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툭툭.
위천강은 발끝으로 땅을 비볐다.
낙성곡에서의 대련은 그간의 성취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신교의 소교주로서 주호 앞에 섰다.
‘즉, 소교주의 자질에 어울리는가 인정받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지.’
천마신공의 마기가 전신에 들끓는다. 신교로 돌아온 뒤 셀 수 없이 많은 전장을 지나왔으나, 지금처럼 흥분된 적은 없었다.
살짝 무릎을 굽히고 어깨를 기울여 무게 중심을 앞으로 둔다. 잘게 떨리는 검 끝은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려들고 싶은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
하지만 주호가 대련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서로 간에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선수를 양보한다고 했다만.”
“…한 삼사십 초식 정도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살 떨려서 원.”
주호의 물음에 위천강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삼사십 초? 삼사백 초를 양보해준다고 하여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 패배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패배했느냐에 더 중점을 두어야 했다.
‘괴물 같은 양반. 그사이에 더 강해진 것 같네.’
위천강은 비무 시작 이후 처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몸을 날릴 듯한 기세와는 반대로 발끝만 움직여 반보 정도 옆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소극적인 움직임인바. 주호 역시 옅은 미소와 함께 그것에 맞춰 제 몸을 살짝살짝 돌려 나갔다.
주륵.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것이 이내 턱 끝에 맺혔고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쐐애애액!
위천강은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주호에게로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찰나에 그 지척에 다다랐다고 느낄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 과연 초절정에 달한 속도라며 감탄이 나올 정도였지만, 위천강의 노림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웅웅─.
아무런 전조도 없이 생겨난 흑색 검강이 울음을 터트리며 날카롭게 허공을 베어 갈랐다.
주호는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위천강의 검을 보며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훌륭하다. 신공을 수련했다 할지라도 검강의 발현이 그토록 자연스럽다는 것은 네 경지에서 상대가 없다는 것이지.”
둘의 신형이 겹쳐졌을 때 허공으로 몇 번이고 거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새어나간 검강이 벽이며 바닥이며 깊은 상처를 내었고, 그 진동으로 인해 천장에선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확실히, 이전과 비교할 수 없다.’
한 호흡 동안 이어진 수십 번의 공방. 주호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살짝 뒤에 내려선 위천강을 바라보았다.
현재 후기지수 중 가장 상위 경지에 있는 천후라 할지라도 절정 완숙에 막 들어섰을 뿐이었다.
만일 위천강과 생사결을 하게 된다면 백여 초식 끝에 승패가 판가름이 날 터.
확실히 천마신교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형국이었다.
쉬이익-!
위천강의 검이 기묘하게 기울어진다. 본래의 천마검식이 아닌, 그가 중원에서 평범한 후기지수를 가장했을 때의 사용했던 무월십이검(無月十二劍)이었다.
“그립구나.”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딱히 이름있는 검법은 아니었지만, 그 수준은 무시할 수 없는바.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을 따라 마화(魔火)가 흩날리며 공기를 달궜다.
천마신공으로 펼치는 무월십이검.
경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기반이 되는 구결이 달라지니 그 위력이 판이하게 상승해버렸다.
쉬아아악!
화마에 휩싸인 검이 부닥친다. 주호는 신검을 들어 그것을 가볍게 걷어내려 했지만, 검 끝을 타고 느껴지는 묵직함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위천강의 경지에 맞춰 자신의 힘을 제한했고, 단전으로는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끊임없이 유지하려 의식을 쏟고 있느라 여러모로 걸림돌이 많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 간에는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있는바. 주호는 처음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일으켰다.
“현검.”
경지에 오르고 나선 잘 쓰지 않았던 청룡검식이 신검의 끝에서 터져 나왔다.
주변을 불태우며 일렁이던 화마가 순식간에 찍혀 눌리며 기세를 잃는다. 마찬가지로 깊은 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압박감에 위천강은 이를 악물었다.
쉬아아악-!
무월십이검의 초식들이 물 흐르듯 펼쳐진다. 허공을 수놓는 수많은 연격. 무월(無月)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그토록 눈부실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림없다.”
하지만 주호는 이미 그를 진심으로 상대하리라 마음먹은바. 신검을 거두고 왼손으로 정권의 자세를 취하며 무겁게 내질렀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밤하늘의 그것처럼 펼쳐진 검결이 갑작스레 불어온 태풍에 모조리 분쇄해버렸다.
그 뒤에 있던 위천강은 자신 역시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땅 위에 두 다리를 굳게 디뎠고, 두 팔을 교차해 몸을 지켰다.
그그그극.
연무장 바닥으로 탄 자국이 길게 이어진다. 한참을 그렇게 밀려난 끝에 위천강은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진심으로 하신 것 아닙니까?”
“제자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지.”
주호가 씩 웃으며 말하자, 위천강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두 번 성장하려 했다간 뼈와 살가죽이 갈라져 버리겠습니다.”
실제로 그의 앞섬은 넝마가 되어버린바. 여기서 조금만 더 위력이 강했더라면 살갗이 갈가리 찢겼을 것이었다.
“우스운 소리를 하는구나. 서푼의 힘을 감추고 있으면서.”
“거참, 교관님 눈은 무슨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술법이라도 걸려 있는 겁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한 설명이군.”
“못 본 사이에 농이 느셨습니다.”
자신의 농조차 가벼이 받아 흘려넘기는 그 모습에 위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제 몸에 쌓인 여파를 털어낸 것인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다시 한 번 기세가 변화했다. 주호는 직감적으로 그가 천마신공의 무공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보자꾸나.’
