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어떻습니까?”
위천강은 긴장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차를 준비해오는 사이에 서로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 주호는 이미 조부의 몸을 살피고 있던바. 옛적에 무형지독을 해독한 이력이 있는 그였기에 살포시 희망을 품었다.
“음.”
주호는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천마가 순순히 허락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 내부를 관조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알 수 있었던 것은 생각보다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독기의 흔적은 과장이 아닌 듯 살피는 혈맥마다 진득한 덩어리가 들러붙어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조차 의아할 정도인 모습이었다.
독기가 전신에 퍼졌을 뿐만이 아니라 장기나 골수에도 깊이 침투해 있다.
우웅.
주호는 시험 삼아 한 줄기 청룡신공의 진기를 흘려보냈다.
더없이 순수한 정기(正氣)를 지닌 그것은 그의 손끝을 타고 천마의 몸을 흘러들어 갔고, 이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천망의 독기와 마주했다.
천마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만반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렇기에 일각이 지났을 때 주호는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두 눈을 떴고, 천마는 왈칵 피를 토해냈다.
“…컥, 쿨럭.”
시커먼 사혈(死血)이 토해져 나온다. 그것이 묻은 탁자와 벽이 연기를 내며 녹아내리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서려 있던 독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교주님!”
위천강은 황급히 달려가 비틀거리는 천마의 신형을 부축했다. 입가와 앞섬에 흘러나온 피를 닦아내고 지친 얼굴로 눈을 뜬 주호를 바라보았다.
“성공한 겁니까?!”
여태까지 무슨 약을 써도 차도가 없던 상황. 그러던 차에 이리 선명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으니 그의 얼굴이 사뭇 밝아졌다.
“독기 자체는 어떻게든 정화할 수 있었다. 다만…….”
주호는 말을 아꼈다.
무형지독과 천망의 독기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청룡신공 역시 신공이라 불리는 절학. 지극히 비효율적인 교환비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인다면 그 내부에 있는 독기를 정화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본좌의 몸이 버티질 못하겠지.”
천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혜 때처럼 영약이든 뭐든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교주님은 입신지경의 고수이신데 그것을…….”
“적어도 달포 전에 만났더라면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현실이 이렇구나.”
천마는 담담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으로 치료를 했으면 모르겠으나, 그는 천마신교의 교주였다.
신교에서 개발한 독이 감히 자신을 해칠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또 스스로 무공에 자신이 있어 천망과 정면으로 싸웠다.
“자만이었지. 결국엔 이 꼴이니.”
천마는 하나 남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주호가 정화해준 덕분인지 이전과 달리 사뭇 혈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듯싶었다.
“천강아, 조용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반 시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위천강은 착잡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떠나간 손자를 가리켰다.
“어떤가. 나름대로 잘 자라주지 않았나.”
“그 누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보고 잘 자라지 못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천마의 앞에서.”
“하하, 그것도 그렇지.”
천마는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토해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야. 외로움을 많이 느꼈겠지. 이곳이 신교가 아니고, 본좌가 천마가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겠지만…….”
“…….”
그 말에 주호는 살짝 놀람을 느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천마도 그러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본좌도 사람이라네. 하늘이 내린 악이니 뭐니, 운운해도 자네와 같이 붉은 피를 지닌 것은 다름이 없지. …뭐, 이 지경이 되니 다소 감성적이 된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군요.”
혈천신교와 손을 잡고 강호를 집어삼킬 계획을 세운 존재가 그리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뼈가 서린 말에 천마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리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자네들의 시선에서 본좌는 만악의 주구이며, 신교는 해악의 집단이니.”
“실제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밖에 일어난 전쟁으로 도대체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는지 아십니까.”
천마와 말싸움하려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모습을 보자 마음속 밑바닥부터 저열한 감정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지? 자네는 본좌를 죽이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인가? 그럴 만도 하군. 당대 천마의 목이라면 크나큰 명성과 부를 거머쥘 수 있을 테니.”
“…저를 그런 저속한 인간으로 보시지 마십시오.”
“하하하,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이가 입신양명의 길을 저속하다고 치부하다니. 참으로 재미있을 따름이야.”
주호의 기세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의 말을 흘려들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날카로운 검날을 세워 천마의 목에 겨눈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본좌를 살리려 했으면서, 이제는 죽이려 드는가.”
“제 의지를 표명할 뿐입니다.”
“자네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이 비루한 몸뚱이를 갈가리 찢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다시 한 번 묻겠네. 고작 그러려고 이곳까지 왔는가?”
“…….”
주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곤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제 의지를 거두어들였다.
‘여기서 천마를 죽이는 것은 하책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역사와 자신의 명성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위치까지 도달하니 오히려 그런 것들에 초연해지게 되었다.
“저는 오로지 대의를 쫓습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을 뿐이지요.”
“대의라. 자네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말이지. 이해는 하네. 본좌의 패도와 자네의 대의는 본질에서 같은 것일 테니.”
도대체 무엇이 같다는 것인가.
시답지 않은 말장난은 집어치우라는 뜻으로 살며시 미간을 좁히자, 천마는 허허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사신수 청룡, 맞는가.”
“…맞습니다. 제가 당대 청룡의 좌를 맡고 있지요.”
