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53화 (253/300)

#253화

마차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천마신교를 나섰다.

위천강의 선물과 고향으로의 복귀는 그들로서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인바. 그렇기에 다들 살짝 들뜬 눈치였지만, 이내 현실을 떠올리고는 침묵에 잠겼다.

“…….”

선우연은 창가에 자리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고, 후기지수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가급적이면 조용히 하기로 암묵적인 동의를 맺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한 것은 천마신교에서 얻은 깨달음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실전을 비롯해 마동에서의 수련으로 각자 최소 두세 단계는 경지가 발전했다.

아직 해소되지 못한 깨달음이 있었고, 마차로 이동하는 틈은 그것을 녹여내기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신강을 넘어 청해 끄트머리에 도달한 것이 나흘째의 날이었다.

사천까지는 총 열흘이 걸리는바. 전체적인 일정으로 보자면 아직 절반도 가지 못한 것이었다.

원래는 조금 더 빠른 길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두 지역은 한창 격전 중인지라 우회해 가기 때문에 더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닷새째의 날, 마차는 청해 북동쪽에 접어들었다. 이쪽부터는 민간 마을이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남서쪽에 생긴 전선 탓인지 거주민들은 전부 피난을 간듯했다.

“누구 계십니까!”

“텅텅 빈 것 같네.”

숙소를 빌리기 위해 후기지수들이 동분서주했지만, 말 그대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지 꽤 지난 듯 집안 곳곳엔 먼지까지 쌓여 있을 지경. 그렇기에 사람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적당한 객잔에 자리 잡았다.

“괜찮은 식자재가 몇 개 있기에 간단히 요리해봤다.”

그들이 각자 씻거나 정비하고 나왔을 찰나, 주호는 탁자 위로 몇 가지 요리를 내었다.

전부 숙성된 고기나,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자재로 만든 것이었지만, 후기지수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교관님, 요리하실 줄 아셨습니까?”

“그간 여행했을 때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건 그냥 끓이거나 찌는 것들이었지요. 이렇게 본격적으로 하실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약관을 넘은 이후부터 계속 혼자 살았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

“잘 먹겠습니다!”

식사는 대호평이었다.

천마신교에서 나오며 가져온 음식들은 이미 옛적에 다 먹었고, 남은 것은 오래 먹을 수 있는 건식뿐이었기에 음식다운 음식은 오랜만이었기에 다들 빠르게 접시를 비웠다.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가 해주는 음식이라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칼집이 예술이군.”

“하하하.”

모두가 칭찬하며 식사하는 가운데, 남궁연만이 살짝 애매한 얼굴로 음식을 먹었다.

‘나보다 잘하시는 것 같은데.’

그녀는 오로지 검의 길을 걸었지만, 다른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교양 수업으로 갖가지 분야를 섭렵했고, 그 가운데는 요리도 있었다. 남궁세가의 후계자인 그녀가 요리해 먹을 일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제법 재미있었기에 생각날 때마다 만들곤 했었다.

하지만 주호만큼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살짝 속이 쓰린 남궁연이었다.

“입맛에 맞지 않느냐?”

“…아니에요. 맛있어서요.”

주호의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괜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부터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요리해주며 마음을 빼앗았을까. 오늘 밤은 몰래 찾아가 밤새 괴롭혀주리라, 남궁연은 그렇게 결심했다.

***

엿새째의 날.

그들은 첫 습격을 받았다.

사천 진입을 눈앞에 두고 밤을 보내기 위해 잠자리를 만들던 중이었다. 이전처럼 빈 마을이라도 찾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산세가 깊은 곳이라 마을은커녕 집 한 채도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지형을 골라 불을 피우고 잠을 청할 준비를 했다.

그래도 제법 운치가 있던 분위기인바. 다들 모닥불 앞으로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저 밑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이제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나눴다.

“교관님.”