흉포한 마기가 그 전신에 휘몰아친다. 주호 역시 그것에 대항하듯 무디게 해놓았던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을 날카롭게 벼렸다.
쩌어억-!
단순히 기세의 충돌만으로 연무장의 벽이 갈라진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여파. 위천강은 그 가운데 발을 내디뎠고, 바닥이 움푹 파이며 균열이 터져 나왔을 때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콰아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이 귓가를 뒤흔든다. 주호는 자신의 바로 왼쪽, 채찍처럼 휘둘러져 쇄도한 검 끝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정도로 끝은 아니겠지.”
“…물론, 입니다!”
캉-!
위천강의 전신이 짙은 마기에 휩싸인다. 바로 직전 검을 휘감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 살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농밀한 기운은 자신이 마도의 정점이라며 선포하듯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천마신공.’
주호가 두 눈을 가늘게 떴을 때, 허공으로부터 수십 줄기의 강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 하나하나 허초인 것이 없는바. 피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위천강의 분발이 기꺼워 손수 상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만검(萬劍)─.”
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발이 닿는 경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검이 신검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펼쳐졌다.
“……!”
세찬 바람이 사방을 휩쓴다. 멸천이 태풍이라면 만검은 뼛속 깊은 곳까지 저며 드는 냉기의 숨결이었다.
위천강은 그 추위에 대항하듯 마화를 더욱 거세게 피워 올렸지만, 곧 주호가 자신이 혼신을 다해 쏘아 보낸 수십 줄기의 검강을 단 하나의 흘림 없이 무참히 부서뜨리는 것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보다 더 고수라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충격적이기 짝이 없었다.
마뇌의 충실한 충복이었던 흑귀랑(黑鬼狼) 역시 자신과의 싸움에서 최대한 반항했지만, 수십 갈래로 찢어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주춤하는 기색이라도 보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거늘, 주호는 별 어려움 없이 그것을 전부 상쇄해버렸다.
그렇다고 이쪽의 경지 이상의 실력을 낸 것은 또 아닌바. 지켜보고만 있어도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발한 쾌검은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부딪쳐 오너라, 네 최선을.”
“…….”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 주호의 말에 위천강은 검을 다잡았다.
아직, 아직 그에게는 남은 것이 있었다.
천마신공의 정수.
천마검식(天魔劍式).
츠즈즈즈-!
마기에 휩싸인 검이 하늘 위로 곧게 세워진다.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위천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내디딘 왼발을 크게 쓸었다.
“극마-.”
천마검식(天魔劍式)
일식(一式) 극마(極魔)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의지를 품고 내뱉어진 언령(言令)이 현상에 개입하자 인식이 어긋나버렸다.
마치 일 초식 일섬(一閃)을 펼쳤을 때, 눈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을 받는 것과 비슷한 현상인바. 지금 역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구불거리며 자신의 형태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나도 강대한 기운이 위천강을 중심으로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이윽고 그것이 정점에 이르자, 신승과 결전을 벌였을 때 천수관음이 닥쳐왔던 것처럼 위천강의 뒤에서 수라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날카롭게 손을 뻗어왔다.
“이것이 천마신공의 정수.”
주호는 천천히 신검을 다잡았다.
그쪽에서 최선을 다해온다면, 이쪽 역시 보답해주는 것이 도리.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신검 위로 폭발적인 힘을 실었다.
“일섬.”
일 초식 일섬(一閃)
쉬아아아아악-!
신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주위를 휩쓸었다.
구부러진 왜곡 역시 그것에 휘말려 속절없이 일도양단 되었고, 수라의 형상을 한 악귀는 더 없을 정도의 흉포한 살기를 풍기며 제 손으로 신검을 막아냈다.
쿠구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지축이 울렸다.
이전처럼 벽이며 바닥에 상흔이 남지 않았지만, 둘의 공력은 한가운데에서 맹렬하게 부딪치며 한 치의 밀림 없는 알력을 다퉜다.
‘크으으으윽!’
위천강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천마검식이라는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발악하는 중이었다.
파아아앗─.
이윽고 그것이 극한에 다다라 서로 공멸을 이루어 냈다.
입관 심사 이후 정체를 숨긴 채 주호를 찾아가 싸운 끝에 이뤄낸 결말과 같은 모양새. 하지만 이번 싸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척.
주호는 아직 비무를 끝낼 의사가 없다는 듯 신검을 들어 올렸다.
위천강 역시 살짝 가쁜 호흡을 이어나가면서도 사납게 웃음을 내뱉었고, 재차 검을 다잡았다.
“이식(二式) 탈마(脫魔)…….”
땡땡땡땡-!
천마검식의 두 번째 검식이 펼쳐지려 할 찰나, 벽에 박혀 있던 종이 소란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건?”
“…밖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봅니다.”
주호의 물음에 위천강이 굳은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자신을 찾지 말라고 했으니 필시 심상치 않은 상황일 터.
그들이 비무를 하며 한 시진 정도를 보냈으니 못해도 아홉 시진 이상은 남아있다는 소리였다.
“이곳에 펼쳐진 진법이라면 설사 입신지경의 고수가 침입해 오더라도 얼마간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자부하는 위천강의 말에 주호는 부정하지 않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수준이 깊은 진법인지 사신문에 펼쳐져 있던 망량환혼진도 어렵지 않게 밝혀냈던 상태창조차 이곳을 절반도 채 분석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쿠웅.
그때 저 위로부터 심상치 않은 진동이 울려와 천장을 은은하게 진동시켰다.
상당히 거리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여파라면 적습이 분명할 터.
“가지.”
그들은 서둘러 연무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