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사락.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오듯 협곡 위에서부터 천우희가 내려섰다.
병마로 피폐했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선명한 혈색이 그 피부 위에 깃들어 있었다.
“우희.”
“오랜만이야. 나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면서?”
천우희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오랜만의 재회를 즐기며 그 품에 힘껏 안기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자제하는 것인지 손을 들어 그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을 뿐이었다.
천우희는 곧 뒤쪽에 있던 자신의 제자를 비롯해 후기지수 일행을 바라보더니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눈앞의 녀석들을 정리하고 이야기하자.”
“그러지.”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협곡 위를 바라보았다.
혈천신교의 교도를 습격한 것은 사신문 휘하의 고수들이었다. 비단 주작단과 청룡단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도 함께 본격적으로 나선 듯했다.
쿵.
그러던 차 천우희를 이어 민머리의 거한이 주호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청룡단 부단주 장산철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움을 드러냈다.
“강녕하셨습니까, 단주님.”
“부단주. 오랜만이군. 도우러 와준 것인가.”
“혈천신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문주께서 개문을 명하셨습니다.”
개문(開門).
물밑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신문의 전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상황에선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기에 미소를 지은 주호는 몸을 돌려 당황한 눈치로 협곡 위를 바라보던 귀안마창을 향했다.
“작전이 실패한 듯한데.”
“…쯧.”
귀안마창이 혀를 차며 창대를 움켜쥐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붙잡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것이었다.
척.
주호의 옆으로 천우희와 장산철이 나란히 섰다.
“백내이 셋은 맡기지.”
“어렵지 않지.”
“그쪽으로 가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둘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을 때, 주호는 누구보다 먼저 땅을 박차고 나갔다.
“어림없다!”
귀안마창이 거세게 마기를 피워 올리며 창을 휘두른다. 양옆에 있던 백내이들이 그를 도와 주호를 공격하려 했지만, 찰나의 차이로 뒤를 따라온 두 인영에 가로막혔다.
“네놈은 나랑 놀아야겠구나.”
“이게 그 백내인가. 두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겠네.”
장산철이 하나, 천우희가 둘을 상대하며 길을 열었다. 그 가운데 신검이 벼락같이 떨어져 내리며 귀안마창에게 닥쳐갔다.
쿵-!
“……!”
창대에 내리꽂힌 무지막지한 충격에 그의 두 눈이 터질 듯 커다래진다. 딛고 선 땅이 움푹 파이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고, 부릅뜬 귀안마창의 두 눈으로 핏줄이 불거졌다.
“이런 것 따윈……!”
비록 지금은 망령으로서 죽은 자의 몸을 빌려 이리되었지만, 자신 역시 한 시대를 오시했던 고수였다.
고작 애송이 한 명 따위에게 발을 묶여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면 옛 지인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을 터.
“하아아압!”
힘줄이 툭 튀어나온 손이 창대를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농밀한 강기가 그 궤적을 따라 솟구쳤고, 마치 폭풍이 닥친 것처럼 난무했다.
“힘 빼기는.”
일 초식 일섬(一閃)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전장의 이목을 잡아끄는 빛무리가 터져 나오자 거센 폭풍이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탁.
창을 놓아버린 귀안마창은 두 팔을 교차하며 가공할 내기를 끌어올렸다.
지축이 흔들리며 미증유의 기운이 좌중을 휩쓸었고, 그의 등 뒤로 세 자루의 창의 형상을 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받아보아라.”
“…그것이 네 진신절기인가.”
오로지 기(氣)로만 이루어진 유형의 마창(魔槍).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에 주호는 그가 어째서 귀안마창이라 불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쉬아아악-!
두 자루의 창이 쏘아졌다.
방심할 수 없는 점이라면 그것은 쏘아진 순간 형체를 지워버렸다는 것이었다.
하늘 위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파공성만이 울려 퍼진다. 그것도 종래에 이르러선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까다롭군.’
주호는 두 눈을 감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기감을 극한으로 날카롭게 벼리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해나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백내이와 싸우는 천우희 그리고 장산철의 움직임이었다.
장산철은 제법 대등한 모습을 보이며 서서히 우세를 점해가고 있었지만, 천우희는 아직 전부 회복한 것이 아닌 듯 발끝이 살짝 무뎠다.
필시 이쪽을 돕기 위해 무리한 것이리라. 그것에 살짝 속이 쓰려진 주호는 뒷덜미를 스치는 모종의 예기에 벼락같이 신검을 내질렀다.
콰아앙-!
무형창과 신검이 충돌하자 자욱한 기파가 주위를 휩쓴다. 바로 동시에 사각에서 또다시 자신을 찔러 온 창날에 주호는 왼손을 말아 쥐었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하늘을 멸하는 주먹이다. 비루한 창 한 자루 정도는 손쉽게 깨부수며 바닥에 무수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무르구나. 그럼 이건 어떻게 막아낼 것이냐.”
언제 지척까지 이르렀는지 귀안마창이 희번덕한 눈으로 마지막 남은 무형창을 손에 쥐며 그의 목을 찔러왔다.
두 번의 연격으로 이미 큰 허점이 드러난 상태. 속절없이 그 공격에 당할 위기였지만, 주호는 입가를 비틀었다.
이 초식 유성(流星)
쉬아아아악-!
