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달빛 한 점 비치지 않는 밤이었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인지라 바람이 멎질 않아 야음을 틈타 기습하기에는 최적인 환경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대천산 곳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흉흉한 기세와 함께 능선을 타고 올랐다.
“…신교의 주위로는 절진이 펼쳐져 있다고 들었소. 그건 어떻게 할 것이오?”
외부 입교자 중 누군가 선두에 선 마인에게 물었다. 마인은 뒤쪽을 흘깃 바라보더니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부분은 이미 마뇌께서 조치하셨소.”
마뇌(魔腦).
천마신교의 총군사로 작금 그들이 속한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든든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으나, 정작 큰 싸움을 앞두자 왠지 모를 불신감이 싹터 오르는 듯했다.
대천산 북서쪽 방위로 배정받은 인원은 모두 오백여 명으로 그중 사백을 넘는 이들이 외부 입교자들이었다.
물론 다 같은 천마신교의 정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 합류한 이들이기에 서로가 외부 입교자들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는바. 오로지 그 가운데 섞여 있는 주호만이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골적이군.’
문제는 절진 쪽이 아니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외부 입교자들로만 인원을 편성했다는 것은 모종의 의도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미끼겠지요?
옆에서 따라오던 천후가 슬쩍 전음을 보내왔다.
다른 후기지수들도 다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는 듯 비슷한 표정.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찌 되었든 이 싸움은 저들에게 합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각자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하여라.
주호는 고개를 들어 어둠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적의를 표하는 붉은 점이 빼곡하게 찍혀 있다. 문제라면 이 앞뿐만 아니라 분명 아군이 있을 터인 뒤쪽까지도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입신양명의 길은 무슨.’
주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써 하남칠흉의 흉내를 내며 몇 주를 굴렀다곤 하나, 마인들은 그리 무르지 않은 듯싶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긴 것이 실상은 이쪽의 판단을 흐리게 하려는 것임을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들만 불쌍하게 되었군.”
“예?”
선우연이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바라봐오자 주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들은 천마신교의 본성 부근까지 도달했다.
마도 제일이란 명성에 걸맞게 산 위로 기다란 성벽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신문 역시 일개 문파치곤 충분히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으나, 천마신교와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였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신호와 동시에 일곱 방향에서 총공세를 개시할 것이오. 우리는 다른 쪽에서 시선을 끌어주면 한 발자국 늦게 진입해 적진의 안쪽을 가로질러 소교주 측의 요인을 제거하면 되오.”
“…만약 상대하기 힘든 고수가 있다면 어찌합니까.”
“이쪽엔 하남칠흉이 있소. 감찰 대주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잘 부탁드리오.”
“맡기도록.”
주호는 마인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본디 하남칠흉은 명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주호를 비롯한 후기지수 일행이 용조 부대에 있을 당시 벌인 일이 크게 화자가 되었는지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봐왔다.
“초절정의 경지에 있다지.”
“다른 형제들도 최소 절정이라 하네. 이 정도면 장로급이 와도 문제없겠지.”
“저 여성이 요화(妖花)인가. 미색이 참으로 뛰어나군.”
갑작스럽게 자신들에게 쏠린 이목에 선우연을 비롯한 그들은 바짝 기세를 피워 올리며 이쪽이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음을 표했다.
삐이익-!
그렇게 얼마쯤 대기했을까, 고요했던 밤의 어둠 사이로 날카로운 한 줄기 고음이 지나갔다.
자연의 소리와는 다른 명백한 이질적인 요소. 그것을 들은 마인은 때가 되었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하겠소이다.”
신뢰를 얻으려는 듯 선두는 마인들이 지켰다. 오십 남짓한 그들이 먼저 높이 솟은 성벽 위를 박차고 올라 넘어갔고, 이내 그 위에서 밑을 향해 손짓하며 어서 올라오라는 뜻을 전했다.
“…괜찮겠지?”
누군가 불안감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주호는 그저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 가볍게 땅을 박찼고, 단 이보(二步)만에 성벽을 올랐다.
“…….”
먼저 올라와 있던 마인들이 그것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성벽을 오르기 위해 각자 최소 칠보 이상은 발을 내디뎠던바. 단순히 보법으로만 보아도 서로 간의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지.”
주호의 신위를 본 외부 입교자들이 술렁일 때, 천후가 일행을 돌아보며 짧게 내뱉었다.
그러곤 주호와 같이 성벽을 박찼고, 이내 그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게 천마신교.”
안쪽으로 보이는 넓은 풍경에 남궁연은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정도를 걷는 몸으로 마교에 올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남들은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겪는 중이라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올라왔는가. 보다시피 다른 곳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이쪽을 지키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오. 그러니 이대로 돌파하겠소.”
