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짹짹-.
천마신교라는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새벽이었다.
일찍 일어난 참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소리가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주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곤 천천히 눈을 떴다.
“…제가 깨웠나요?”
“괜찮다. 슬슬 일어나려 했으니.”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이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남궁연은 그것이 못내 부끄러운 듯 이불 끄트머리를 끌어 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직 잠기운에 취해 있던 주호는 그것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이 따뜻한 기운은 꿈이나 허상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은 주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저질러 버렸구나.’
딱히 문제는 없었다.
나이 차이가 큰 것도 아니었고 그 아비인 남궁한 역시 암묵적으로, 아니 대놓고 빨리 이쪽의 관계가 성사되기를 바라던 눈치였다.
다만, 주호의 마음에 찔릴 뿐이었다. 교관과 관생으로서의 관계이며 자신이 가르치던 관생에게 손을 대었다는 죄악감, 그리고 다른 이들은 필사적으로 싸움 중인 가운데 자신 혼자만이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이었다.
“…….”
그때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꿈틀거리며 남궁연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평소 보이지 않던 헤실헤실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주호를 코앞에서 바라보았다.
“그리 좋으냐.”
“교관님은 제 마음 모르실 거예요. 그간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요.”
“노심초사?”
“저는 여자로서 봐주시지 않으셨잖아요.”
몇 번이고 애타게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정쩡한 대답, 그러면서 천우희랑은 진득한 분위기를 풍겼으니 그녀로서 마음이 비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궁연은 그것을 보복하고자 손톱 끝으로 주호의 가슴을 긁었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그의 피부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어젯밤에 그렇게 꼬집고 긁었는데 상처 하나 남지 않았네요.”
“연지 자국이라면 곳곳에 남았을 터인데.”
“그건 씻으면 금세 지워지잖아요. 저는 뭔가 좀 더 교관님이 제 거라는 표식을 원해요. 그래야 다른 여자들이 넘보지 않죠.”
“네가 옆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여자는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죠?”
그 당돌한 모습에 주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리 낙천적인 상황만은 아닌바. 그렇기에 조심스레 팔을 들어 그녀를 안아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마음은 진정되었느냐.”
“…진정이요?”
“어젯밤에 내게 확신을 달라고 말했었지.”
“아아.”
남궁연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동요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교관님도 그럴 테지만, 저도 아버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뭐? 그럼…….”
“천 언니가 예전에 그랬거든요. 교관님은 이상한 부분에서 우유부단한 면이 있으니 한 번 기회를 잡으면 그 목덜미를 물고 절대 놓지 말라고요.”
주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헛웃음을 흘릴 찰나, 남궁연은 다시금 그의 몸을 안아오며 속삭였다.
“교관님도 좋았잖아요? 어린 제자에게 손댄 주제에.”
“…그건.”
“뭐, 그렇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어요? 남녀 간의 사이인데. 유혹한 저나, 넘어온 교관님이나 다 거기서 거기지.”
할 말이 없어진 주호는 그저 웃음만을 흘렸다.
남궁연은 한참을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 뻐근하면서 나른한 기분을 여유롭게 만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점차 밖을 돌아다니는 인기척이 늘어나자 아쉬운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슬 제 방으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다른 이들도 깨어날 시간이니.”
“그렇구나.”
남궁연은 곧 침상 밑으로 어지러이 흩어진 의복을 주워 다시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누운 자세로 그것을 바라보던 주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이들 앞에선 자중하거라. 아무래도 분위기가 있으니.”
“저도 그걸 말씀드릴 참이었어요. 예전에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천 언니를 바라보던 표정이 그렇게 칠칠치 못했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
한 마디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네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것 같다.’
사신문에서 요양하고 있을 천우희를 생각하며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식사 때 뵈어요. 몸에 묻은 자국들 닦는 건 잊지 마세요.”
남궁연이 방을 떠나가자 내부는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주호는 그 여운이 주는 분위기에 잠시간 누워 있다가 그녀의 당부대로 몸을 씻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전날의 피로를 날려버리고 아침을 맞이할 찰나, 침대 위에 선명히 남아있는 정사의 흔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먼저 정리해야겠군.”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진 듯했다.
***
“…소저. 어제보다 안색이 나아 보여서 다행이구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당 공자.”
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이었다.
당천유는 전날 검제의 부상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남궁연의 모습에 다행을 느꼈다.
하지만 선우연은 식사에 참석하지 않은 상태. 듣자 하니 이른 시간부터 연무장에 가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고 했다.
“…저 친구가 걱정인데.”
당천유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려를 드러내었다.
스승이 별세했다.
선우연에게는 부모와 다름없는 이로, 어지간한 사제 관계보다 더 각별한 사이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고작 하룻밤만으로 상쇄하기 힘든 것이 분명한바. 가능만 하였다면 돌아가는 것을 며칠 미루고 싶지만, 중원에서 속속히 들어오는 소식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교관님께서 어젯밤에 찾아가 위로해주셨다고 하니 선 공자도 나름대로 위안을 얻었을 거예요. 그래도 당분간은 지켜봐야겠죠.”
