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40화 (240/300)

#240화

“흠.”

강위혁은 흥미 어린 눈길로 제 옆을 바라보았다.

턱 끝까지 삿갓을 눌러쓴 채 자신의 옆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이 청년은 근래 중원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신진 고수였다.

이립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거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지에 올랐고, 전쟁 이후에는 그 누구보다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검신(劍神)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강위혁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며 손사래를 쳤지만, 막상 그와 마주하자 느껴지는 숨 막힐 듯한 기세에 풍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말주변이 없는 것인가.’

수려한 외모, 장대한 풍채,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까지. 소교주에게 들은 것과 똑 닮은 모습이었으나, 자신들과 합류해 본성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이쪽에서 먼저 몇 번 말을 걸어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거나 침묵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니.

소교주가 직접 청한 대상이 아니었으면 심히 기분이 나쁠 뻔했지만, 상황이 아쉬운 것은 자신들이었으니 꾹 눌러 참았다.

“소교주님께선 이 안에 계시오. 중원에서는 사제 관계였다지만, 이곳에서는 남들의 눈도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그러한 부분을 의식해주길 바라오.”

본래 사용하던 신교의 대전은 지난 싸움의 여파로 무너져 지금은 다른 건물에 임시로 터를 잡고 있었다.

강위혁이 그리 말하며 문지기를 바라보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옆에서 대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난 곧바로 손님과 함께 소교주님을 뵈러 가겠다.”

“존명.”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내부를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마뇌를 필두로 한 반란 세력이 총공세를 펼쳐오고 있는 상황. 소교주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본성을 지켜내기 위해 밤잠을 잊어가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소교주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곧 전각의 안쪽을 향해 도달한 강위혁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전했다. 본래의 신교라면 웅장한 환영식으로라도 했겠지만, 한참 내전 중인 지금은 언감생심일 따름이었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린다. 그것에 강위혁은 검절 일행에게 눈짓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왔다고.”

바로 직전까지 이곳으로 닥쳐드는 마인들과 혈투를 벌였던 위천강이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마음 같아선 교관님과 친우들의 이름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강위혁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설마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강 대주. 손님들에게 대접할 차를 부탁…….”

안부를 전하던 도중 말이 끊겼다. 위천강의 명령에 따라 차를 준비하러 막 밖으로 나갈 터였던 강위혁 역시 발걸음을 멈춘바. 그는 안쪽에서 감도는 이질적인 분위기에 천천히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누구냐, 네놈들은.”

위천강은 서늘한 표정으로 피를 닦아내고 있던 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삿갓을 푹 눌러 쓰고 있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얼굴을 노출하기 싫어 그러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친우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지 않은가.

“…….”

수신호위들 사이로도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던 차 위천강은 검을 내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삿갓을 슬쩍 들춰냈다.

“…웃어?”

그 안에 있는 입가가 비틀린 것을 본 위천강의 두 눈이 싸늘함을 내뿜었다.

제법 정교하게 흉내 내긴 했지만, 인피면구 따위로 주호의 분위기까지 베껴올 수 없는바. 그렇기에 위천강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고, 사내는 가볍게 한걸음 물러나며 그것을 피해냈다.

“이놈들!”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에 강위혁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는 서둘러 소교주로부터 그 악적들을 떼어놓기 위해 거칠게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날렸다.

콰아앙-!

전각의 입구가 내려앉으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른다. 동시에 여섯 인영이 그 위로 솟구쳤고, 조금 전 자신들이 들어온 대문의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적습이다! 모두 대비해!”

갑작스러운 소란에 마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강위혁은 악을 쓰며 대문 위에 있는 놈들을 가리켰을 때, 위천강은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나가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억에 없는 기운인데. 혼돈이 보내서 왔나?”

“눈치가 빠르군.”

찌익.

사흉수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도올은 씩 웃으며 얼굴을 덮고 있던 인피면구를 찢어냈다.

치기 어린 장난을 좋아할 것만 같은 경망스러움이 깃든 젊은 외모였다.

얼핏 보자면 위천강과 비슷한 연배로 보일 정도였으나, 밤하늘을 등진 채 좌중을 향해 뿜어내고 있는 기세는 절대 고수의 그것과 같았다.

“이 정도로 소란을 피웠는데도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을 보면 극마(極魔)에 이른 마두들은 모두 다른 곳에 있나 보지?”

극마(極魔)란 화경, 즉 입신지경을 뜻했다. 극마의 경지에 이른 마인 중 신교에 남은 것은 모두 여섯. 각각 셋씩 나뉘어 소교주와 마뇌의 파벌에 있었으며 오늘 밤의 승패를 나누기 위해 다른 곳에서 결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이 없어도 네놈 따위는 충분할 듯싶은데.”

“어리석은.”

도올은 히죽 웃으며 제 허리춤에 달린 곡도를 뽑아 들었다. 일반 검과는 달리 더 두껍고 기다랗게 휘어진 그것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빛난다. 위천강이 옅은 숨을 내뱉으며 검을 들었을 때, 대문 위에 있던 여섯 중 한 명이 사라졌다.

쉬아아악-!

날카로운 파공성이 허공을 베어 가른다. 위천강이 자신의 사각에서 그것을 눈치채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서걱.