“혼돈은 자네가 자신들의 대척점이라 했네. 허나…….”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역시 주호에 관한 정보는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던 바였다.
상계 가문의 출신, 흑도를 전전하다 무림맹 삼류 무사로 들어갔고, 비동혈사에 휘말린 끝에 지금에 도달했다.
“무황의 비보를 얻었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이라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주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천마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 분명 이립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오른 것은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일이야. 강호 역사상 드문, 아니 어쩌면 유례없는 일이겠지. 허나…….”
고작 그 정도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시선에 그러한 감정이 서린 것을 깨달은 주호는 메마른 침을 삼켰다.
“세상은 본좌와 무림맹주, 그리고 검제를 비롯한 여러 입신지경의 고수를 같은 선상에 놓고 천하제일인의 우열을 가리지.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어. 실상은 전부 본좌의 허리춤에 올까 말까 한 것인데.”
천하를 좌시하는 오만한 태도. 하지만 천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경지는 화경 가운데서도 끄트머리에 다다라 있는바. 지금껏 만났던 어느 고수, 단 노인이나 남궁 가주보다 몇 수 더 높은 경지였다.
“신마(神魔)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
신마(神魔).
우습게도 천마의 입에서 그러한 이름이 거론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에 주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천마는 살짝 떨리는 제 손끝을 바라보며 아주 먼 옛날, 머릿속 한구석에 고이 접어 두었던 어느 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본교가 자신들을 혈천신교라 칭한 세력과 손을 잡은 것은 본좌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해였을 때의 일이네. 아니, 어쩌면 그때 알게 되었을 뿐 훨씬 더 이전의 일일 수도 있겠지.”
고작 열 살의 나이였다.
당시 천마이던 위천악의 부친은 중원 정복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 힘을 강화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혈천신교인바. 처음엔 다른 곳들과 달리 별 두각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진가를 보인 것은 중원 침공의 실패 이후 내실을 다질 때였다.
사흉수를 표방하는 네 명의 고수.
혼돈, 도철, 도올, 궁기.
지금은 그 면면이 다르지만, 수십 년 전에도 그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사흉수를 비롯한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천마신교가 천마를 섬기는 것과 같이 신마(神魔)라는 존재를 섬겼다.
어릴 적의 위천악은 당시 천마였던 제 부친과 함께 본교에 찾아온 신마와 마주했던 기억이 있었다.
“끔찍했지. 솔직히 본좌의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인세(人世)에 존재해도 괜찮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남자였다. 수하들의 도움 없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으며,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반쯤 썩어 문드러진 눈동자 하나뿐이었다.
천마는 위천악을 대동한 채 그와 만남을 가졌다. 다만, 그 가운데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지. 뭐, 그렇다고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린 없을 테니 전음이나 심어 같은 무언가의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겠나.”
“…어땠습니까. 신마란 존재는.”
주호는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싸워야 할 존재에 관해 물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끔찍했다고. 그와 마주하는 내내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몇 번이고 토악질할 뻔했네. 겁을 먹어서가 아니야. 그저 어릴 적의 본좌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존재여서 그랬지. 그리고 천마가 된 이후에도…….”
천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만마(萬魔)의 주인이 되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극성으로 깨우쳤으며, 이 천하 아래에 자신의 상대가 없었다.
“그와 대적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라네.”
그럼에도, 천마는 과거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주호는 말없이 손을 주억거렸다.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인 천마가 저리 말할 정도면 도대체 어떤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일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적해(赤海)의 기운이 지니고 있던 아주 짧은 기억의 편린일 뿐이었으니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전대 천마이신 부친께서 말씀하셨지. 저것은 인세(人世)에 대적할 수 있는 이가 없는 존재라고 말이야. 부끄럽지만, 혈천신교가 활개를 치고 다님에도 제지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네.”
천마가 겁을 먹었다. 그것도 어릴 적 딱 한 번 만난 기억으로 인해.
위천악은 이보다 꼴사나운 모습이 어디 있느냐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허면 어째서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하지만 천마는 혈천신교와 대립했고, 결국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대로 혈천신교에 편승한다면 어렵지 않게 전쟁에서 우위를 거머쥘 수 있었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가시밭길을 간 이유가 무엇인가.
“글쎄, 말년에 천마라는 이름에 회의라도 들었나 보군. …천강이도 있고 말이네.”
위천강을 말하는 그 표정에서 주호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고통받은 시간은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리라. 앞으로 신교를 이끌 자신의 손자에게까지 그 업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었을 터.
“일은 이미 벌어졌네만, 자네는 그런 존재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천마는 자격을 묻고 있었다.
그 자신은 이미 신마 앞에 서지도 못한 채 패배를 맞이했다. 겨우 지금에 와서 발악하는 것이 고작이었던바. 주호는 그 물음에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청룡신공과 적해의 기운이 어우러지며 더없이 순수한 기운을 만들어낸다. 혼원일극신공의 정수. 그 신묘함을 알아본 천마의 두 눈이 점차 크게 뜨였다.
“…솔직히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확언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꽉.
혼원일극신공의 기운이 어린 손이 강하게 주먹 쥐어진다. 주호는 강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