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주호가 조장으로 등극하며 행했던 일이 알려졌는지 호기심에 기웃거리던 이들도 자취를 싹 감췄다.
더러는 소문을 듣지 못한 듯 다시 남궁연을 향해 껄떡거려오는 일이 있었으나, 선우연과 당천유가 나서서 그 사지의 관절을 손수 반대 방향으로 꺾어주었다.
“…전쟁 전에 사파의 무인들이 왜 그리 기고만장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키는 대로 행해도 되니 제 세상이 된 것 같군요.”
“대충 몇 놈 조지니 전부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사리는군요.”
다만, 그 과정에서 조금 이상한 생각에 눈뜨려 하기에 주호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것은 덤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하남칠흉 중 대형의 무공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마인들 사이에도 알려졌는지 쉬이 건드리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여섯 번의 전투에 출격했고, 상대의 수장을 쓰러뜨리거나 포로로 삼는 등 모든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괜찮겠느냐?”
도중 주호는 철대환을 향해 슬쩍 물음을 던졌다.
그는 아직 자신이 사도맹의 출신이라는 것을 제 동료들에게 밝히지 않고 있는바. 본인이 그럴 생각이 없다면 주호 역시 입에 담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주어도 맥락도 없는 말이었지만, 철대환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이놈들은 마교 이상으로 이 세상에 있어 해악과 마찬가지인 놈들이니.”
이전이라곤 하나같은 출신이었던 이들과 싸워 죽이는 것이 괜찮냐고 배려해주는 것일 터.
하지만 철대환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적들을 처치했고, 기세를 보아선 홀로 사도맹을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불타올랐다.
그것을 보고 다른 이들도 의욕을 얻었고, 여섯 번의 전투가 끝났을 때 그들은 모두 절정의 경지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하남칠흉은 모두 절정의 고수다. 그 소문이 마교 진영에 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히 대형인 호(虎), 항상 핏빛 기운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여 적호(赤虎)라 불리게 된 주호의 이름은 상부까지 올라갈 정도였다.
“자네를 비롯한 칠흉 모두 신교에 입교하는 것이 거의 승인이 났네.”
그렇게 여섯 번째 전투 직후 잠시 휴식을 취할 찰나, 주호는 상부의 호출을 받아 조용한 공간에서 자신을 신교 감찰대의 진웅이라 소개한 마인과 마주했다.
“‘거의’라는 것은?”
“아아. 형식상의 이야기니 걱정하지 말게. 실상은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야. 사소한 행정 절차가 몇 개 남은 것뿐이니.”
진웅은 손사래를 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적호, 라고 했었나. 혹시 본교에 귀의하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내심 궁금해서 말이지.”
“조사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 개인적인 흥미라고 해두게. 하남칠흉의 기세가 예전에 들었던 것보다 크게 판이해진 것 같아서 말이네.”
“시답지 않은 이유군.”
주호는 순간 그가 이전의 하남칠흉을 마주한 적이 있는 것이라면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 분위기를 보니 자신들이 소문과 달라 의구심을 품은 것뿐인 듯했다.
“처음엔 사도맹에 몸을 의탁하려 했었지. 일곱이나 되는 식구이니 어디 정착할 곳이 필요했거든.”
“그 이야기는 들었네. 전선에서 제법 활약했다지.”
“활약은 무슨.”
주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도맹은 우릴 담기에 너무 작고 볼품없는 놈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죽음을 가장해서 빠져나온 것뿐이지.”
“작고 볼품없다?”
“애초에 시정잡배들이 모여 덩치를 키운 곳이다. 윗대가리들은 고고한 척하지만,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면 시정잡배나 다를 것 없는 파락호 놈들인데, 놈들과 한솥밥을 먹으라고?”
쿵.
주호는 탁자를 내리치며 제 기세를 부풀렸다. 그 상한선은 진웅보다 딱 한 수 낮은 수준으로, 그는 흡족한 얼굴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신교에 입교를 신청했는가.”
“사도(邪道)에는 실망했을 뿐이다. 그래도 마도(魔道)의 제일인 천마신교는 다르리라 생각했지.”
“들어와 보니 어떤가. 뭐, 아직 언저리에서만 구를 뿐이었겠지만.”
그 물음에 주호는 자신이 정말로 마인이라도 된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더할 나위 없다. 전쟁이 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군.”
“하하하!”
진웅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박장대소하며 탁자를 두들겼다. 그러곤 잠시 뒤에 진정이 되었는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표정과 함께 주호에게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현재 본교 내부가 혼란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소문이라 생각했거늘, 사실이었나 보군.”
“소교주를 비롯한 역도 무리의 반항이 거세다고 하더군. 마뇌께서도 그 일로 골치가 여간 아프신 것이 아닌 듯싶어.”
“마뇌?”
“본교의 총군사이시다. 은거 중이신 교주님을 대신해 현재 교를 이끌고 계시지. 그런데 그 간악한 소교주 무리는…….”
진웅은 인상을 쓰며 열변을 토해냈다.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딘가 이상한 구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바.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로 일방적인 주장만 피력했을 뿐이었다.
“대천산 내부는 현재 저 일당이 점거했다네. 마뇌께서는 밖에서부터 다시 세력을 모으며 기회를 기다리고 계시지.”
“대천산 내부가 점거당했다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네. 그저 같은 교인끼리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보 후퇴한 것뿐이니.”
“그렇군.”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신교의 세력이 가미되어 있으니 이러고 있던 차에 벌써 무너진 상황이었으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진웅은 마교 내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듯 어려 정보를 그에게 풀어놓았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네.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공을 세운다면 확실한 인식을 새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대천산 쪽에 합세해라?”
