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49화 (249/300)

#249화

“…어?”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위천강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잠깐 사이 바로 앞에 있던 혼돈의 신형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교관님?”

“되었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니.”

“…하긴 그렇죠. 교관님이 제가 죽는 걸 감수하고 싸우겠다고 하셨다면 오줌이라도 지렸을 겁니다.”

위천강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자, 주호는 이전까지 깃들어 있던 긴장감을 지운 채 쓴웃음을 지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답지 않은 언사로구나.”

“권위적으로 찍어 누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다운 신교를 만들어 보려고요.”

위천강으로서는 가벼운 농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은 주호의 감성을 살짝 건드렸다.

‘사람다운 신교라.’

사뭇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손사래 칠 이야기였을 터. 하지만 주호는 위천강이라면 너덜너덜해진 마교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되었다.

“교관님?”

“아니다. 다른 이들과 합류하도록 하자꾸나. 저쪽도 얼추 끝난 듯싶으니.”

주호는 창밖으로 천화각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치열하게 싸우던 전장의 분위기도 혼돈이 사라진 것을 기점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 발악하던 이들도 피 묻은 대지 위로 쓰러져 내렸고, 살아남은 이들은 피로와 고통에 찌든 모습으로 신음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교관님!”

이쪽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남궁연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검을 쥔 손을 흔들었다.

후기지수들과 함께 막 마지막 남은 잔당을 처리한 것인지 그 주변엔 시체의 산이 즐비하다. 오죽했으면 근처에 있는 마인들이 그녀가 곁을 지날 때마다 몸을 움찔하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하.”

일취월장한 제자들의 모습에 주호는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서 살짝 깬 듯한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던 위천강은 주호를 향해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그리 좋으십니까?”

“좋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 어리숙하던 제자들이 저리 성장했다. 교관의 위치에서는 이보다 더 흐뭇할 일은 없는 것이지.”

“…그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뭐 교관님께서 만족하신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위천강은 짧게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곤 주호 앞에 서서 진지한 기색으로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본교를 대표해 소교주 위천강이 검절 대협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신교는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멋들어진 외모와 함께 창밖에서 비춰 온 햇살이 어우러져 사뭇 무게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이런 진중한 태도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애초에 흘러갈 듯 가벼운 분위기 또한 위천강의 강점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주호는 창가에서 몸을 뗀 다음 위천강에게 화답하듯 포권했다.

“부디 그 말씀이 지켜지길 바라오.”

더없이 정중한 경고였다.

자신들은 만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중원에서부터 이곳 신강까지 위천강을 돕기 위해 나섰다.

비록 그 이면에 여러 공통의 목적이 곁들여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주된 이유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인바. 위천강 본인 역시 그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만일 교관님과 이들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일전의 장로 두 명이 닥쳐온 별동대조차 막아내지 못해 세력이 무너지고 끝에선 비참한 꼴을 면치 못했으리라.

“…거, 너무 살벌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언제 한 입으로 두말한 적이 있다고.”

“너는 없겠지만, 조직을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지 않느냐. 천마신교의 이익을 위해 네 사사로운 정 따위는 포기해야 할 날도 오겠지.”

“그야 뭐, 소교주 아닙니까. 이 소란이 일단락되면 일단 표면상으로라도 교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고요.”

“그래. 나도 그런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하거라.”

쿠웅.

장내로 막중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어찌 무거운지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툭.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마뇌의 머리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굴러떨어졌다.

위천강은 발치까지 굴러온 그것을 바라보고는 잘게 떨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교관님이나 다른 이들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테니.”

“항상 믿고 있겠다.”

압박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위천강은 그 즉시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제 목을 쓰다듬으며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 겁주시는 것 아닙니까! 저도 사랑하는 제자인데!”

“나는 제자의 배경과 성향에 따라 차별하는 성격이라서 말이다.”

“…이젠 농담까지 잘하십니다.”

위천강은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호는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위천강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음을 흘리며 손을 맞잡았다.

“뭐,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관님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는 그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습니다.”

“괴물이라니.”

“그럼 본교 장로 두 명을 순식간에 찍어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괴물이 아니고서야 뭡니까. 솔직히 신교 내에서 교관님을 상대할 고수가 있습니까?”

“…없지는 않지. 마검이나 권마라면 사뭇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얼마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마검(魔劍)과 권마(拳魔).

모두 마교의 상징과도 같은 고수로, 이제는 전 세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주호가 입신지경에 올랐다지만, 그들과 비교해 손색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히 그들과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바. 위천강은 그것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나이가 지긋한 노마두들이 아닙니까. 제가 기억하기로 교관님 올해 춘추가 스물일곱인데, 여기서 일 년이라도 더 흐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스물여덟이 되겠지.”

“…아니, 그렇긴 한데.”

툭 튀어나온 대답에 위천강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 그 얼굴을 보며 웃음을 토해낸 주호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 앞으로 갈수록 내 영향력은 커지겠지. 그건 부정하지 않으마.”

“혹시라도 나중에 본교와 중원에 문제가 생긴다면 중재 좀 부탁드립니다.”

“벌써 줄을 대는 것이더냐.”

“말씀하셨다시피 본교를 위해선 사사로운 것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는지라.”

자신이 해왔던 말로 반박해오는 위천강의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질리지 않는 제자들이었다.

