으로 그것을 받아낸 주호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천우희와 남궁연이 보고 싶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어? 검절 대협 아니십니까.”

화산파의 진영으로 향하니 경계를 서고 있는 무인이 그를 알아보며 포권을 해왔다.

“대사형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안에 기별을 줄 수 있겠소?”

“날씨가 추우니 안에 들어가셔서 기다리시지요.”

주호는 화산파 무인의 배려로 별 무리 없이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장문인인 매화검존이 사망했기 때문인지 모두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던바. 마주치는 이들의 면면에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고, 더러는 그 눈동자 안에 분노가 휘몰아치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좋지 않구나.’

빈 막사에 안내된 주호는 내부를 서성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매화검존은 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입신지경에 오른 것도 화산에서였고, 경지에 오른 깨달음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준 것도 그가 아니었던가.

매화검존은 그가 화산에 도움을 준 것이 많으니 서로 빚진 것은 없는 것으로 하자며 우스갯소리로 말해왔지만, 주호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기다리셨습니까.”

그렇게 얼마를 있자니 선우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화산파 무인과 같이 흑색 무복을 입은 상태로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분향소는 어디 있느냐. 인사를 드리고 싶구나.”

“…문도들과 상의한 결과 전쟁 중에는 분향소를 차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죽은 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요.”

“그렇구나.”

선우연은 그 앞에 털썩 앉고는 지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장로님들을 비롯해 주요 고수들이 전부 운남으로 가버린 덕분에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밑의 이들까지 다독여야 하니.”

“말도 마십시오. 전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다음번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주호는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장 슬픈 것은 스승을 잃은 선우연일 터. 하지만 그는 내색하는 일조차 없이 담담한 기색으로 있을 뿐이었다.

“남 장로님은 어디 계시느냐. 운남에는 없다고 들었거늘.”

“그분이야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지 않으십니까. 전쟁 이후부터 화산파에서 폐관 수련 중이실 겁니다. 아, 이건 대외비니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그러마.”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꼭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스승님의 복수를 하고 싶더냐.”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그의 신형이 굳는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려는 듯했지만, 얼마간 의미 없이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복수하고 싶으냐고 물어보셨습니까?”

마침내 목소리가 새어 나온 것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을 때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평생 부모님처럼 따르던 스승님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때까지 참은 반동이 터져 나오는 듯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교관님을 따라 강호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것은 무공뿐만이 아닙니다. 현실을 배웠고 주제를 깨달았습니다.”

선우연은 소매로 눈을 비비며 헐떡이는 숨을 억눌렀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교관님처럼 고강하지도 못하고 남장로님처럼 차기 후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지요.”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기에 그만큼 보는 시야 역시 넓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운남으로 달려가 스승님을 해한 악적들을 도륙하고 싶은바. 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을 깨닫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 선우연이었다.

‘이게 옳다.’

화산의 대사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곳의 문도들을 잘 다독여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를 살리는 것이었다.

“…….”

주호는 차분한 눈길로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입관 당시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애송이가 어엿하게 성장해 스스로 감정을 죽이고 자신의 능력을 냉정히 분석하며 해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학관으로 묶인 사제 관계라고 해도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주호는 손을 뻗어 여전히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선우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읏, 왜 그러십니까.”

“개관식에 여자를 두고 다툼을 벌여 소란을 피우던 녀석이 맞나 싶어서 그런 것이다.”

“…그건 아무것도 모를 철부지 때 이야기가 아닙니까.”

“고작 이 년 전이지.”

“교관님 저희랑 같은 이십 대 아니십니까. 어떨 때 보면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과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쓸데없는 말은.”

주호는 그의 이마를 툭 치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운남으로 갈 것이다.”

“…….”

“현재 귀주 쪽으로 무림맹에서 출발한 지원 병력이 도달해있다. 그들과 합류해 바로 운남 전선을 도울 생각이지. 듣기로는 화산파의 고수들이 아직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다던데.”

“…사실일 겁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것으로 화산의 명예가 실추되었으니 그것을 수복하려 하는 것이겠지요.”

명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실 다수를 위해 장문인이라는 높은 존재가 스스로 희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칭송될 만한 이야기일 터.

하지만 화산파는 무림의 문파였다. 그 강함에 의심을 받는다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는바. 남은 이들이 전선을 벗어나지 않은 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은 화산이 약하다는 그 의혹을 걷어내기 위함이었다.

“매화검존께는 나도 받은 은혜가 있다. 네가 힘들다면 내가 대신 그 원수를 베어주마. 그러니 그 뒤에서 지켜보고 있거라.”

“교관님께서…….”

선우연은 입술을 꾹 다물며 잠시간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말도록. 그들은 데려가지 않는다.”

“저도 차라리 그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선우연은 만일 누군가 자신을 따라나섰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출발은 내일 동틀 무렵이니 준비해놓거라.”

“예.”

***

“…후우.”

어둠이 짙게 깔린 능선 너머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밝아온다. 내뱉어진 숨을 따라서 새하얀 입김이 그려지는 추위 속에서 천우희는 옷깃을 동여매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로 괜찮겠어?”

“무엇을 말이지?”

“연이 말이야. 적어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분명 따라나설 것이다. 차라리 나중에 한 소리 듣는 것이 더 나아.”

“애틋하네. 그러면 나는 괜찮고?”

“…내가 몇 번이고 설득했음에도 구태여 따라오겠다고 한 건 너였을 터인데.”

“아하하, 농담 한 번 해본 거야.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야지.”

천우희는 웃음을 터트리며 주호의 한쪽 팔에 매달렸다.

오랜 지병인 절맥에서 자유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주호를 대하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사라졌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수명의 한계가 사라지자 은연중에 가로막혀 있던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천후는?”

“그 아이는 문의 고수들이랑 먼저 출발했어.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겠다고.”

“그쪽이야말로 스승 생각이 지극정성이군.”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지.”

천우희가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펴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우연이라고 했지? 화산의 아이.”

“곧 올 것이다. 동틀 무렵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조촐한 구성이네. 그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이랑 오붓하게 가는 건데.”

“선우연 앞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일 건가?”

주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식겁하는 표정을 지을 찰나,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머.”

천우희가 주호를 놀리듯 실실 웃으며 붙잡았던 팔을 놓고는 슬쩍 거리를 벌렸다.

“당신 인기 많네.”

“…후.”

이 자리에 오기로 약조된 것은 분명 선우연 한 명이었을 터. 하지만 천후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의 후기지수 전원이 그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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