“말귀가 빠른 친구군. 조만간 총공세가 있을 것이네. 이쪽의 마인은 전선을 유지하느라 빼기 어려우니 외부 입교자들의 손을 빌리는 것이지.”
주호는 그 말에 동요를 억눌렀다.
얼마간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자신들이 대천산으로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반격을 시도한다면 마검과 권마를 위시한 사천 감숙의 마인들 역시 이곳 청해를 향해 총공세를 해올 터.
“어떤가. 제법 흥미로운 제안이라 생각하는데.”
“부정하지 않겠다. 혹할 만한 제안이로군. 허나.”
툭.
주호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서늘한 눈빛으로 진웅을 바라보았다.
“난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아. 내 밑에 딸린 이가 여섯이다. 그러니 확실한 무언가를 제시해라.”
그의 전신으로 적해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진웅은 그 당당한 태도에서 오히려 호감을 느낀 듯 주호의 잔을 채워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정도의 고수면 주력으로 삼을 만하지. 다른 칠흉 역시 최소 절정 이상이라지. 적어도 하나의 대를 맡기엔 충분하겠군.”
“대라면?”
“대주 급을 말하는 걸세. 마침 형제도 여섯이니 손색이 없군. 전투로 인해 상위 고수들에도 손실이 있으니 자리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야.”
“믿어도 되겠지?”
“앞으로 함께 큰일을 도모할 것인데 말로만 하겠는가.”
진웅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격은 드세고 힘은 넘친다. 권력 욕심도 제법 있어 보이고, 야망도 배포에 비해 작지 않군.’
즉, 이용하기 딱 좋은 이가 아닌가. 조금만 구슬린다면 제 형제들과 함께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터.
“하남칠흉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겠지. 마도칠흉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으하하!”
맞잡은 손을 흔들며 진웅은 다시금 크게 웃었다.
***
덜컹.
천마신교의 휘장이 달린 마차가 가도를 달려나간다. 진웅과 대담을 하고 난 지 하루 뒤의 날이었다.
“…이 자식들. 이런 좋은 게 있으면 진작 주지.”
선우연이 새로 받은 무복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마차 안에는 주호를 비롯한 하남칠흉이라 불리는 일곱만이 자리했다. 대천산으로 가는 인원이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진웅이 주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배려해준 것이었다.
“드디어 대천산으로 가는군요. 길었네요.”
남궁연은 기지개를 켜며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간 시커먼 남정네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주호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 두 눈을 부라리며 지켜주었다곤 하지만, 쌓인 피로가 적지 않았다.
“실상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위천강에게 합류할 때까지 다들 긴장의 끝을 놓지 말도록.”
“…만나면 바로 머리부터 쥐어박을 겁니다.”
주호의 당부에 당천유가 제 주먹을 쓰다듬는다. 그런 차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악비산이 그에게 말했다.
“소교주이지 않는가. 마교 내에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일진데 그 가운데서 머리에 꿀밤을 때리면…….”
“…매달리겠군.”
당천유는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 이후로도 마차는 별 탈 없이 길을 달려 나갔다.
완전히 마교의 영역이 되어버린 청해의 후방이라 그런 것인지 다두곡 부근에선 간간이 볼 수 있던 연합군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달려 청해에서 신강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도달한바. 그들은 정오를 맞아 통째로 빌린 객잔에서 식사하던 와중이었다.
“앞으로 하루만 더 가면 신강에서 사람이 마중 나올 것입니다. 진 선배께서 그쪽에 잘 이야기를 해놓았으니 아마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요.”
주호 일행을 비롯한 외부 입교자들의 인도를 맡은 것은 진웅의 후배로 같은 감찰대 소속인 마인이었다.
그는 주호에게도 사뭇 정중한 태도를 보였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전의 마인들처럼 건방을 떨지 않았다.
“…….”
식사 중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같은 외부 입교자들을 살폈다. 각각 다른 마차로 이동하기에 얼굴을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던바. 무공 수위는 일류 상위에서 절정 중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그 출신 역시 사도맹, 무림맹, 그것도 아니라면 어디 흔히 널린 중소 문파의 출신도 여럿 있어 보였다.
‘전부 다 해서 오십 정도인가. 이쪽에서만 인원을 보내는 것이 아닐 테니 최소 몇백은 된다는 소리이군.’
아마 일부 상위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고기 방패로 쓰일 운명일 터. 파악을 끝낸 주호는 이내 그들에게 신경을 거두었다.
툭, 데구르르-.
그러던 가운데, 활짝 열린 창과 문 사이로 동그란 무언가가 굴러 들어왔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을 찰나, 이내 그것에서부터 새하얀 운무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었다.
“저, 적이다!”
“모두 각자 대응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객잔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후기지수들 역시 주춤하며 주변을 경계하는바. 그 직후 밖에서부터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무림맹 기동타격대 청룡단이다! 마인들은 순순히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라!”
“…이건, 뭔.”
선우연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후미진 곳에 청룡단이 왜 있으며, 어째서 자신들을 습격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청룡단이란 말에 사실 여부 관계없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청룡단이라니! 무림맹의 일선 무력 조직이지 않은가!”
감찰대의 마인 역시 사색이 된 표정으로 밖을 살피는바. 그의 뒤에서 함께 청룡단을 바라본 주호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로군.’
객잔을 둘러싼 무인들은 청룡단과 똑 닮은 복장을 했고, 사뭇 정순한 기운까지 잔뜩 풍기고 있었다.
이런 경황 중에 본다면 정말로 그리 착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 하지만 상태창의 눈까지는 피하지는 못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