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주호 일행이 마교에서 활약하고 있을 무렵, 중원에서도 여러 일이 있었다.
먼저 세외의 세력이 준동했다.
혈천신교의 휘하로 들어간 포달랍궁을 비롯해 수많은 남만의 세력이 군세를 일으킨 것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중원 각지에 숨어 있던 변절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탓에 연합군 역시 큰 피해를 보았다.
사도맹은 이미 한차례 자신들의 암 덩어리인 사도칠패를 축출해냈다.
그럼에도 거점이 함락되거나 주요 인사가 암살당하는 타격을 받았고, 그들의 행보에 제동이 걸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무림맹 역시 주호의 도움을 받아 맹 곳곳에 숨어든 변절자들을 색출해냈다.
하지만 중원 곳곳에 흩어진 그들을 전부 발견해낼 수는 없던바. 그렇기에 뿌리 조직이 무너져 손발이 잘렸다는 비유가 과장이지 않을 정도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보통이라면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보지 않았겠지만, 변절자들은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싸움인 것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은 채 몸을 던졌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그것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없던 가운데 일어난 적들의 총공세는 심한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마검과 권마를 필두로 한 군세가 위천강이 마교를 수복하는 것보다 한 발자국 먼저 청해의 세력을 흡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연합군과 대대적인 휴전을 체결했고, 세외 세력이 준동하자마자 각자 점거하고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연합 전선을 펼쳤다.
역설적으로 마교의 군세는 배신자들로 인한 피해가 적었다.
이유인즉, 그럴 기미가 난다면 단호히 피의 숙청으로 갚아주었기 때문이었으니. 설사 억울하게 휘말렸다고 할지라도 칼 같은 대응 덕분에 지령을 받은 이들조차 숨죽이며 몸을 낮출 지경이었다.
그 가운데 마교와 손을 잡자 연합군 내부 일부가 보인 반발은 당연하였다.
현재 천마신교가 점거하고 있는 청해는 본디 자신들의 것. 터전을 빼앗긴 상황에서 그들과 휴전하고 공동 전선까지 맺는 것이 맞는 일인가.
더러는 자신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며 눈물을 뿌려댔지만, 지평선을 까마득하게 메우며 진군해오는 세외 세력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세외에서 올라온 군세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제일군은 천마신교가 위치한 청해로 쏟아졌다. 족히 오 할은 더 많은 인원으로 싸움이 일어나자 후끈한 피 내음이 사흘 밤낮 동안 꺼지지 않고 전장 위로 감돌았다.
제이군은 중원 연합이 자리 잡은 사천으로 향했다.
그들 역시 천마신교처럼 큰 피해를 보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반복했고,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도 이때까지 쌓인 피해보다 더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관측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제삼 군은 모두의 부정적인 예측대로 운남으로 향했다.
청해와 사천은 그래도 지난 전쟁으로 인해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되있던바. 하지만 운남은 텅텅 비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까지 전부 연합군에 참전하기 위해 사천으로 가 있을 지경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연합군 수뇌부는 급히 인원을 편성했고, 그 수장으로 임명된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존 선혁우를 비롯해 수많은 고수가 급히 운남으로 내려갔다.
변변찮은 병참도 구축되지 않았고, 허허벌판에서 맨몸으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다소 피해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리 비관하지만은 않았다.
‘세외 무림의 수준은 중원 무림보다 몇 단계 낮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 내려온 정설이었으며, 수없이 반복된 시간 가운데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번 역시 막대한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은 초고수들 간의 격차에도 통용되는 이야기로, 세외 무림의 십대지존을 일컫는 십패천(十覇天)도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에 비하면 큰 손색이 있다고 평해졌다.
그렇게 양측의 전선이 부닥쳤고, 가슴 가득히 팽배했던 자신감과는 다르게 중원 무림은 큰 손실을 보며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후미를 자처한 매화검존이 십패천 중 둘의 협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존 선혁우.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초고수였다. 오랜 시간 화산파를 이끌어 왔으며, 그 강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그 비보를 받은 연합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동시에 사천 전선에서 십패천의 상위 고수로 꼽히는 흑야(黑夜)와 생사결을 벌인 검제(劍帝) 남궁한이 큰 상처를 입고 패퇴하며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세외 무림의 수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파죽지세로 밀려버린 뒤였다.
마교는 청해 서남부 일대를 포기하고 물러섰다. 연합군은 세외 무림이 사천 남부의 진입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었지만, 운남 북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사천 지역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 비보는 신강에 와있는 주호 일행에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툭.
“…예, 예? 제가 지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수련 이후 느긋하게 점심을 먹던 선우연은 침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온 주호의 말에 젓가락을 놓쳤다.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고 짧게 숨을 토해낸다. 그 말을 입에 담은 대상이 주호가 아니었더라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터인 분위기였다.