마인의 말처럼 느껴지는 인기척은 극히 소수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다급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있을 뿐 자신들의 앞길을 막아 세우는 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거 잘하면.”
천마신교의 위명답지 않게 손쉽게 외성의 벽을 넘어 안으로 진입하자 좌중 사이로 일말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정말로 이번 작전으로 공을 세울 수 있다면 마교에서도 입신양명의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닥-!
그들은 곧 성 내부를 가로질렀다.
빼곡히 자리 잡은 전각과 건물 사이를 질주했고, 마치 누군가 잘 닦아 놓은 듯 뻥 뚫린 경로를 따라 더 깊숙이 진입해나갔다.
‘함정은 기정사실. 문제는 서로 간의 노림수가 무엇이냐인데.’
정말로 이 별동대에 힘을 실을 작정이었더라면 어중간한 전력을 보냈을 리 없었다. 설마 자신만 믿고 이런 인원으로 구성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이 오백여 명으로 시선을 끌어야 할 만큼 다른 곳에서 중요한 작전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긴.”
“천마신교 본성이요. 조금 전까지 우리가 달리던 곳은 외성으로, 이곳부터는 진정한 천마신교라 할 수 있지.”
웅장한 붉은색 성벽이 산세를 압도하는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경관에 다른 이들 역시 기가 짓눌렸는지 신나게 달려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안쪽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주호가 툭 내뱉자, 마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 생각보다 시선을 잘 끌었나 보군. 애초에 소교주 쪽 세력은 이쪽과 비교해 인원이 한참이나 모자란다오. 공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겠지.”
서두르자는 마인의 재촉에 그들은 천천히 내성을 향해 접근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선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바. 그렇기에 무인들은 용기를 얻고 과감히 몸을 날리며 그 안으로 진입했다.
-모두 긴장해라.
하지만 주호의 눈에는 안쪽에서 수두룩하게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인원들이 보였다.
이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애초에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그의 목적인바.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벽을 넘었고, 이내 본성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하군.”
무인들은 천천히 주변을 수색해나가기 시작했다. 주호를 비롯한 하남칠흉은 후미진 곳에서 닥쳐올 적들을 기다리고 있는바. 그러던 중 어느 무인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무슨 일이오.”
“…길잡이를 하던 마인들이 보이지 않소.”
“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인들의 신형이 싹 사라져 버렸다.
오십에 달하는 인원이기에 티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지만, 천마신교 본성에 들어와 있다는 긴장감에 다들 시야가 어두워졌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건.”
선우연이 슬쩍 시선을 보내오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애초에 마인들이 조심스레 몸을 내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고, 잠잠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이제 어떻게…….”
“제길,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다 싶었어!”
“지금이라도 후퇴해야 하는 것이 아니오?”
“하남칠흉! 적호,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무인들의 시선이 곧 한쪽에 자리한 주호에게로 쏠린다. 나름대로 마인들과 관계가 있는 그라면 무엇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주호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도망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검을 뽑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게 무슨.”
쏴사사사사-!
무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으로부터 암기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수, 파편, 그리고 작은 화살까지. 수많은 암기가 떨어져 내리며 무인들을 덮쳤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으하하하! 이 잡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발을 들이미느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고작 이백여 명 정도로 이쪽의 숫자보다 훨씬 적었지만, 풍기는 기세는 가히 일당백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쳐라-!”
암기의 세례가 끝나자 날카로운 살기를 뿜어내는 마인들이 순식간에 닥쳐왔다.
“으아아악!”
“보, 본인은 신교에 귀의하기 위해 찾아온, 끄아악!”
“사, 살려줘!”
살아남은 이들이 무참히 도륙당한다. 그때까지 후미에서 느긋이 있던 그들에게까지 마인이 닥쳐온바. 주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선두에 선 마인에게 말했다.
“본인은 검절이다. 마검에게 이쪽이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아아, 들었지.”
철패도 담백산.
상태창에 떠오른 그 이름을 읽으며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서둘러 안내하라며 시선을 보내자, 철패도 담백산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제 어깨 위로 커다란 도를 들어올렸다.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일곱 명째인가.”
“…무엇이?”
“스스로 검절이라 칭하며 소교주에게 안내받기를 원하는 후안무치한 놈이 말이다.”
“…….”
그 말에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는 소리는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것일까. 보아하니 자신들이 하남칠흉의 신분을 빌린 것까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이쪽의 이름으로 소교주 쪽에 농간을 부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소교주에게 안내하라. 그리한다면 내가 진짜 검절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 지껄인 놈은 모두 이 도 아래 짓눌려 죽었지. 그리고…….”
담백산은 씩 웃으며 주호에게 도 끝을 겨누었다.
“검절은 조금 전 이미 소교주님 쪽으로 향한 차다. 그러니 같잖은 흉내는 그만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