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깊은 밤이었다.
반으로 기운 달을 바라보던 선우연은 메마른 눈을 감으며 폐부를 쥐어짠 한숨을 내뱉었다.
매화검존께서 별세하셨다.
한나절도 더 전에 들었던 그 말은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맴돌며 심기를 어지럽혔다.
마음속으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며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호는 이런 말을 허투루 할 사내가 아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쉽사리 스승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일. 오죽했으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업무 중인 위천강을 찾아가지 않았나.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위천강은 머뭇거리는 태도로 서신을 넘겨주며 면목없다는 표정과 함께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을 옥죄어왔으며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이 밀려왔다.
누구도 잘못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버린 것이 아니던가.
자신도, 자신의 스승도.
가득 찬 술잔 위로 파문이 일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입에도 대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한 병 구해온 것이었지만, 막상 따라 놓으니 손이 가질 않았다.
“마음이 심란하겠구나.”
“…….”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연이 움찔했다.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그의 방문을 눈치채지 못했을 터.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아니다. 학자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인륜이라 표하지만, 그것 역시 천륜에 가까운 것이다. 누군가의 것을 배우고 물려받는 것이 어찌 인간의 일인가.”
“…….”
스승이란 단어를 듣자 선우연은 겨우 추슬렀던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내했으나, 곧 등을 쓰다듬어주는 따스한 손길에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하면 교관님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주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머지않았다. 마동에서도 절정의 벽을 허물고 훌쩍 뛰어올랐지 않느냐. 그러한 말들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다.
“제가 교관님처럼 강했더라면 누구도 잃지 않고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화산의 소신룡이라 불리는 기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어 일그러진다. 질끈 깨문 입술에선 피가 배어 나왔고, 뚝뚝 떨어진 그것은 투명한 술잔을 물들였다.
“죄송해요. 실언이었습니다.”
“아니다. 마땅히 들 법한 생각이니.”
주호는 그에게 하고자 생각했던 조언과 격려를 모두 고이 접어 마음 한구석에 넣어두었다.
선우연은 힘들어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고통에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오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버텨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가득 채워지기만 한 채 비워진 적이 없는 술잔이 그것을 의미했다.
“조금 예전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그 옆에 걸터앉은 주호는 팔짱을 낀 채 과거를 떠올렸다.
“스물하나. 딱 지금의 너와 같구나. 그때의 나는 흑도에 몸을 담아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지.”
“…흑도 말입니까?”
주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우연이 귀를 쫑긋한 채 관심을 보내자, 그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라곤 시장에서 낭인에게 전재산 몇 냥을 주고 산 삼류 검법과 심법이 전부였다. 피나는 노력을 해봤자 그것으로 얼마나 성취를 이룰 수 있었겠느냐. 동네 파락호 정도는 가볍게 찜쪄먹었지만, 진실로 강호에 발 한쪽이라도 담근 진짜배기 사이에서는 아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지.”
“삼류 검법이라니.”
선우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검강을 흩뿌리고 이기어검을 사용하는 그에겐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표정을 본 주호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다. 지금의. 아니, 정천 학관에 입관 당시에 너희와 싸운다고 할지라도 삼초식 이내에 결판이 나겠구나.”
그걸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은 제대로 검조차 뽑지 못할 것이며 그대로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 추한 모습으로 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내가 자란 주가장은 상계 가문이다. 가문 대대로 상업을 해왔고, 본래라면 나도 마찬가지로 그 일을 물려받아야 했지.”
하지만 자신은 무인을 동경했다.
무공을 배워 강호를 주유하고, 종횡하며, 거닐고 싶었다.
때로는 사람을 만나 인연을 쌓고, 때로는 악적을 만나 목숨을 건 싸움을 치르고, 때로는 운명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하고.
“지금의 너희와는 출발선부터 달랐다. 딱히 자랑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니, 자랑이 되는 건가? 하여튼 그렇게 흑도를 전전하며 강호 경험을 쌓았지. 비록 원하던 것이 아니었어도 스스로 선택했으니 내가 감당해야함이 옳지 않겠느냐.”
“선택…….”
“그래. 나는 돈과 숫자에 파묻혀 살아가느니 차라리 똥물이라도 강호에서 구르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지.”
“…이야기가 너무 비약된 것이 아닙니까. 삼류 흑도에서 지금의 교관님은.”
“하하, 중간 과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이 중요한 것이라는 소리다. 그 누가 삼류 흑도의 잡배가 입신지경의 고수가 될 줄 알았느냐.”
“기연이라도 얻으신 것 아닙니까.”
“얻었지. 아주 좋은 기연을. 그리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예?”
선우연의 의문에 주호는 씩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나라는 기연을 만나지 않았느냐.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작금 후기지수 가운데 누가 감히 너희와 대적할 수 있을까.”
“아하하하.”
선우연은 큰 웃음을 토해냈다.
