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그나저나 다들 성취가 괜찮았나 보군. 얼굴색이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
마동 안에 보관된 물로 얼굴에 묻은 핏물을 씻어낸 위천강은 미소를 지으며 제 친우들을 돌아보았다.
선우연, 당천유, 철대환은 그간 막혀 있던 벽을 허물은 듯했다. 눈동자에 서려 있던 심마(心魔)가 사라졌고, 풍기는 기세 또한 한층 더 진중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남궁연과 악비산을 향했을 때는 그 입꼬리가 살짝 경직되었다.
자신과 같은 초절정의 경지. 물론 이전부더 두각을 드러내던 이들이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물론 아직은… 자신을 따라잡기엔 조금 모자랐을 뿐이었다.
“…….”
그리고 마침내 천후에게 도달했을 때, 위천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어떻게?’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신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가.
지금 이들이 겪은 마동의 과정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그 효과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것은 천마신공을 익힌 자신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천후에게선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즉, 아무리 못해도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위 공자? 위 공자?”
“어흡, 어. 왜 그러시오, 남궁 소저.”
“어디 다친 거라도 아니에요? 계속 불러도 멍하니 있던데.”
“하하, 괜찮소. 간밤에 쉬지 않고 싸워서 피곤했나 보오.”
위천강은 남궁연의 부름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척을 했다.
“교관님은 뭘 하고 계시나요? 함께 오실 줄 알았거든요.”
“…말도 마시오. 본교 장로 두 명을 쳐 죽이시고 양 떼를 만난 이리처럼 날뛰고 계시오. 모두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이었거늘, 하수를 상대하듯 그리 손쉽게 쓰러뜨리실 줄은 몰랐소.”
“굳이 정정하자면 이리보단 범이겠네요.”
“뭐, 그렇긴 하오만.”
“지금 날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지?”
위천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몸 푸는 것을 끝낸 선우연이 물어왔다.
“대충 열두 시진쯤 되었네.”
“…그렇게나?”
열두 시진이라는 말에 선우연뿐만 아니라 대부분 놀라는 눈치였다.
끽해야 서너 시진쯤 지났으리라 생각했는데 몇 배나 더 걸리지 않았는가.
“습격 쪽은 어느 정도 정리했네. 교관님이 활약해주신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
“그렇다면…….”
“남은 건 이쪽의 역습이네. 혈천신교의 지원을 받았다곤 하지만, 마뇌 쪽도 크게 무리했어. 외통수에 몰렸지. 앞으로 반 시진 후에 총공세가 예정되어 있네.”
“그러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더더욱 이곳으로 온 것이라네.”
위천강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초절정 고수와 절정 고수가 각각 세 명씩 도합 여섯. 어딜 가도 귀하게 쓰일 인재들이지 않은가.
더불어 현재 자신 측이나 마뇌 측이나 전력의 심각한 공백으로 신교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조그마한 싸움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
“자네들의 힘이 필요하네. 이 싸움만 이기면 본교를 되돌리는 것도 시간문제야.”
위천강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부터는 정말로 목숨을 거는 싸움이다. 그 자신 또한 몇 번이고 사선을 넘어온바. 정도를 걸어오는 이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줄 수 있을까.
“…뭐, 그런 걸 그리 심각하게 말하나.”
“애초에 그러려고 온 것 아닌가.”
“끝을 보지 않을 것이었으면 신강에 오지도 않았네.”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후기지수들은 각자 어깨를 으쓱이며 혼자 심각한 척은 다 한다며 우스갯소리를 뱉어냈다.
“뭐, 그런 것은 둘째치고 이 정도 성장을 이뤄냈는데 보답은 해야지.”
쿵.
악비산은 제 창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씩 웃었다.
사실 그들 전부 자신의 성장을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실전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거부할 일이 없었다.
“그런가.”
위천강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말끔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가세.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러!”
***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이었다.
마뇌를 필두로 한 세력은 외성 쪽의 가장 큰 건물인 천화각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밤새도록 이어진 격전으로 인해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지만, 싸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곧 있을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별동대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지금쯤이면 왔어야 하는데.”
“되었다. 그쪽도 여유가 없겠지. 우리는 이대로 버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경들도 고생했으니 잠시간 눈 좀 붙이도록.”
“존명.”
태연한 기색인 마뇌의 명령에 수하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홀로 남게 된 그는 직전과는 달리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씹으며 방안을 서성였다.
‘어째서, 어째서 더 지원이 오지 않는 것이지?’
혼돈을 필두로 한 혈천신교 세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서로 약체화된 상태라면, 혈천신교의 지원을 받는 자신들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교주를 위시한 정통파의 저항은 거셌고, 신교를 집어삼키기 위한 전쟁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여기까지 이어졌다.
꽈득.
외세(外勢)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의 사건을 보아도 외세에 의존한 이들은 모두 패가망신을 면치 못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들과 손을 잡았던 것은 그간 보아왔던 혈천신교의 힘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고, 그것에 눈이 먼 자신은 그들을 맹신했기 때문이었다.