그의 손끝을 떠난 신검(神劍)이 하늘에서부터 대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귀안마창은 주호의 두 손이 빈 것과 머리 위로부터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기세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이기어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승부를 보려는 것인가.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귀안마창은 허공을 발로 차는 것으로 몸을 돌려 신검을 쳐냈다.
막중한 경력이 실려 있던 탓에 그 몸이 살짝 밀려났지만, 그것을 반탄력으로 이용해 주호의 목을 베어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주호는 그런 귀안마창을 바라보며 손끝을 날카롭게 펼쳤다.
“손으로 펼치는 건 처음이지만.”
파아앗-!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손 위로 휘몰아친다. 마치 귀안마창의 마창처럼 잿빛 기운이 일렁이며 솟구쳤고 마치 검의 형태를 이루는 듯했다.
청룡검식 경계의검, 만검(萬劍)
귀안마창은 주호를 향해 몸을 날리던 중 세찬 바람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까지 닥쳐온 겨울의 차가움과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감각이 스쳤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늦었을 따름이었다.
저적─.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안마창의 신형이 절반으로 갈라져 내린다. 본래라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겠지만, 역천환혼대법의 영향인지 그것은 순식간에 산화하며 목내이처럼 메말라버렸다.
탁, 쐐애액-!
바닥을 구르던 신검을 주워든 주호는 벼락같이 그것을 내던졌다.
이기어검이 아닌 비검술(飛劍術)의 응용. 하지만 천우희를 상대하고 있던 백내이는 그것을 피해내지 못했고, 순식간에 목을 꿰뚫려 바닥으로 쓰러져 내리고 말았다.
“합-!”
남은 하나 역시 그녀가 발한 백염에 휩싸여 타들어 간바. 그 짧은 사이에 지친 듯 한숨을 토해낸 천우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움직이려니까 조금 힘드네.”
“…괜찮은 것 맞는가?”
“괜찮아. 지병은 완전히 떨쳐냈어. 조금 힘든 건 그동안 몸이 너무 약해져 있어서 그런 거야. 조금만 더 지나면 완벽하게 회복할 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천우희는 손가락을 들어 주호의 뺨을 쿡 찔렀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 가냘픈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켜쥐었을 때, 큰 광음이 터져 나오며 바로 그 옆으로 백내이의 목이 데구르르 굴러 왔다.
“…후우. 어떻게든 쓰러뜨렸습니다.”
“고생 많았다. 어려운 상대였을 텐데.”
“이 정도는 홀로 처리해야 청룡단의 부단주라 할 수 있지요.”
장산철은 어깨를 펴며 자랑스레 자신의 근육을 자랑했다.
“장 부단주, 시끄러워.”
“…예? 예?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될 뻔한 것을 방해받은 천우희가 인상을 쓰며 핀잔을 주자 장산철은 제 덩치에 맞지 않게 울상을 지었다.
“교관님!”
싸움이 끝나자 뒤쪽에 있던 후기지수들이 달려왔다.
그들 역시 후미에서 닥쳐 들어오던 혈천신교 교도들과 격전을 벌인바. 저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것이 제법 우스운 꼴이었다.
“후야!”
“…윽, 스, 스승님.”
천우희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천후를 힘껏 끌어안았다. 신장은 천후 쪽이 더 컸지만, 힘을 이용해 그 목을 꺾어 자신에게 맞추었을 따름이었다.
“보고 싶었다, 제자야.”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완전히 회복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
당천유를 비롯한 남성진이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천우희는 남궁연과 더불어 대단한 미인이 아니던가. 그런 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천후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언니.”
“연아. 나 때문에 저 사람 따라다니면서 고생 많이 했다지?”
“전 별로 한 거 없어요. 진짜로 따라다닌 것뿐인걸요.”
“그래도…….”
천후 다음으로 남궁연을 품에 안은 채 너무나도 어여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천우희의 몸이 흠칫 굳었다.
“……?”
고작 반년 사이 남궁연의 분위기가 몰라보게 성숙해졌다. 이 나이 때는 하루마다 휙휙 바뀐다고 하지만, 이건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휙!
천우희가 날카로워진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딱히 아무런 추궁도 해오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찔린 그는 사후 처리를 하려는 척하며 장산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뭐, 좋아.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하하.”
남궁연도 그녀가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곤 부끄러운 미소를 흘렸다.
“단주님.”
그때 주작단원 중 한 명이 그들의 앞으로 내려섰다.
“위쪽의 정리는 끝났습니다. 일부는 최대한 제압해보려 했지만, 반항이 거센 탓에 사로잡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이쪽의 피해가 적은 걸로 만족하자. 시신은 한데 모아서 전부 태워버려.”
“존명.”
천우희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습격한 혈천신교의 교도들을 모아 큰불을 질렀다.
보통은 방치하거나 땅에 묻었을 터이지만, 이들은 몸에 특수한 약물 처리를 한 것인지 피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필시 주변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에 조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거점으로 이동하자. 여기서 더 가면 연합군 진지가 있는 건 알지?”
“전선은 어떻게 되었지?”
“여전해. 운남 쪽은 거의 괴멸이긴 한데 그 이후에 두껍게 전선을 세운 덕분에 어찌어찌 막아내곤 있어.”
운남의 이야기에 선우연의 몸이 흠칫 떨렸다.
천우희도 거기서 매화검존이 사망한 것은 알고 있던바. 그렇기에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주호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서두르자. 뭐 그리 보고 싶은 얼굴이라고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은 잔뜩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