설마 주호가 이런 말을 해올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평소 보여주었던 성격은 절대로 이러하지 않았으니.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는 그의 모습에 주호는 아무래도 너무 웃는 것이 아니냐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맞지요. 학관 초와 지금을 생각해보면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네 경지와 학관 초의 나와 비슷하구나. 어찌 보면 나을 터다.”
“그렇습니까?”
거기까지는 예상 못한 듯 살짝 눈이 커진다. 그 놀람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나보다 낫구나. 사문도 탄탄하고,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왔으니 엇나갈 일도 없겠지. 이대로만 간다면.”
“저는 그래도 교관님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리 택할 겁니다.”
“…글쎄.”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흑도의 삶이나 그 치열함은 그들 역시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두컴컴한 비동에서의 삶은, 그 삼 년간의 지옥 같았던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힘들겠지.’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주호는 굳이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선우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굳이 남의 뒤를 쫓을 필요는 없다. 너는 너대로 빛나고 있으니.”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하십니다. 이러니까 남궁 소저가 빠져들었나.”
딱!
“억!”
“거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그렇잖습니까. 제 첫사랑을 빼앗아 가셨으면 이 정도 놀림은 감수하셔야지요.”
주호가 기가 찬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선우연은 환(幻)의 묘리까지 섞으며 상체를 비틀었다.
딱!
물론 주호에게는 통하지 않을 따름이었으니. 다시 한 번 그 이마를 가격한 주호는 짧게 한숨을 토해낸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돌아갈 예정이다.”
“…중원으로 말입니까.”
“복수해야지. 네겐 스승이셨고, 내게는 큰 어르신이었던 분이시다.”
주호는 화산에 적지 않은 은혜를 입었다. 입신지경의 단서를 얻게 해준 것도, 그 위에 올라 경지를 다듬어준 것도 바로 매화검존이었다.
남사일에게도 여러 은혜를 입었고, 그 스승인 선청우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다.
기꺼이 자소단을 내어준 덕분에 당소혜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슬퍼하는 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그 원수를 어찌 쓰러뜨릴지 궁리하여라.”
“…하지만 상대는 입신지경의 고수입니다. 제가 감히.”
“입신지경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다. 내가 그 목을 끊어낸다면 달라붙어서 팔다리 하나 정도는 난도질할 수 있지 않으냐.”
“교관님과 함께라면 충분하지요. 좌수검이든 우수검이든 팔 한 짝은 제가 아주 난도질해놓겠습니다.”
선우연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오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아직 그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 터. 다시 화산에 돌아가거나, 다른 문도들을 만나면 그 슬픔이 점화될 터다.
하지만 그것을 잊는 데 분노만큼 좋은 재료는 없던바. 주호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방을 나섰고, 자신의 침실로 되돌아왔다.
“……?”
방문을 열려던 주호의 손이 멈칫했다.
선우연의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집중해있느라 신경이 흐트러졌지만, 그 앞에 다가서자 안쪽에 누가 먼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슬쩍 열린 틈새에서 보이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그대로 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고, 멍하니 있던 남궁연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교관님.”
“내 방인데 네가 놀라면 어떡하느냐.”
“선 공자를 보고 오셨나요?”
“그래. 격려해주니 많이 기운 차린 듯싶다. 아직 마음은 어지럽겠지만, 언젠가는 떨쳐내야 하겠지.”
“…그렇군요.”
주호는 조용히 대답하는 남궁연의 표정에서 불안함과 걱정을 읽었다.
검제 정도 되는 고수가 그런 크게 다친 것은 예삿일이 아니란 것일 터.
선우연이 스승을 잃은 것처럼 그녀 역시 자칫 잘못했으면 그럴 뻔했다는 것이었다.
“밤이 깊었다. 낮에 말했다시피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진정했으면 침실로 돌아가…….”
“무서워요.”
툭 튀어나온 그 말이 주호의 사고를 멈추게 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남궁연은 조용히 제 옆자리에 시선을 보냈고, 주호는 문을 닫으며 그곳에 다가가 앉았다.
“손, 잡아주실래요?”
“그러마.”
남궁세가에서 함께 외출할 때 손을 잡고 나선 뒤로 처음 잡는 것이었다.
주호는 선뜻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말 못할 묘한 기류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내일을 생각한다면 강제로라도 침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울적한 표정을 보아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아. 가주께선 무사하실 것이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분께서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알아요. 하지만 계속 좋지 않은 생각만 떠올라요. 선 공자는 스승을 잃었는데, 이기적이죠?”
“당연하다. 사람 일이란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부친을 걱정하는 마음인데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한 줄기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주호의 마음이 철렁했다.
남궁연은 아무리 혹독한 수련 가운데서도 단 한 번조차 운 적이 없었다.
일전 자신에게 감정을 호소하며 그랬던 적은 있었지만, 그건 수련이 아니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이리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심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는 이야기였다.
“저, 저 두려워요. 아버지께서 어떻게 될까봐.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누군가가 잘못될까봐…….”
남궁연은 애달픈 얼굴로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주호의 손을 붙잡은 것에 힘을 더하며 간절한 시선으로 말했다.
“부디 저에게 확신을 주세요.”
주호는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금 길어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