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하아, 하아…….”
선우연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산등성이를 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입에선 단내가 끊이질 않고,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몸은 시시각각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해오고 있었다.
쉬이익-!
“빌어먹을!”
등 뒤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그는 황급히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튕겨 나간 암기가 나무며 바위며 그 위로 박혀 든다. 몇 개는 그것을 던진 적들에게 되돌아갔지만, 유의미한 피해는 주지 못했다.
선우연은 옷에 묻은 흙을 털을 세도 없이 다시금 벌떡 일어나 땅을 박찼다.
마교로 온 목적은 무사히 완수했다고 할 수 있었다.
위천강도 구해냈고, 천마신교를 정상화하는 것에도 성공해 저 멀리 서장에서부터 올라오는 혈천신교의 군세에 맞서 중원 연합군과 공동 전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전부 끝났으니 되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 금의환향하는 기분으로 다시 중원행을 밟았지만, 그 문턱을 넘기도 전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혈천신교가 펼친 천라지망이었다.
필사의 각오를 한 듯 그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주축이 되는 고수들은 주호가 제 몸을 바쳐가며 막아냈지만, 해일처럼 밀려드는 혈천신교의 교도들에 후기지수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지옥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쉬지 않고 뛰고, 쉬지 않고 나아왔다. 몇 개의 산을 넘고 몇 개의 강을 지나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스승님에게 받은 검은 피에 절어 더는 사용할 수 없었기에 내버리고 자신이 죽인 적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했을까,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니 날이 다 나간 것이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또 무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궁 소저는 무사하려나.”
적들의 추격을 겨우 뿌리치고 며칠 만에 내뱉은 말이었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기분 나쁜 쇳소리가 섞여 있었으나,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부스럭.
그와 동시에 저 수풀 너머로 또다시 인기척이 나타났다.
선우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검을 들었고, 닥쳐드는 적들과 재차 피 튀기는 혈전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또 사흘이 지났다.
“…끅.”
그간은 큰 피해 없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복부 쪽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가까스로 혈도를 집어 출혈은 잡았다. 하지만 장기를 다친 것인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이 메스껍고 시야가 울렁거려 왔다.
“…….”
선우연은 강을 넘어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어느 동물이 팠었는지 모를 구덩이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 상태로는 더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 적어도 의식을 온전할 수 있도록 체력은 회복해야 했다.
남은 금창약을 상처에 덕지덕지 바르고, 마지막 단환을 입에 털어 넣은 채 운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이틀을 구덩이에 숨어있었다. 물론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끊어진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추적해온 것인지 적들의 인기척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어디 구덩이를 파고 숨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검을 푹푹 찔러 넣어왔다. 종래엔 제 코앞까지 들이닥친 검날에 긴장을 금치 못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선우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벌컥벌컥.
상처와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을 확인한 뒤 선우연은 조심스레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며칠간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해 심히 목이 타던바. 흐르는 강물에 얼굴을 처박고 쉴 새 없이 물을 들이켰고, 한참 뒤에 겨우 몸을 일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량한 신세로구나.”
화산의 소신룡이라 불리던 자신이 이런 구차한 모습이라니. 아니, 살아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짝짝.
선우연은 뺨을 두들겨 정신을 다잡은 뒤 다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지 못했을 때, 눈앞에 나타난 존재에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적내이.”
화산과 마교에서 몇 번이고 싸웠던 괴물이었다.
몸은 무쇠로 이루어진 듯 단단하기 그지없었으며, 시체 주제에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특히 저 핏빛 붕대인 적내이는 검강 급의 고수라는 것일 터.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꽈아악.
선우연은 검을 다잡았다.
아니, 자신도 이곳까지 오며 많이 성장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벽을 넘어 절정의 경지로 진입했고, 도망치는 동안 수많은 적과 맞서 싸워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웅웅─.
물론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시뻘건 검강을 보니 마음이 꺾일 것만 같았지만, 그는 힘껏 고개를 털어 나약해진 마음을 떨쳐내었다.
‘검강이 별 대수냐.’
검기니 검강이니 이기어검이니.
모두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적내이는 이미 죽은 몸에 인간의 망령을 불러들여 집어넣은 만들어진 존재. 본능과 반응에 따라 움직이니 그 부분을 잘 공략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냉정을 되찾으니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동시에 선우연은 적내이의 움직임이 사뭇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화산을 상징하는 진신절기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검끝을 타고 유려하게 펼쳐졌다.
맹렬하게 떨치던 매화 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야말로 무향(無香)의 경지. 수련과 실전은 달랐다.
사문에서는 매화검법을 펼칠 때 그 이념과 의지를 잊지 말라고 했다.
찬란한 꽃을 피우려는 노력.
하지만 실전에서는 정반대였다. 설사 봉오리를 피우지 못하더라도, 그 꽃잎에 피가 묻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자만이 그다음 해의 매화를 볼 수 있었다.