“…매화검존께서 별세하셨다.”
하지만 주호는 냉정히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전했다.
어찌 되었든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충격이 크겠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천에 계신 스승님께서 왜 별세하셨단 말씀입니까. 중원 무림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선우연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호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그는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혈천신교의 세력이 세외에서 준동했다. 포달랍궁과 남만의 무수한 조직들이 그 밑에 합류했고, 중원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중이라고 보고가 들어왔다. …매화검존께선 운남 쪽의 공백을 틀어막기 위해 출전하셔서 적들과 싸웠지만, 세외 무림의 지존이라 불리는 십패촌 중 둘의 합공을 받고…….”
주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느덧 자신의 옷깃까지 올라온 선우연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손을 들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자 선우연의 혈도를 짚어주려 했지만, 그들도 이제 냉정한 현실에서 보호받아야 할 시기는 지났다.
남을 잃는 아픔은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수도 없이 있을 것. 주호 역시 매화검존과 적잖은 인연이 있는 사이였기에 가슴이 아팠지만, 생사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서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순식간에 심력을 소모했는지 탈진한 선우연의 몸이 미끄러져 내린다. 주호는 그를 받아들며 뒤에 있던 악비산에게 눈짓했다.
“그를 침실로.”
“…예.”
악비산은 곧바로 제 친우의 몸을 부축하곤 자리를 떠났다.
남궁연은 지금까지 수많은 시선을 받아왔다. 그 중 주호의 시선만은 단 한 번도 기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바. 오히려 자신을 더 많이 바라봐줬으면 했지만, 지금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검제(劍帝)께선…….”
다시금 장내로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 남궁연은 두 손을 꽉 쥔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십패천 중 흑야(黑夜)와의 생사결에서 큰 상처를 입으셨단다.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겠으나, 당분간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남았다고 하더구나.”
“…하.”
짤막한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부상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긴 했으나, 살아 계신다면 그것으로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주호에게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문파나 지인들이 어찌 되었는지 물어왔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외에는 없지만, 아직 보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철대환이 무거운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출신인 사도맹도 큰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그건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들과는 연을 끊은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거의 실신할 듯한 모습으로 악비산에게 부축받아 방으로 돌아간 선우연 쪽이었다.
“돌아가야지. 아마 그 즉시 전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니 다들 단단히 각오하거라.”
천마신교와의 전쟁은 서로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 전투로 이루어졌다.
서로 별동대의 획책을 꾸리고 틈을 찌르기 위해 깊숙이 날을 찔러 넣는 것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전쟁의 양상은 앞뒤 가리지 않고 퍼붓는 전면전에 가까웠다.
심지어 이쪽은 곳곳에 숨어든 변절자를 전부 색출해내지 못해 방심한다면 뒤에서 칼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우연이가 걱정입니다. 스승님이 저리되어서.”
“그렇군요. 하루이틀에 털고 일어날 상처가 아닐 텐데.”
당천유의 말에 천후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근래 스승을 잃을 뻔했던 기억이 있기에 선우연이 어떤 심정일 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평생 자신의 곁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사라지는 절망적인 감각. 시야는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좁아지고, 마음은 그 무엇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조급해졌다.
주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스승을 잃었을 터.
“밤이 되면 내가 잘 이야기해보겠다. 너희도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해놓도록.”
“…내일 바로 가는 겁니까.”
선우연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그 말에 주호는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저쪽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다.”
“그 정도로…….”
위천강에게 들어온 보고에는 상당히 굵직하거나 저명한 고수들의 이름이 다수 적혀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사망하는 대부분이 이, 삼류 무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전황은 정말로 심각한 듯했다.
십패천(十覇天).
하늘 위에 우뚝 선 열 명의 지존.
비록 협공이지만 매화검존을 죽이고, 검제를 패퇴시킬 정도라면 그들 모두 입신지경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도대체 그들의 저력은 어디까지인가.’
아직 본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는 것인가.
혈천신교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사흉수, 칠혈성 등등 수많은 고수를 거쳐왔고, 그중 상당수가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이만한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참으로 소름 끼칠 노릇이었다.
대체 그들은 언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주호는 그들의 대계를 세 단계로 구분했다.
먼저는 사흉수를 필두로 중원과 마교 내부에 잠입해 안쪽에서부터 체재를 흐트러트리고, 두 번째는 양측의 갈등을 고조시켜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바로 무림 대전인바. 주호와 단철량을 비롯해 그 저의를 아는 이들이 최대한 막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에 따라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세외의 준동.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피폐해진 중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더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다면.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