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56화 (256/300)

#256화

단철량은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

단호한 의지가 서린 주호의 표정을 보아하니 쉽사리 생각을 꺾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애초에 스스로 운남에 가겠다고 한 것부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서 더 폭탄 발언을 꺼냈다간 맹주인 자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대체 왜 운남에 가겠다고 한 것인가! 어떤 놈이지? 어떤 놈이 자네에게 이야기했는가!”

단철량은 당연히 누군가가 나서서 그에게 은밀히 의사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지(死地)가 될 것이 뻔한 운남에 갈 이유가 없잖은가.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진다면 크게 혼쭐을 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주호를 바라보자,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누군가에게 무언가 들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운남에 가겠다고 한 것인가. 얼마 전에 출진한 지원 부대가 그곳에 당도했네. 아무리 전황이 나쁘다 할지라도 당장 무너질 정도는 아니야.”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리 길지도 않겠지요.”

매화검존을 잃은 것으로 운남 전선을 이끄는 화산파는 큰 피해를 보았다.

지금은 매화검선 선청우가 어떻게든 그들을 다독이며 전선을 유지하긴 했지만, 사천과 달리 운남은 당연히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자네 한 명이 간다고 해서 뒤집힐 전세가 아니라는 말이네.”

냉정한 이야기였다.

입신지경의 고수 한 명이 지니는 무게는 여타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미 뒤집힌 전세는 그 한 명이 발버둥친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부르는데 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저들?”

“운남 쪽에 혼돈과 궁기의 모습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굳이 나설 이유는 없으니 이쪽에 정보를 흘린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가면 안 되겠군.”

“어째서 그렇습니까.”

“자네. 지금 세간에서 자네가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아는가?”

“……?”

대화의 맥락과 맞지 않는 이야기에 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 아닌가.”

단철량은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가락 끝을 타고 옅은 기운이 여리며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흔적을 남겼다.

검신(劍神)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음.”

주호는 사뭇 쑥스러운 얼굴로 뺨을 긁었다.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을 그리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 노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조금 다른 무게를 주는 이야기인바. 주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단철량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이 강호에 떠오르는 샛별일세. 기라성 같이 등장한 신진 고수의 상징이고 장차 이 중원 무림을 이끌어나갈 재목일세.”

“그렇게까지 얼굴에 금칠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칠은 무슨, 현실을 깨달으라는 것이지. 자네는 자네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 한 번 자각해야 할 필요가 있네.”

이야기가 거기까지 다다르자 주호는 단철량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제가 운남으로 가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맹의 사기가 걷잡을 수 없어질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미 수십 일이나 이어진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피해가 크네. 최악의 경우엔 전선이 붕괴할 우려가 있어.”

“그렇게까지…….”

“나는 연합군을 이끄는 자리에 있네.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하는 법이지.”

주호는 입을 다물었다.

단철량이 이 정도로 강경하게 말해온다는 것은 운남 쪽의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다는 것일 터.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건 단 노인으로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니면 연합군을 이끄는 맹주로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둘 다이네.”

“좋습니다. 상황을 정리해보지요.”

주호는 탁자 한 편에 있던 지도를 비롯해 아군과 적의 세력을 표시한 장기 말을 둘 사이로 가져왔다.

“청해는 천마신교가 사천은 연합군과 천마신교 일부. 그리고 운남은 오로지 연합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깃발은 군세를 큰 말은 입신지경의 고수를 상징했다.

지금 당장 파악한 숫자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천마신교의 숫자를 합치는 것에 다다를 정도. 그들이 전부 기지개를 켜면 얼마나 더 많은 깃발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이쪽이 먼저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적들을 산발적으로 맞이해 휩쓸려버렸겠지요.”

주호는 그다음 입신지경을 뜻하는 말을 가리켰다.

“이것 역시 동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만하게.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겠으니.”

단철량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은 불완전하지만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누구 하나라도 빠졌다간 대들보가 주저앉은 전각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릴 터.

대다수의 의견처럼 그를 운남으로 보내는 것이 연합군의 수장으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루. 하루만 더 고민해보도록 하세. 어차피 운남으로 향하는 지원군이 내일 아침에 출발하니.”

“알겠습니다.”

“쉬어두게.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니.”

저 멀리 신강에 다녀온 차다. 마음 같아선 맹주의 이름으로 후한 포상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주호는 막사를 떠났다.

이제 막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된 시각이지만, 병영의 분위기는 한밤중이라도 되는 것처럼 축 가라앉아 있었다.

연이은 전쟁으로 모두가 지쳐 있는 것. 더욱이 부상자들이 모인 병동을 지나왔을 때 그 분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으으…….”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수십에 이르는 이들이 각각의 상처를 지닌 채 모여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주호 역시 그런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차였지만, 주예향과 같은 나이의 청년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딱히 대의를 쫓으려는 건 아니다.’