회심의 수로 팽팽하던 전력 가운데 극마급 장로 두 명을 별동대로 구성해 소교주를 사로잡게 했다.
본대 쪽에 균형이 조금 무너졌지만, 혈천신교에서 지원을 보내준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첫 번째 지원이 도착해 이쪽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약속한 두 번째 지원은 오지 않았다. 이대로 저들이 총공세를 해온다면 아침을 맞이하기도 전에 밀려버리고 말 터.
끼이익.
그때 느닷없이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감히 누가 자신의 방안으로 그리 격식 없는 행동을 하는가. 마뇌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갈을 내지르려 했지만, 이내 그 얼굴을 보곤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서걱-.
앞을 가로막는 마인을 베어낸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천화각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싸움은 일방적인 양상이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한 것 같지만, 저들은 이쪽의 총공세를 버티지 못해 시시각각 허물어지며 짙은 패색을 내보였다.
“이상하군.”
“혈천신교의 고수들이 없어서 말입니까?”
자신의 뒤를 따라온 위천강의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대의 고수들이 서로 치명상을 입고 패퇴했다지. 별동대로 극마 급 고수 두 명을 뺄 정도였으니 어찌 되었든 저쪽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이 너무 허술해.”
“…설마 여기는 버리는 패라던가.”
“일단 계속 진행한다.”
“예.”
마동의 수련을 끝낸 후기지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양측 다 상위 고수들의 숫자가 부족한 판국인지라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 같았고, 중원이었더라면 멋들어진 새로운 별호가 붙었을 만큼의 신위를 보였다.
“가지.”
“예.”
그 가운데 주호는 위천강과 함께 제일 먼저 천화각 내부로 진입했다.
당연히 그 안을 지키고 있던 마인들이 있었으나, 모두 신검의 날카로움을 버티지 못한 채 베여 나갔을 뿐이었다.
“마뇌가 이곳에 있다면 도망치진 못했을 겁니다. 퇴로도 없고, 주변도 다 둘러싸고 있으니까요.”
“…있군.”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천화각의 제일 상층부. 그 어느 곳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홀로 있는 것을 보니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채 이쪽을 기다리는 것일 터.
위천강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주호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쿵-!
발길질 한 번에 장지문이 떨어져 나갔다. 주호는 막힘없이 안으로 진입했고, 위천강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방안에 있던 것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하나의 인영과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인바. 목을 잃은 마뇌의 몸이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머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피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은 채였다.
“오랜만이군.”
“…….”
하지만 주호는 마뇌의 시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그것을 앞에 두고도 태연한 기색으로 차를 음미하는 혼돈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혼돈.”
“소교주. 아쉽게 됐소이다. 서로 상생을 바란 것이지 이렇게 칼날을 겨누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 빌어먹을 새끼……!”
쌓인 것이 많은지 위천강이 쌍심지를 켜며 소리지르려 했지만, 주호는 가볍게 손을 뻗는 것으로 그를 뒤로 물렸다.
“여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네.”
혼돈은 옅은 미소와 함께 마뇌의 목을 바라보았다.
“욕심이 많은 자였지. 사실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없었어. 우리 쪽에선 마교를 꼭두각시로 이용하는 것이 더 이득이니 말이야.”
“…그래서 상황이 안 좋게 되었으니 꼬리를 잘랐다?”
“그러네. 이 친구는 마인 치고 우리에게 깊게 관여해서 아는 것이 많으니.”
꽈아악.
신검을 쥔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마치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주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예전의 나로 생각하고 그리 여유를 부린다면 오산이다.”
“알고 있네. 도올 그 친구의 팔도 하나 빼앗아 갔다며. 어찌나 투덜거리던지.”
자신의 동료가 당한 일인데도 혼돈은 마치 상관없다는 것처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자네 얼굴도 봤겠다 나는 할 일이 전부 끝났네.”
그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누가 보내준다고…….”
“자네가 날 이길 수 있을까?”
“같잖은 이야기로군.”
“그래, 사실 맞아. 나도 잘 모르겠네. 예전엔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 말이야. 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조금 놀라고 있다네.”
척.
주호는 신검의 끝을 세웠다.
더 이상의 사설은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혼돈은 여전히 여유로운 기색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대가는 값싸지 않을 텐데.”
“팔 한 짝 정도는 내어주마. 그러니 목은 내려놓고 가거라.”
“팔 한 짝으로 될까. 어디 보자… 네가 그리 어여뻐하는 제자들을 몇 데리고 갈까?”
“…….”
“악가와 주작의 후계 정도면 충분하려나. 물론 자네 뒤에 있는 소교주도 포함해서. 아, 남궁의 자제와는 긴밀한 관계라지?”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기세는 거두지 않았지만, 그 머리는 터질 정도로 맹렬하게 돌아간다. 과연 자신이 그들 모두를 지켜내며 혼돈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서로 좋게 끝내세. 자네도 마교를 되찾는데 성공했고, 나도 일을 무사히 마무리했네. 서로 좋지 않은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혼돈의 얼굴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