말이 많아도, 과묵해도, 활발해도, 마음이 깊어도. 그 어느 한 명 한 명 개성이 떨어지는 이가 없었다.

‘이건, 단 노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하나 늘었군.’

지금에 와서 교관 일에 또 다른 재미를 느끼다니. 아니, 교관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인 걸지도 몰랐다.

강호를 은퇴하고 무엇을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작은 무관이나 하나 열어 소일거리 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가자꾸나. 너의 친우들이 기다릴 터니.”

잠은 별로 자지 못했지만, 썩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

마뇌의 사망이 널리 알려지자 처절한 대립각을 세우던 천마신교의 권력 싸움은 손쉽게 막을 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거나 아직 혈천신교가 지원을 보내리라 믿는 일부는 필사의 저항을 했지만, 위천강은 더없이 단호한 모습으로 그들을 남김없이 쳐 죽였다.

중립을 표방하며 싸움에 끼어들기를 꺼리던 다른 세력들이 문을 활짝 열어 소교주의 귀환을 반겼고, 양쪽에 발을 담갔거나 슬쩍 마뇌를 지원했던 이들 역시 모르쇠로 새로운 세대에 환호했다.

“간잽이 새끼들. 나중에 싹 다 잡아서 족칠 겁니다.”

물론 위천강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의 뒷조사를 전부 끝마쳤다.

제일 먼저 천마신교의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마도십가(魔道十家) 중 표면적으로는 일곱 곳이 몸을 돌렸고, 두 곳은 중립을 지켰고, 하나 남은 위씨세가만이 소교주의 편을 들었다.

몸을 돌린 일곱 곳 중에 두 곳은 이중 첩자의 역할을 한바. 문제는 그들을 따라 분위기에 편성에 마뇌와 혈천신교의 손을 들어준 다섯 곳이었다.

하지만 위천강은 그 분노와는 달리 모두 묻고 넘어갈 것이며,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을 그들에게 전했다.

당장 내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다시 칼을 빼 드는 것은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느냐. 내가 네 등 뒤에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큰 압박이 될 터인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초기에는 저 혼자만의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관님께 의존하기라도 한다면, 교관님이 떠나신 이후에 제 입지가 흔들릴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군.”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주호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바. 위천강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구태여 물어본 것이었다.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배신자들은 어째서 남겨두느냐.”

다른 팔가(八家)는 몰라도 이가(二家)는 확실하게 그를 배신했다. 최소한 단죄를 해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위천강은 고개를 저었다.

“기강을 세우는 건 남은 잔당을 모조리 몰살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지금 저는 하나의 명확한 선을 그어준 것입니다.”

“선?”

“설령 배신했다 할지라도 끝에서 이쪽으로 돌아온다면 용서하마. 대신,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최선을 다해라. 놈들은 이걸 기회로 여길 겁니다. 사실 권력 구도에 따라 배신하고 말고 하는 문제는 흔히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호오.”

“그러면 중립이니, 뭐니 하면서 문을 굳게 걸어 닫고 사람과 곳간을 지켰던 놈들이 아끼지 않고 인력과 재화를 내놓겠지요. 배신이라는 기분 나쁜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이 들어서는 정권에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했고, 중요한 위치이며, 충성심이 있는지.”

“능동적으로 천마신교의 향상을 위해 움직이겠군.”

“그러겠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청해와 중원으로 나가 있던 본대가 들어오는 그 순간.”

위천강은 탁자 위를 톡톡 치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전부 쳐버리는 겁니다. 배신? 신교의 후계 다툼 간에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소교주인 저를 배신하고 외세를 등에 업은 마뇌의 편에 붙은 걸 용서하라?”

서늘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가히 천마신교의 작은 지배자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세였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내후년을 맞이하지 못할 겁니다.”

“…많은 피가 흐르겠구나.”

“그것이 본교의 방식이니까요.”

위천강은 그에 관해선 주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펼쳤다.

마도제일(魔道第一) 천마신교.

그것을 이끌어 가는 데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어야 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중원과는 가급적이면 원만하게 지낼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이때까지의 피해로 향후 반백 년은 서로 감히 검을 겨눌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위천강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참, 다른 이들은 뭐 하고 있답니까?”

“전부 수련 중이다. 네가 마교의 창고를 활짝 열어 준 덕분에 온갖 영약을 쉴 새 없이 흡입하고 있더군.”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온 보고서를 보면 창고 하나가 전부 털렸다고 적혀있는데, 가서 말려 주심이…….”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구나. 많을수록 좋은 것이겠지. 그리고, 설마 아까운 것이냐?”

“…에이, 대(大) 천마신교의 소교주의 포부를 뭐로 보시고.”

위천강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사뭇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찰나, 밖에서부터 다급히 뛰어오는 발걸음에 둘의 시선이 문가로 돌아갔다.

“소교주님, 장로원주인 마검으로부터 대지급 보고입니다.”

“…대지급?”

위천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외 쪽에 응집되어 있던 혈천신교의 세력이 진군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받아든 서신을 황급히 펼쳤고, 그 위에 적힌 내용을 보곤 떨리는 두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이건.”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존 死

남궁세가 가주 검제 負傷

공동파 장문인…….

빗발치는 비보(悲報).

전쟁에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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