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장강 전선과 영환산의 중간으로 가덕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본디 토착민들로 이루어진 백여 가구 정도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사천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 짐을 싼 채 피난길을 떠났다.
마교가 장강 이북을 점령한 뒤 그곳에 남아있던 몇몇조차 자취를 감춘 상태. 하지만 지금, 야음을 틈타 마을 안으로 진입하는 한 무리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표식을 찾아볼까요?”
악비산과 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텅 빈 마을의 전경을 살폈다.
분명 마교의 협력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아리송한 표정. 그 가운데 주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다.
“따라오너라.”
오직 주호만이 그 너머에 있는 막대한 기운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자신과 같은 입신지경의 기세. 너무나도 강대하기에 오히려 이들의 감각이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는 담담한 태도로 길을 걸어갔고, 한 장원 앞에 멈춰 섰다.
끼이익.
문이 절로 열리며 방문객들을 환영한다. 후기지수들은 짐짓 경계 어린 태도를 보였으나, 주호는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서둘러 준비하길 잘했어.”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던 이들은 남궁연의 속삭임에 노인의 정체가 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권마(拳魔)임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비슷한 계열의 무공을 익힌 철대환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앞의 마두를 바라보았다.
“계획은?”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나. 대사를 시작하려면 여러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
주호의 말을 일축한 권마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뒤쪽에 있던 후기지수 일행을 살폈다.
그들과 함께 대천산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한바. 혹시라도 무슨 수작을 부려올까 싶어 주호가 슬쩍 몸으로 그의 시선을 가리자, 권마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다들 어디 명문가 출신이라고 광고하고 다닐 생각인가. 다 얼굴이 너무 번드르르해! 이래선 근처도 가지 못하고 정도의 간자라고 붙잡힐 것이야!”
“…그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주호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모습을 숨기는 암행에 익숙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인바. 제 나름대로 각자 평범한 행색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얼굴이나 태를 타고 흐르는 은은한 광채까지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했지. 이 권마의 철두철미함에 감탄이나 하시게나.”
딱.
권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마인들이 잽싸게 앞으로 나아가 보자기에 쌓인 꾸러미를 건넸다.
후기지수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고, 주호 역시 보자기를 받자마자 풀어헤쳤다.
“…변장하라는 것인가.”
“인피면구를 쓰느니 할 것도 없네. 행색만 잘 갖춘다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야.”
내용물은 흑색으로 이루어진 단색 무복 몇 벌을 비롯한 잡다한 물품이었다.
“다들 얼른 갈아입도록. 자세한 손질은 내 수하들이 해줄 테니 그것만 잘 기억해도 반은 갈 것이야.”
“…….”
후기지수들이 자신을 바라봐오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장원 안쪽으로 들어가 무복을 갈아입었다.
“…옷만 맞춰 입었을 뿐인데 제법 그럴듯하군요.”
당천유가 짤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주호부터 남궁연까지 일곱이 모두 흑색 무복으로 갈아입자 마치 어디 조직에서 나온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권마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인은 응당 그 눈에 독기를 품고 있어야 함이야. 지금 자네들 눈은 어떤가. 구김 없이 자라온 그 동글동글한 눈매로는 절대 마인의 흉내를 낼 수 없어!”
“…이게 뭔.”
그 어처구니가 없는 연설에 천후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현직 마인이 말하는 와중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주호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리 묻자, 권마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경지만 높지, 강호 경험은 헛똑똑이군.”
“내부에도 협력자가 있을 텐데, 그쪽을 통해 들어가면 되는 일 아닌가.”
“말하지 않았는가. 대천산 내부 쪽은 분명 소교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우세하지만, 외부에서 들어가는 길은 마뇌 쪽이 꽉 틀어막고 있다고 말이야. 자네들은 마뇌의 편으로 저곳에 합류할 걸세.”
“…들었던 계획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인생사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몇 개나 있겠는가. 겸허히 받아들이게. 그리고 이편이 더욱 변수가 없을 테니.”
주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의 말대로 대천산 외부 쪽을 마뇌가 틀어막고 있다면 그들의 편에 합류하기 위해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할 터.
“어디 보자.”
흩어진 마인들이 후기지수 각각의 머리 형태와 모양새를 다듬어주고 있을 때, 권마는 두꺼운 서류 중 무언가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일곱. 마침 딱 있군. 자네들의 인원수에 맞는 이들이.”
“무엇을?”
“자네들은 이제 하남칠흉(河南七凶) 이네.”
“하남칠흉? 그들이 마인이었나?”
무림맹의 무사로 있을 때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동료 무사가 이야기하기로 하남 인근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고수였다.
“마도는 무슨. 사파의 시정잡배였지. 전쟁이 일어난 직후 사도맹에 가담해 전선에 나왔다가 이쪽의 함정에 빠져 죽었다. 관련된 이들도 모두 죽었으니 이름을 빌려 오기엔 제격이겠지. 행색도 제법 꾸몄으니 이 정도면 필요 없는 의심을 살 일도 없겠지. …문제는.”
권마는 주호 뒤에 있던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흑색 무복을 입고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투박하게 묶었다고 해서 그 청초한 미모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갓 내린 눈처럼 희고 고운 피부는 여전히 빛을 내며 존재감을 알렸으니, 권마는 그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의 여식이었지. 외모가 뛰어난 것도 너무 독이 되는군.”
