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55화 (255/300)

#255화

연합군 막사 내부의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언제 끝나게 되는가.

극적으로 천마신교와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지만, 세외로부터 그보다 더 많은 군세가 개떼처럼 쏟아 내렸다.

천마신교와의 전쟁은 중원 무림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수많은 영웅이 강호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의기를 드높였고, 풍운 무림의 꿈을 안은 채 강호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혈천신교를 필두로 한 세외와의 전쟁은 중원 무림의 존속을 위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뿌리부터 자신들과 사상이 다른 족속들. 천마신교는 중원통일을 이루어 마도천하를 이루겠다는 의념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혈천신교는 정화를 천명한 체 후일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다.

지루한 소모전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닥쳐들어오는 이들을 막기 위해선 중원 연합이나 천마신교나 막대한 피를 흘려야 했다.

전 중원의 물자와 인재가 전선으로 모이고 있긴 했지만, 하루하루 죽어나가거나 소실되는 물자가 그보다 많은바. 겨울을 목전에 둔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 재정비하고 싶은 것이 지휘부의 심정이었다.

“마교 측에서 사천 북서부 전선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대천산 본단의 정비가 끝났으니 대대적인 공세로 나서는 듯싶군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전선의 부담이 그쪽으로 조금 더 쏠릴 터이니…….”

다행스럽게도 부정적인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마교는 소교주를 필두로 다시 세력을 일으켰다.

반대파 세력인 마뇌는 혈천신교와 손을 잡은 입장. 만일 그들이 소교주를 몰아내고 마교를 차지했다면 중원은 양방향에서 쏟아지는 대군에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뻔했다.

“검절을 보낸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닌 듯싶습니다.”

“맹주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당가주도 애쓰셨소. 그 이전까지 사천 전선을 이끌어 지대한 공을 세우지 않았소.”

“…나는 별것 하지 않았소이다.”

당정학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정말로 한 것이 별로 없었다. 별동대를 이끌어 마교의 허를 찌른 것은 주호이며, 마검을 비롯한 장로들과 협상에서 활약한 것도 그였다.

“마교의 수복이 끝났으면 슬슬 돌아올 터이지. 어디쯤 왔다고 그러던가.”

“사신문이 맞이하러 갔으니 슬슬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단철량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어깨를 풀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좌중의 분위기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정파 무림 중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제가 세외 절대 고수인 흑야와 일전을 벌이다 큰 상처를 입고 패퇴한 것도 모자라 운남 쪽을 지원하기 위해 군세를 이끌고 갔던 매화검존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검제의 패퇴만 하더라도 연합군이 술렁일 정도인데, 화산파 장문인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 파급력은 가히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반 고수들에게 그들은 천외천의 경지. 높이 하늘에 떠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마저 이 전쟁에서 사망했으니 사기가 멀쩡할 수 있을까.

종래엔 그들을 다독이고자 단철량이 직접 전선에 나서서 세외지존이라 불리는 십패천 중 한 명인 삭월과 일전을 벌여 이백여 초식 만에 그의 목을 쳐내는 것으로 중원 무림의 기상을 입증했다.

물론 그것으로도 떨어진 사기를 전부 다잡을 수는 없을 따름이었다.

“…운남 지역을 어찌할지가 문제로군요.”

공동파 장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교의 청해 전선과 연합군의 사천 전선은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어느 정도 안정성을 되찾았다.

저들의 군세도 무한하지 않을 테니 겨울 동안 어떻게든 틀어막은 다음 봄이 왔을 때 반격을 꾀하면 될 터.

하지만 운남은 지금 순간에도 치열한 격전이 한창 중인바. 매화검존조차 버티지 못하고 스러질 만큼 고된 곳이거늘 누가 감히 그 구멍을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화산파와 남궁세가를 제외하고 여유가 남는 이들이 계시오?”

단철량이 침중한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고수들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 뿐이었다.

매화검존과 비슷한 경지의 고수는 있으나, 그보다 나은 이는 없었다.

섣불리 그곳에 발을 담갔다간 밀려드는 혈천신교의 군세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터. 차라리 사천에 붙어 있는 게 더 안전할 정도였다.

“벌써 운남의 절반이 저들의 군세에 밀렸습니다. 서둘러 결정하지 않는다면 이젠 정말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겁니다.”

무림맹 총군사 제갈경은 엄숙한 표정으로 좌중에 경고했다.

입신지경의 경지는 수많은 고수가 존재하는 이 강호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전장이라는 이름의 대해를 요동치기에 부족함이 없는바. 현재 운남 지역을 다잡기 위해서는 최소 입신지경에 다다른 고수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 검절은 어떻습니까?”

“검절?”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검신(劍神)이라고 불리고 있지요. 차라리 이쪽에서 그 별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운남으로 보낸다면……”

쿵.