“일류 끝자락에서 이류 정도 되는 이가 일백이다. 명백히 이쪽을 노리고 있구나.”

산길은 구불구불해 똑바로 이어진 것이 없었지만, 그들의 방향은 명확했다.

잠시간 어둠 너머로 찍힌 붉은 점을 바라본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그간 조용히 지냈으니 적당히 몸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희에게 맡기마.”

“예.”

악비산이 낮고 힘찬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엔 짙은 미소까지 서려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이들 역시 그 뒤를 따라나섰고, 곧 어둠 속으로 흩어져 모닥불을 보고 몰려든 불나방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움직였다.

서걱.

달빛이 적은 밤이었다.

어둠 가운데 희미한 검광이 번뜩이면 반드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인적이 드문 산세에는 숨이 끊어진 시신들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핏물은 싸늘한 공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얼어붙었다.

“음.”

주호는 차가운 눈으로 시체 중 하나를 뒤적거렸다. 아무런 표식이 없으나, 상태창에 표시된 정보는 그들의 소속과 목적을 선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전부 처리 끝났습니다.”

“부상자는?”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당천유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에 주호는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았고, 쓰러진 시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혈천신교의 교도들이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데,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사이한 기운은 내가 익힌 신공과는 서로 상극이다. 마기보다 더 요사스러운 것이니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지.”

주호는 고개를 들어 산세를 바라보았다. 차디찬 바람에 나뭇가지가 떨리며 마치 산등성이가 춤추는 모습을 보인다. 밤은 아직 깊었지만, 잠을 자기엔 그른 듯싶었다.

“조금 이르지만 출발하도록 하자. 어찌 되었든 녀석들은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듯하니.”

“예.”

후기지수들은 빠르게 준비를 끝마쳤고, 이내 마차는 다시 산세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말들은 아직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에 움직이기 어려워했지만, 주호가 자신의 단환 일부를 쪼개 물에 개어 마시게 하자 언제 피곤했냐는 듯 생기가 감도는 모습이었다.

“…….”

한차례 혈전을 거쳐 지나왔기 때문인지 마차 안의 분위기가 곤두서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선우연은 문득 마동에서의 기억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환혼향으로 인한 무의식 가운데 겪은 경험은 각자 달랐다.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혈천신교가 습격한 것을 본 것은 자신 혼자뿐. 혹시 자신이 미래를 본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사천에 들어갈 때까지 총 다섯 번의 습격을 받았다.

첫 번째 습격은 정찰대였는지 두 번째 이후로부터는 흑내이가 주류를 이뤘다.

도검불침에 검기를 사용하는 강시. 분명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그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낸 후기지수들에는 상대가 아니었다.

선우연, 당천유, 철대환은 파죽지세로 그들을 쓰러뜨린바. 간간이 나타난 검강급 고수인 적내이는 남궁연, 악비한, 천후가 찍어 누르며 압도적인 강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사천에 진입한 지 이틀 후의 날.

“…이건.”

“좀 많은데.”

“작정하고 나섰나 보군.”

마차는 땅 밑에 설치된 함정에 전복되어 파손되어 버렸다.

안에 있던 그들은 그 짧은 찰나에 마차에서 빠져나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이 주위로 빼곡하게 들어서는 인기척에 표정을 굳혔다.

‘천라지망을 펼쳤군.’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최소 천은 넘는 인원. 전쟁 중인 가운데 또 이런 숫자는 어떻게 빼낸 것인가.

자신은 괜찮지만, 이어진 습격으로 후기지수들의 심력은 꽤 소모된 듯싶었다. 그것은 곧 이쪽의 발목을 붙잡아오는 일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확실하게 자신을 쓰러뜨리거나 사로잡으려는 목적으로 보였다.

“사흘만 더 가면 연합군 끄트머리에 합류할 수 있었을 텐데.”

“출발할 때 서신을 보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원을 바라기엔 어려울 것이다. 전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했으니 후방으로 뺄 여유는 없겠지.”