“…문제없어요.”
권마의 말을 들은 남궁연은 제 앞에 선 마인의 손에서 도구를 빼앗아 들더니 얼굴을 단장했다.
새하얗던 피부의 색을 살짝 죽이고, 눈가의 붉은색을 진하게 칠한 것으로 그 인상이 확연하게 달라지는바. 청초한 미인에서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마녀로 순식간에 모습이 뒤바뀌었다.
“잘 어울리오, 남궁 소저.”
“그렇소. 사도맹에 있었더라면 흑매화라 불렸을 것 같소.”
선우연과 철대환이 감탄을 내뱉자, 그녀는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어떠냐는 태도를 보였다.
권마는 잠시간 침음성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귀찮은 것은 자네가 감수하게. 난 해줄 건 다해줬어.”
“감사를 표하지.”
주호는 솔직한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권마 정도의 위치라면 시시콜콜한 일은 밑의 사람에게 맡길 수 있을 터. 마교의 장로 정도 되는 이가 이런 자리까지 나와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뭐, 지난 일의 은원은 잊고 잘 부탁하네. 자네들이 대천산에 무사히 입성해 본격적으로 나서는 순간 우리 역시 청해 본대를 향해 총공세를 가할 걸세.”
“전력은 저쪽이 더 많다고 하지 않았나?”
“전체적인 규모를 보자면 그렇지만, 전쟁은 머릿수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 고수의 비율은 이쪽이 우위에 있다. 어차피 밑의 마인들은 머리를 따라가니 수뇌의 목만 치면 될 것이야.”
말은 쉽게 했지만, 그들 역시 힘든 싸움이 되리라. 권마는 할 일이 전부 끝났다는 듯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손을 휘저으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부탁하지. 검신(劍神).”
“…소문은 빠르군.”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간에서는 그의 활약상을 보고 검신이라 칭송하며 무림맹주 검선 단철량과 남궁세가주 검제 남궁한과 같은 수준으로 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물론 숫자를 보자면 일부일 뿐이고, 주호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 그들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많다고 생각하는바. 권마는 전해 듣고 놀리듯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검신이라.’
혀끝을 울리는 메아리가 이토록 마음에 들 수 없었다.
아직은 낭설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나, 이 전쟁이 끝나게 된다면 저리 웃어넘길 수 있을까.
“가자.”
주호는 짧게 웃음을 토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자네, 소식 들었는가.”
“전쟁 통이라 사방에 들려오는 이야기 투성일 진데 그리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나.”
청해 다두곡(多頭谷).
천마신교 본대 십이 번대 진지.
천마신교는 전쟁 중에도 포교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로잡은 포로, 혹은 현지인, 혹은 저 멀리서 오는 이들에게까지 신교에 입교할 것을 권했고 그것을 처리하는 창구까지 만들었다.
그중 십이 번대는 온전히 외부인으로만 이루어진 예비 성격의 부대였다.
신교에 입교하고 싶다고 하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경지의 고수는 물론 환영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각자 쓸모를 보여야 겨우 그 자격이 주어졌다.
물론 대다수는 무림맹과 사도맹이 보낸 별동대와 살수들을 막기 위한 고기 방패로 쓰였을 따름이었다.
“하남칠흉 말이네. 열흘 전인가 입교를 신청한.”
“아, 그 일곱 명? 대형 쪽은 분위기 죽이더만. 사람 한둘 죽여 본 무게가 아니었어. 그런데 그들이 왜?”
“지금 나가 있는 작전이 끝나면 정식 입교시키라는 공문이 내려왔다네.”
“드디어? 솔직히 조금 늦었군. 사도맹의 별동대를 거의 박살내다시피 해놨는데. 나는 적어도 이틀 전에 통과될 줄 알았거든.”
“듣기로는 대천산으로 직접 부를 참이야. 지금 그쪽이 시끌시끌하지 않은가.”
“…쉿. 조용히 하게. 병영에서 그 이야기는 금기이지 않은가. 흘러나간다면 목 따일 각오를 하라고 하던데.”
“우리끼리니 상관없지 않은가. 하여튼 그 정도 고수들은 외부 입교자 중에서도 흔하지 않으니 안쪽으로 돌릴 모양이야.”
“출세했군. 누구는 태생부터 신교에서 일해도 하지 못하는 것인데.”
“어쩌겠나. 이왕 중원으로 나온 김에 어디 천년 설삼이라도 주워 먹으면 모르겠는데.”
“…그건 그렇고 하남칠흉에 그 홍일점 있지 않은가. 듣기로는 요화(妖花)라 하던데. 간부 중에 눈독들인자가 많네. 과연 멀쩡히 대천산으로 갈 수 있을지.”
“아서게. 대형이란 작자가 얼마나 살벌한지 보지 못했는가. 일전에 껄떡거리던 사두 형제도 개박살이 났는데.”
“그나저나 신기하군. 소문으로 듣기로 하남칠흉은 그렇게까지 고수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우리가 뭐 어쨌다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두 마인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갔다.
막 작전에서 복귀했는지 살벌한 기색의 일곱이 그 앞에 서 있던바. 마인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