“그러겠소. 소저께도 부탁드리오.”
“당연히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식사 중이던 주호는 슬쩍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남궁연과 시선이 마주쳤고, 옅은 미소와 함께 두 눈을 가늘게 뜨는 그 모습에 몸을 살짝 움찔했다.
어째서인지 하룻밤 만에 분위기가 더 성숙해진 듯하다. 그리 만든 것이 그 본인이었지만, 왜인지 적지 않은 배덕감이 들었다.
식사를 끝낸 그들은 곧 떠날 채비를 마쳤다. 물론 지금은 아침 식사를 거른 채 땀을 흘리며 수련에 매진했던 선우연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함께 했다.
주호로부터 제 친우들이 떠날 예정이라는 것을 들은 위천강도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그들을 찾아왔다.
“자, 이것들 하나씩 가져가게.”
다만, 그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수하들을 시켜 후기지수의 인원수에 맞게 묵직한 꾸러미를 옮겨왔고, 그들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이건?”
“그리 고생해놓고 빈손으로 떠나보내면 섭섭하지.”
철대환은 슬쩍 그 안을 살폈다.
각종 영약이며 설삼으로 보이는 뿌리도 몇 가닥도 담겨 있었다. 재화로 치면 족히 몇천, 아니 몇만 냥은 호가할 양에 혀를 내두르자, 위천강은 씩 웃으며 당당히 가슴을 폈다.
“의리 하면 또 위천강 아닌가. 두둑하게 담았으니 중원에 돌아가서도 날 잊지 마시게.”
“그렇지. 하남 풍류 공자의 명성이 어디 가겠나.”
“으하하, 한동안 배고플 일은 없겠군.”
당천유와 악비산이 신나는 표정으로 웃음을 토해내며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없느냐.”
“…교관님도 필요하십니까?”
“그냥 해본 말이었다.”
움찔하는 그의 모습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위천강은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씩 웃으며 당연히 예상했다는 식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보랏빛을 띈 손바닥만 한 작은 패 위로 魔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물건. 위천강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각(魔角)이라 하는 패입니다. 지닌 것만으로 본교의 마인에게 대접받으며, 사용한다면 장로급 마인에게도 단 한 번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명령까지?”
“예. 당연히 신교의 이득에 어긋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러한 것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것이면 들어주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마각이니까요.”
“네게 필요한 것이 아니더냐.”
위천강은 실질적으로 반쯤 교주에 자리에 올랐다. 남은 것은 그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 그 가운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명령권인 마각이 필요할 것 아닌가.
“교주의 권력은 절대적입니다. 그 대리인 제게 거스른다는 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 지금 상황에서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감사히 받겠다.”
주호가 마각패를 받아 품에 넣자, 위천강은 제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중원의 전황은 자세히 파악하고 있네. 신교도 공동전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했고 무리 없이 연합군과 손을 잡고 싸워나갈 것이야. 나도 이쪽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합류하겠네.”
“머지않아 보겠군.”
“그러니 그때까지 다들 무사하길 바라네.”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일단락됐을 무렵, 주호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가볼까.”
마차는 위천강이 준비해주었다.
마음 같아선 신교의 휘장이 들어간 가장 화려한 것을 주고 싶다고 했으나, 중원까지 그런 걸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외관은 지극히 평범한 것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천장이나 벽, 그리고 바닥까지 철제로 둘러싸여 있어 도검 정도는 가볍게 막아내고, 잘하면 검기까지 버틸 수 있는 내구도를 지녔다.
네필의 말이 힘차게 달려나간다. 천마신교 내성을 벗어난 그들은 곧바로 외성의 대문으로 접어들었고,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그 사이로 빠져나갔다.
“…….”
위천강은 저 멀리 사라져가는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신교의 소교주는 지엄한 위치였다. 그렇기에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일 관계란 것이 영영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중원에 나가고, 정천 학관을 다니고 그의 인생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칙칙했던 잿빛 하늘로 색이 깃들었고,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비록 서로 걷는 길이나 이념은 달라도 제 목숨을 걸고 이쪽을 도와주러 와주다니.
위천강으로서는 평생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쓸쓸하십니까?”
곁에 선 수하 중 한 명이 물었다.
흑영대주 강위혁이 제 주인의 그런 마음을 눈치채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쓸쓸하냐고?”
잠시간 침묵과 함께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위천강은 그 물음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수라의 형상이 새겨진 검은 장포를 펄럭이며 몸을 돌리더니, 멋들어진 모습으로 수하들에게 말했다.
“무릇 지존이라 함은 항상 고독함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지. 돌아간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니.”
“존명.”
강위혁을 비롯한 수하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천마(小天魔) 위천강.
스물한 살의 나이로 마도제일 천마신교를 수중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