소교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수신호위 세 명의 몸이 한 번에 잘려나갔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 검 끝은 위천강에게 도달했고, 종래엔 강위혁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달려든 끝에 가까스로 멈춰 세울 수 있었다.

“…….”

강위혁의 두 눈에 복잡함이 깃들었다. 어떻게든 막아내긴 했으나, 검에 서린 기파를 해소하지 못해 그의 두 팔은 걸레짝이 되어버린바. 근육이 뒤틀리며 찢겨나간 탓에 손끝이 절로 떨려왔다.

“이제 좀 실감이 드시는가?”

“…이놈!”

곧 주위에 있던 마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문 위에 있던 다른 다섯 역시 보고만 있지 않은바. 한 명 한 명이 초절정의 경지로, 주 전력이 떨어져 나간 마인 무리에 뛰어들어 후끈한 피 냄새를 피워 올렸다.

“소교주님, 물러나십시오. 이 자는 제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강 대주. 비켜.”

쿵.

위천강은 강하게 진각을 내디디며 마기를 피워 올렸다.

천마검식(天魔劍式)

일식(一式) 극마(極魔)

검 위로 맺힌 마기가 선명한 검강의 형태를 이루며 쏘아진다. 일전 주호와 싸울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 같은 동기 중 누구도 받아내지 못할 공격이었지만, 도올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곡도를 휘둘렀다.

파각.

힘껏 쏘아진 강기가 무참히 깨어져 나간다. 이미 입신지경에 다다른 그에게 있어 검강 따위는 우스운 것이었다.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든 위천강의 모습에 도올은 여전히 실실 웃는 표정으로 곡도를 손안에서 돌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차피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

“…뭐라?”

“내 역할은 네 세력을 줄이면 되는 것이거든. 너는 온전히 살려둔 채.”

“이런 개…….”

자신을 무시하는가. 추한 모습으로 적에게 삶을 구걸할 바엔 신교의 소교주로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런 기세로 위천강이 검을 휘둘러왔지만, 도올은 가볍게 곡도를 내미는 것으로 그의 공격을 모조리 무위로 돌려버렸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마교의 공멸(共滅)이니 말이야. 마뇌가 천마를 배신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딴마음을 품은 것은 의외였지만 말이야.”

“…뭐?”

“아, 아직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나 보네. 마뇌는 천마를 배신하고 혼돈의 뒤통수도 쳤다. 수십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듯싶더군. 정말 허점을 찔렸어. 설마 우리마저 배신할 줄은. 설마 자기가 마교를 자치해 천마라도 되려고 했던 걸까?”

자신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수작이다. 위천강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물러났을 찰나, 도올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뭐, 우리로선 그것도 나쁘지 않아. 애초에 두 번째 안은 신교에 내분을 일으켜 공멸(共滅)시키는 것이었으니.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적당히 숨통 정도만 틔워준다면 네놈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한 채 움츠릴 수밖에 없겠지.”

우리가 중원을 잡아먹는 동안은 말이야.

도올은 그것이 못내 즐거운지 아예 곡도의 날 끝을 손가락에 세우는 등 갖가지 묘기를 부렸다.

“…….”

위천강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다.

뭐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니, 총군사 마뇌니 말인가. 어차피 정체도 모르는 이들에게 농락당할 뿐인 것을. 신교에 돌아온 뒤로 수없이 무력감을 느꼈지만, 오늘 밤만큼 수치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위천강은 천천히 검을 세웠다.

마인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들을 이끄는 자신이 벌써 주저앉을 수 있겠는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격차는 절대적.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기에 천마(天魔)라 불리는 것이니.

“…좋은 마음가짐이다.”

“……!”

도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허리를 비틀었고, 목을 베어오는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 탓에 몸의 중심이 흔들린바. 불쑥 끼어든 다리가 자신의 발을 때렸고,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직전 손을 뻗어 바닥을 때리는 것으로 거리를 벌리려 했다.

우지끈-.

그러는 가운데 얼굴을 가격하는 주먹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제 왼팔을 제물로 바치며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했다.

“네, 놈……!”

도올의 눈이 부릅 뜨인다. 아무리 후미에서 기습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이토록 순식간에 궁지에 몰아갈 이는 그리 없었다. 후보지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종래에 그의 뇌리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청룡.”

“감히 날 사칭하다니. 그 값은 목숨으로 받겠다.”

쐐애애애액-!

주호의 손으로부터 쏘아진 신검이 빛살처럼 어둠을 꿰뚫는다. 시종일관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던 도올의 얼굴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떠올랐고, 바스러진 팔을 덜렁거리며 힘껏 곡도를 휘둘러왔다.

콰아아아아앙-!

큰 폭발과 함께 대문이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있던 위천강은 황급히 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쓰, 쓰러뜨린 겁니까?”

“…아쉽게도 이자밖에 받지 못한 듯싶구나.”

주호는 땅에 떨어진 신검을 주워들었다. 주위엔 선혈이 낭자해 있는바. 그 가운데엔 아직 펄떡거리며 피를 뿜어내고 있는 도올의 왼팔만이 남아있었다.

“…뭐, 날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니.”

주호의 차가운 눈이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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