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솔직히 정말로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두 같이 말이지요.”
일단의 소란 이후 그들은 다시 별실로 안내되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위천강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사람을 통해 서신을 전달했다. 주호가 와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지만, 혹시라도 와준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일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 푼의 희망에 기댄 것이 이리되어 돌아오다니. 더군다나 그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동기들까지 동행해줄 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마검이 도와주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우는소리를 하는데 별수가 있겠느냐.”
“그 늙은이가 그런 말까지 했답니까?”
“늙은이라니. 충신이 서운해하겠군.”
“충신이라니요. 마뇌보다 제가 다루기 쉬워 보이니 이쪽에 합류한 인물입니다. 칼만 겨누지 않을 뿐이지 방심하면 이쪽도 잡아먹힐 것인데.”
위천강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그런 비사가 있었는지 모를 주호가 헛웃음을 토해냈을 때, 옆에 있던 선우연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교관님. 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맞습니까?”
“왜 그러지? 일단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었기에 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확답을 받은 선우연이 제 친우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쉬이이이익-!
움켜쥔 선우연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앉아 있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몸을 날렸고, 이내 위천강을 구타하기 위해 맹렬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으억?! 다들 왜!”
“뭐? 마교의 소교주?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 누가 그렇구나, 하면서 납득할 줄 알았느냐!”
“더군다나 이렇게 추하게 도움까지 요청해놓고!”
“내 이곳으로 온 것은 네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교육해주기 위함이다.”
“흠.”
“난 조금 이해하네만, 마교의 소교주를 때릴 기회는 흔치 않으니.”
“자업자득이에요. 얌전히 얻어맞으세요.”
각자 하고 싶었던 말을 우르르 쏟아내며 위천강을 물샐틈없이 둘러싸고는 어디 하나 부러뜨릴 분위기로 난타했다.
하지만 위천강의 무위는 예전과 차원이 달라진바. 학관에 있을 적에는 그래도 천후와 비견되며 자웅을 겨룰 수준이었지만,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믿을 수 없는 성취를 이뤄낸 상태였다.
[상태창]
이름: 위천강
별호: 소천마(少天魔)
직업: 천마신교 소교주
나이: 스물하나
소속: 천마신교
경지: 초절정(二/十)
무공: 천마신공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上上
천후가 이제 막 절정의 초입을 들어선 것에 반해 그의 경지는 초절정에 도달해있었다.
그 경지는 작년에 주호가 학관에 있을 때와 같은 것으로, 자신에게 쇄도하는 맹공을 피해내기에는 충분했다.
“…이 무슨.”
선우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위천강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그를 패 죽이기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사뭇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다.
그들은 각자 경지에 오르며 보는 안목 또한 높아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몸놀림이 예사 경지의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차이가?”
“마교 혈통의 힘인가?”
“자네, 그렇게 우두커니 있지만 말고 무어라 말이라도 좀 해보게.”
“…….”
자신이 마교의 소교주임을 알고서도 두 눈을 크게 뜬 채 허물없이 말해오는 친우들의 모습에 위천강은 씩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팔짱을 끼며 사뭇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교의 신묘한 힘이다. 만일 자네들이 입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이 비법을 전수해주지.”
콱.
주호는 그런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위천강의 머리를 짓누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을 마공이라 부르는 것이다. 손쉽게 강해지는 길은 없는 법이야.”
“…마공 아닙니다. 진짜 신교의 신묘한 힘인데.”
“각설하고, 진지한 이야기로 가자꾸나.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닐 테니.”
바로 직전까지 치열한 싸움이 있던 상황이다. 그렇기에 위천강도 표정을 고치며 다시 앉았고, 곧 좌중을 둘러보며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이쪽과 마뇌 쪽에 있는 화경의 고수는 각각 셋으로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교관님께서 와주셨으니 전력의 판도가 크게 변했습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나아간다면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아 올 수 있겠지요.”
“아까와 같은 불청객이 없다면 말이지.”
도올 그자도 자신과 비교해 손색이 있긴 했으나, 분명 입신지경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래도 팔 한 짝을 잃은 탓에 곧바로 나서긴 힘들 터. 그렇다면 그쪽에서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뿐만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굳이 나를 부를 필요는 없을 테니.”
“…예.”
위천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입신지경의 고수가 부족하다면 마검 쪽에 있는 아무나 데려오면 되었다.
전체적인 숫자에서는 모자랄지언정 상위 고수들에서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있었으니.
하지만 구태여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검에게 들으셨겠지만, 교주께서 중독되셨습니다. 이건 신교 내에서도 일부밖에 모르는 사실이지요.”
“…천마가 중독.”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다른 이들이 모두 놀람을 토해냈다.
중원 무림에 있어서 천마는 절대 악의 상징이자, 마교를 이끄는 절대지존이었다.
“당가의 불세출 천재가 만들어낸 무형지독을 정화한 교관님이라면 이쪽의 독도 해독시킬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천망(天網).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조차 중독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다.