단철량은 노기가 깃든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중원을 위해 스스로 마교라는 사지로 걸어 들어갔소. 이제 겨우 막 돌아온 참이거늘, 또 사지로 밀어넣으라고?”

그 말에 입을 열었던 고수는 검절이 단철량의 사제임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제법 나쁜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현재 연합군에 소속된 입신지경의 고수들은 세외지존인 십패천을 맞아 각 할당된 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저들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한지 소규모 교전 가운데서도 십패천에 속한 입신지경의 고수가 흔히 보일 정도. 매화검존이 사망함으로써 그 전력이 오 할대 오 할로 동수를 이뤘기에 운남으로 갈 고수를 차출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딘가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으득.

단철량은 이를 악물었다.

현실적으로 그게 최선책임은 모르지 않는다. 매화검존이 사망한 것은 혈천신교의 군세와 전면전을 펼치려 했기 때문이었으니 최대한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만 끌라는 명령을 내리면 될 터.

하지만 마교에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오지 않았는가. 위천강이니, 제자니 하는 이유를 붙였지만, 사실 주호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 나서주었고, 훌륭하게 그 임무를 완수해냈다.

‘그런데 또 운남으로 가라고?’

만일 자신이 그리 부탁한다면 주호는 난처한 표정을 하면서도, 끝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터.

그것은 그의 온정에 기댄 것이 아니던가. 이미 자신은, 무림은 주호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많이 졌다.

“…차라리 내가 가겠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계신 건 알고 계시지요, 맹주.”

맹주의 말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연합군 내에서도 소수밖에 없던바. 이어진 회의에서 그간 침묵하고 있던 신승은 짤막한 불경을 읊으며 입을 열었다.

“작금 연합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맹주입니다. 차라리 본승을 보내고, 검절 시주를 제 구역으로 담당하시지요.”

“…그것 역시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단철량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연합군의 대표라면 신승은 중원 무림의 상징과도 같았다.

혹여나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매화검존이 사망한 것보다 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번져나갈 터.

뚜렷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단철량의 확고한 반응에 모두 말을 아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스륵.

그때 지휘소 막사의 문이 열렸다.

주요 인사들은 이미 모여 있기에 들어올 이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밖에 없는바.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낸 인영의 모습에 모두 두 눈을 크게 떴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천우희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온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가벼운 포권을 올렸다.

“왔는가, 수고했네.”

“마교와 공조하게 된 것은 검절의 공로가 크다지. 참으로 큰일을 해주었어!”

주호는 내부에 감돌던 이질적인 분위기를 눈치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고, 천우희와 함께 한쪽에 자리해 앉았다.

후기지수들은 각자 사문의 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해산한 상태였다.

“수고했네. 마교 쪽은 어떻게 되었는가?”

단철량은 이미 보고를 들어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질문을 했다.

주호의 공적을 확인하고, 다른 이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작업. 더불어 그를 운남이란 사지로 몰아넣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소교주를 도와 마뇌를 중심으로 뭉친 주요 세력을 전부 와해시켰습니다. 남은 것들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 되는 잔당이지요. 소교주는 내부의 마무리가 끝나는 대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겠다며 약속했습니다.”

“중원 무림이 그대에게 큰 빚을 졌군. 정말로 수고 많았네.”

단철량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무림맹 하위 무사였던 그가 이리 장성해 눈부신 활약을 할지 누가 알았던가.

그러니 더 애틋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찾아오게.”

단철량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다른 안건으로 회의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우인데 그깟 시간 하나 내어주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주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운남 쪽의 싸움이 치열하다고 들었습니다. 매화검존의 사후로도 이쪽 전력에 공백이 없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들었지요.”

“…자네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네. 자, 그러면 다음 안건으로.”

단철량은 불온한 기색을 감지하고는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운남은 명백한 사지(死地)다. 지금 그것을 틀어막고 있는 것은 옥쇄를 각오하고 전선을 선 이들이 흘리는 피인바. 어찌 보면 마교보다 더 거친 전장이 될 것이리라.

그렇기에 단철량은 절대로 주호를 그곳에 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호는 더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운남으로 가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좌중에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더러는 혹시 누군가 주호가 막사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으니.

“현재 연합군에 소속된 입신지경의 고수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인원을 물린다면 그 팽팽했던 균형은 무너져 내리겠지요.”

“…그렇다 한들 자네가 갈 필요는.”

“이게.”

주호는 강한 의지를 담아 단철량을 바라보았다.

“이게 최선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

사형제 간에 시선이 맞부딪친다. 한 치의 물러남 없는 그 진지한 기색에 상황을 지켜보던 좌중은 탄식을 내뱉었다.

‘인중룡(人中龍)이로다.’

대의를 위해 스스로 사지를 감수한다. 이토록 숭고한 일이 또 있을까.

무림의 어른이라 존경받던 고수들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질 따름이었다.

‘운남에 가야 한다.’

주호는 이곳으로 오며 그 의지를 확고히 했다.

혼돈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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