콰가가각-!
날카로운 한 줄기 검강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선우연은 즉시 뇌려타곤을 펼치며 땅으로 몸을 날렸고, 바로 한치 옆으로 긴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씨팔. 그래, 한 번 해보자.”
이어진 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팔 하나를 내주고 다리를 가져갔다. 눈을 내주고 귀를 잘랐고, 허리를 주고 그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선우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무쇠처럼 단단한 몸을 꿰뚫었을 때, 자신은 또 한 번 새로운 경지에 발을 내디뎠노라고.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아쉬울 따름이었다.
“…더럽게 아프네.”
회생 불가의 상처였다.
불가능한 승부에서 적내이를 꺾은 것도 회광반조에 이른 여력을 쥐어짜내 검을 움직인 것이었다.
선우연은 바닥에 엎어진 채 치사량이 넘는 피를 쏟아내며 찬란히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선이라도 끌었던 것이라면 좋겠는데.”
이쪽의 소란을 느낀 것인지 주위로 적들이 점차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죽는 것은 자신 하나로 족하지 않는가. 일행 모두 여기서 죽기에는 아까운 인물들이었다.
‘…미안, 하다. 먼저 가마.’
조금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선우연은 의외로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수마에 의식을 맡겼고…….
“…컥!”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방안에 가부좌를 하고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컥, 켁…….”
그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엎어졌다.
조금 전과 지금의 괴리감이 온몸을 짙게 지배하고 있어 어지럼증과 함께 구역질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시야는 암전되고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는다. 그러던 차 누군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숨을 멈춰. 억지로 쉬려고 하지 마. 옳지. 그리고 천천히 깊게 조금씩 구멍을 열어. 입안에서 공기를 음미하면서.”
“…….”
한참을 지난 후에야 선우연은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대 역시 그의 호흡이 안정된 것을 느꼈는지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우연은 그것이 물이 담긴 사발이라는 것을 보곤 떨리는 손으로 건네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
그러곤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머리는 여전히 핑핑 도는 것이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옆에 있던 당천유는 씩 웃으며 그런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울 걸세. 나도 그랬거든.”
“…여긴?”
“자네가 뭘 보고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마동의 영향인 듯하네. 나도 그랬고 다른 이들도 모두 각자의 싸움을 하고 깨어났지.”
“…끙.”
선우연은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동, 싸움.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것이 모두 환상이란 말인가.
“기운 찾았으면 얼른 운기나 하게. 자네가 제일 늦었어.”
선우연은 당천유의 말에 따라 그 즉시 운기조식을 시작했고, 약 일각이 지난 후에 소주천을 한 번 끝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군.”
“그렇지? 단숨에 몇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었는지.”
분명 이곳에 들기 전까지 절정에 가로막혀 있던 경지가 벽을 훌쩍 뛰어넘고 그 완숙 가운데 올라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당천유를 살피니 그에게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바. 자네도 그렇냐는 표정으로 물으니,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왔다.
“나가세. 다들 기다리니.”
“…그러지.”
선우연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조금 전의 기억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되지 않는 아리송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일행의 모습에 겨우 어깨에 깃들었던 긴장을 풀며 옅은 미소를 내뱉었다.
“다들 한층 더 성장했나보군.”
“특히 남궁 소저와 비산의 성취가 남다른 것 같네. 저건 최소…….”
“…초절정이로군.”
“천후도 마찬가지겠지?”
“쩝.”
애초에 격차가 있던 그들이다.
초절정에 들지 못한 것은 자신과 당천유, 그리고 이쪽을 눈치채고 다가오는 철대환뿐인 듯했다.
“다 깨어났군. 이제 슬슬 나가야 할 터인데.”
천후가 일행을 돌아보며 고민했다.
이 밖으로는 강력한 절진이 펼쳐져 있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고 했다.
적당한 때에 맞춰 데리러 온다고 했으나, 제일 먼저 깨어난 자신의 이후로 벌써 한 시진이 넘게 흐른바. 악비산은 어쩔 수 있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못 나갈 것 같으니 대련이나 하고 있지. 난 몸이 근질거리는데.”
“맞아요. 절진이 펼쳐져 있는 이상 이쪽에서 나가지 못하잖아요. 천 공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보죠.”
악비산에 이어 남궁연까지 그리 말하니 천후로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굳어질 찰나, 밖으로부터 이쪽을 향하는 문으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한다. 그 직후 문이 열렸고, 위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네…….”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그의 귀환을 반겼으나, 그 직후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뚝, 뚝…….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뒤덮이지 않은 곳이 없다. 화룡점정으로 들고 있던 검끝으로는 핏줄기가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자, 자네 괜찮은가!”
당천유가 황급히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핀다. 이 정도의 출혈이라면 제정신이 아닐 터. 하지만 위천강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말게. 적의 습격이 있었거든. 전부 놈들의 피네.”
“…그런건 처음부터 말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위천강에게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