사도맹주 철혈패도를 은거하게 만든 이유였으며, 그것이 밝혀진 뒤로 무림맹에선 요 몇 년 사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고수들이 모두 이 천망이란 독에 당해 죽은 것이리라 추측을 내렸다.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일까.’
마도의 정점에 이른 천마마저 중독시킬 정도니, 당천유가 만든 무형지독보다 더 지독한 것이리라.
하지만 자신 역시 그때보다 크게 진보했으니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다. 바로 안내하도록.”
“자네들은 여독을 풀고 있게. 밀린 이야기는 일이 전부 끝나고 느긋하게 하지.”
주호의 말에 위천강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고, 수신 호위들과 함께 신교의 심처로 향했다.
“이 안은 신교 내에서도 성역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교주 혹은 그 후계가 허락한 이만 들어갈 수 있지요.”
곧 도착한 곳은 천마전이라 불리는 성역이었다. 입구부터 희뿌연 안개가 뒤덮여 있는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는바. 곧 상태창이 그것을 감지하며 떠올랐다.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해석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상태창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는지 이전에 망량환혼진을 해석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진척이 느렸다.
못해도 하루 이틀로 끝나진 않을 것으로 보였기에 주호는 상태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가시지요. 제 뒤만을 따라오셔야 합니다.”
“알겠다.”
수신 호위들은 입구에서 대기한 체 주호는 선두로 나아가는 위천강의 발걸음을 따라 천마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자욱이 껴 있던 안개가 걷히고 그 웅장한 내부가 드러난다. 수라와 나찰을 상징하는 흉신악귀의 불상이 곳곳에 자리를 지킨다. 주호는 그것이 이 진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중앙은 비어있나.’
입구로부터 이어진 길은 넓은 공터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는바. 위천강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더 안쪽에서 기다리고 한 인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자가.’
당대 천하제일고수로 거론되는 유력한 후보이자, 십만 마인이 속한 천마신교를 이끄는 수장.
천마(天魔) 위천악.
단철량이나 남궁한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들과 비슷한 경지로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천마는 이미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해있어, 그 너머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바. 안타까운 것은 그 모습이 볼품없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왼쪽 팔이 텅 비어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찢긴 소맷자락이 펄럭이자, 그 안으로 끄트머리가 시커멓게 물든 절단 부위를 볼 수 있었다.
명백히 해소하지 못한 독이 신체를 갉아 먹고 있는 것일 터. 더불어 피부는 죽은 사람의 것처럼 창백했고,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은 빛을 잃어 새하얗기 그지없었다.
“…교주님.”
위천강은 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천마를 불렀다. 곧 얼굴 위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꿈틀거리며 두 눈이 천천히 뜨였고, 메마른 입술이 달싹이며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천강이더냐.”
“예, 저입니다. 옥체는 좀 괜찮으십니까.”
“항상 같구나.”
천마라고 하기에 패기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연약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천마와 시선을 맞춘 주호는 그의 두 눈이 멀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님인가. 네가 이곳까지 데려올 정도라면 중요한 사람이겠지.”
천마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것인지 그마저도 비틀거려 위천강이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그는 살포시 손을 들어 올린 것으로 거절하고는 제 의지로 두 다리를 우뚝 세웠다.
“경황 중이라 이리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시게. 본좌가 당대 신교를 맡은 천마이니, 자네는 어디의 누구신가.”
상상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주호는 옅은 한숨을 삼키며 담담한 태도로 포권했다.
“무림의 말학이 선배를 뵙습니다. 주씨 성에 이름은 호를 씁니다. 강호에서는 검절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음, 자네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라며 천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찹니다. 안에 들어가셔서 천천히 담소를 나누시지요.”
“그러자꾸나. 천강아, 차 좀 준비해주겠느냐.”
“알겠습니다. 곧바로 준비하지요.”
천마는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주호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고, 그의 손짓에 따라 맞은편에 착석했다.
“미안하군. 자네들이 생각하는 천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테니 말이야.”
“…아닙니다.”
“지독하지. 정말로 지독해. 내가 명령해서 만든 독이거늘, 결국엔 내 목을 옥죄어버렸어.”
천망을 만들라 지시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주호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악적이라 할지라도 저리된 이에게 묻기엔 너무 가혹한 질문이 아닌가. 하지만 천마는 그것을 눈치챈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패도라는 길을 걷는 방식이었으니.”
“저는 천강이의 부탁을 받아 교주님을 치료하러 왔습니다.”
“들었네. 무형지독을 정화했다고? 허나 소용없을 것이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 내 마기가 독을 태워버렸을 터이니.”
“…허나.”
“고집이 있는 친구로군. 내가 아무리 이리된 상태라 할지라도 천마라는 이름 앞에서 말꼬리를 잡긴 부담스러울 텐데. 좋네, 그 의기를 보아 허락해주지. 마음껏 살펴보게나. 천마의 몸이라면 자네에게 있어서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천마는 느긋한 태도로 하나 남은 팔을 뻗었다. 그것이 포기와 달관에서 오는 초연함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