단철량은 자신이 괜한 공명심에 눈이 멀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려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남으로 가려는 것은 단순히 공을 세우려는 것은 아닐뿐더러, 대의 같은 것을 쫓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는구나.”

재야에 묻힌 자신의 이름을 떨칠 정도의 큰 전쟁. 언제나 바라고 있던 것이긴 했다.

기성세력에 위기가 닥치면 자신은 구세주처럼 나타나 활약을 하는 그런 상상을 곧잘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희망이 넘치는 모습만은 아니었다.

잘못한다면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제자와 지인들이 병상에 누운 이들과 같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운남에 가지 않는다면 전쟁은 더욱 길어지겠지.’

구태여 모습을 드러내어 정보를 흘린 것은 이쪽을 불러내기 위한 것. 자신의 안에 잠들어 있는 신마(神魔)의 반쪽인 적해의 기운을 탐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주호의 발걸음이 잠시간 멈춘다. 이대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려던 찰나, 방향을 바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자리한 진영으로 향했다.

“…엇!”

“가주께선 괜찮으십니까.”

“예. 곧장 안으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이 주호를 알아보곤 곧바로 움직였다.

남궁한이 세외지존이라 일컫는 십패천의 일인인 흑야(黑夜)에게 상처를 입고 패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화산파만큼은 아니었지만, 남궁세가 역시 먹구름이 낀 듯 축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하십시오.”

이곳에 온 직후 후기지수들은 각자 사문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함께 연합군 지휘소로 들어섰던 천우희도 자신이 단철량과 독대를 하자 사신문의 진영으로 돌아가 혼자가 된 상황. 그러니 당연하게도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교관님.”

제일 먼저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에 남궁연이 사뭇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눈가가 살짝 부어오른 것을 보니 제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마음고생을 한 것일 터.

주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녀와 함께 발을 맞췄다.

“가주께선 어떠하시냐.”

“말로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래 보이진 않아요.”

“…그렇겠지.”

무려 검제(劍帝)라 불리던 고수가 누군가에게 밀려 패퇴했다. 감히 자신조차 그 모습이 상상되질 않거늘 본인은, 그를 신처럼 숭상하던 남궁세가는 오죽하겠는가.

“여기에요. 아버님께서도 교관님과 재회하는 걸 크게 반기셨어요.”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큰 막사 앞에 선 남궁연이 조심스럽게 휘장을 들췄다.

그러자 알싸한 약재의 향기가 풍겨 나오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왔는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몇 달 만에 본 남궁한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자신 앞에 선 만인을 찍어 누르던 압도적인 기세는 어디 갔는지 초췌해진 몰골과 함께 살짝 빛이 바랜 눈동자가 힘겹게 뜨였다.

상체는 두꺼운 붕대로 휘감겨 있었고,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것이 아닌지 가슴 언저리부터 피가 번지며 색을 물들이는 듯했다.

“꼴사나운 모습이라 미안하네. 다 늙어서 추태로군.”

“아닙니다. 누가 감히 검제의 공로를 추태라고 폄하하겠습니까.”

“…연아. 잠시 둘만 있게 해주겠느냐.”

“네. 편히들 말씀 나누세요.”

남궁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우자, 남궁한은 마른세수를 하며 침상 옆에 있던 약재를 집어 들어 질겅질겅 씹었다.

“…그건.”

“음? 자네 의학 쪽에도 지식이 있는 건가.”

그가 먹은 약재는 마약을 만드는 데 사용될 정도로 독성이 강한 약초로 만든 것이었다.

보통은 무언가에 희석해서 먹는 것이거늘, 저리 진한 농도로 섭취하다니.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으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기 자존심이 상하지만, 죽다가 살아났다네. 나도 매화검존 그 친구의 전철을 밟을 뻔했어.”

남궁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 가슴을 매만졌다.

일반적으로 중원과 세외의 수준은 한 단계 이상 난다고 여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인식은 무시하지 못하는바. 그렇기에 세외지존인 십패천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흑야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죽여도 죽지 않더군. 팔을 베어도, 다리를 짓이겨도, 목을 베어도.”

검기, 검강, 이기어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가해도 눈 깜짝할 새에 재생하며 다시 이쪽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가 품고 있던 송곳니 또한 이쪽의 숨통을 끊기에 충분히 날카로운 것이었으니.

“심장이 수백 조각으로 잘려 나가고도 죽지 않고 이쪽을 공격해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핑계에 불과하지만, 그 자리에 다른 이가 있었더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걸세.”

“불사(不死)의 고수라니.”

상대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한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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