툭.

그들이 조심스레 상황을 살피며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있을 찰나, 저 앞으로 한 무리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백내이.”

선우연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최소 검강급 위의 고수. 적어도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천후, 악비산, 남궁연 역시 적내이까지는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지만, 백내이는 그보다 훨씬 윗선의 고수. 그렇기에 모두 긴장 어린 표정으로 병장기를 매만졌다.

“쯧, 거추장스럽군.”

모습을 드러낸 백내이는 모두 넷이었다. 그중 제일 선두에 있던 이는 제 몸을 휘감고 있던 하얀 붕대를 찢어버리더니, 새카만 흑의를 입은 남자의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청룡이 누구지? 아, 네놈이로군.”

툭.

기다란 흑창의 끝이 바닥에 닿는다. 같은 창사인 것에 악비산인 한 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주호는 굳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그의 걸음을 막았다.

“귀안마창(鬼眼魔槍).”

“호오. 본인을 아는가? 족히 몇백 년 전의 이름일 텐데.”

사실 주호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다만, 그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에 경계할 따름이었다.

‘최소 마황(魔皇)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다. 이놈들, 작정했구나.’

주호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선우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름 돋는 기시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다들.”

다들, 내가 막을 테니 흩어져라.

쭉 앞으로 나가면 연합군의 진지니 그쪽에서 합류하자.

선우연은 그것을 예상하고 이를 악물었으나, 이어진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내 뒤를 벗어나지 말 거라. 어떻게든 길을 열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뒤는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남궁연과 천후가 의지 어린 눈빛으로 그 뒤를 지키고 선다.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기에 선우연 역시 검을 다잡고 자리를 지켰다.

“애새끼들을 지키면서 나와 싸우겠다고?”

“저쪽을 노릴 틈도 없을 것이다.”

신검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무림맹에서 마황과 싸울 당시 자신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입신지경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무공에 의존해 마구잡이라 할 수 있는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 초식 나찰(羅刹).

서로 손속을 겨루며 실력을 파악할 생각도 없다. 이쪽의 최고 초식으로 단숨에 승부를 본 뒤,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흡!”

대지가 갈라지고 협곡이 요동친다. 전신을 짜르르하게 울리며 쏟아져 내리는 무지막지한 공격에 귀안마창은 헛바람을 내뱉으며 창을 내질렀다.

‘밀린다.’

직감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해일처럼 쏟아지는 이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자신 한 명뿐이 아닌바. 뒤쪽에 있던 다른 세 명의 백내이가 몸을 날리며 자신의 기운을 펼쳐냈다.

파아앗-!

귀안마창을 필두로 백내이의 기운이 응집된다. 그것은 쏟아지는 나찰의 일격을 막아내는가 싶었다.

화륵-!

돌연 허공으로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귀안마창 옆에 있던 백내이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고, 농밀한 마기를 태워버리며 그를 잠시간 무력화시켰다.

“…대체!”

갑작스레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귀안마창이 당혹감에 차 큰 소리를 내질렀을 찰나, 주호 역시 두 눈을 크게 떴다.

백염(白炎).

그 선명한 불꽃의 발현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니.

신검을 거둔 주호가 주위로 고개를 돌리자, 빼곡히 자리를 채운 혈천신교의 교도들 가운데 새로운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 거센 습격을 가했다.

“…이건.”

뒤쪽에 있던 천후 역시 조금 전의 불꽃을 목도했다.

자신이 목표로한, 자신과 아주 닮은 주작신공의 백염. 작금 세상에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자신 말고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툭.

협곡 위로 신도(神刀)를 빼어든 한 인영이 태양을 등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피폐했던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당당한 모습. 등 뒤로 어리는 그 패도적인 기세에 주호의 얼굴이 더없이 환하게 변했다.

“나 없어도 잘 지낸 것 같네?”

주작(朱雀)의 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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