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이후 나온 말이었다.
주호는 그동안 철대환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바.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듯해 보이기에 그 옆에 있던 나무에 기대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
“농담이다. 처음엔 그저 조금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을 뿐 그리 의식하진 않았다. 이 강호에 기인이사가 얼마나 많겠느냐. 그저 그중 한 명의 제자라고 생각했지.”
“…그렇습니까.”
놀려졌다는 사실에 철대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보인 것도 당연하리라.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은 딱히 내세울 특징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한눈에 알아차렸다면 그것도 놀랄 일이었다.
“의심을 시작한 것은 작년 말이 되겠구나. 산서에서 검마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을 때였지.”
주호는 살짝 복잡해진 눈으로 철대환을 바라보았다.
검마(劍魔) 철무혁. 서로 엮인 은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손에 죽었다.
철대환이 사도맹주의 손자인 이상 검마와도 혈연관계에 있을 터. 사뭇 걱정이 들었지만, 철대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 이야기야 진즉 들었습니다. 교관님의 별호가 중원에 세간에 퍼진 계기가 아닙니까.”
“…개의치 않는 것이냐.”
“물론 신경 쓰인다면 신경 쓰인다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저는 집을 나올 때 모두와 절연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복수 운운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고, 그럴 만큼 사랑받고 자라지도 못했으니까요.”
애초에 자신이 뭘 한다고 해서 할 수 있겠냐며 철대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절연(絶緣)이라고?”
주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마의 죽음에 그리 개의치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설마 가문과 절연한 사이라니. 막연히 위천강처럼 경험을 쌓기 위해 출가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조부께선 제가 아직 어릴 적에 쓰러지셨습니다. 마교에서 개발한 천망이란 독이라지요?”
“그래. 작금 천마 역시 같은 상황이지.”
“조부이신 철혈패도는 사도맹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가문의 이목은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었죠. 바로 옆에서는 급성장한 사도칠패가 위협해오고, 밖에서는 통제를 벗어난 이들이 날뛰었으니 어땠겠습니까.”
아이가 자라기엔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철대환은 그리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배부른 투정인 것은 압니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 아버지께서 사도맹주에 오르시면 저 역시 어디 요직 하나를 차지했겠지요.”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다?”
“흔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속한 곳에 환멸이 나는 것은. 저는 적어도 사람 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철대환은 노을이 저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도맹. 중원 절반을 가르는 사도 문파의 집합. 그 규모는 정도 무림을 상징하는 무림맹과 비견되곤 했다.
하지만 그건 허울 좋은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아주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면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는바. 무식하고, 근본이 없고, 날 것이며, 이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이들을 과연 무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들 역시 나름대로 삶이 있을 터지만, 굳이 그것에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스스로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사도에선 정도를 걷는 이들을 위선쟁이라 하지만, 위선이라도 어디입니까. 적어도 사람의 흉내는 내니 다행이지요.”
“신랄한 이야기구나.”
끊임없이 토해진 이야기들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최소한 위천강은 자신이 천마신교의 출신이라는 것과 마인이라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철대환은 그와 정반대의 경우인바. 뿌리 깊은 곳까지 박힌 혐오감은 쉽사리 지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도맹과의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재료로 쓰이는 겁니까?”
철대환은 체념 어린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교섭? 재료라니?”
갑작스럽게 나온 이야기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뭐,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마교를 상대하는 데 공동 전선을 펼쳤다고 해도 완전히 한편이 된 것은 아니지요. 무림맹에서도 전쟁 이후의 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사도맹의 적통 후계자가 손에 굴러 들어왔는데…….”
철대환은 말을 내뱉던 중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던 주호를 보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닙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냐.”
“맹주님이랑 친하시지 않습니까.”
“아까 이곳으로 오면서 말씀드렸긴 하다만, 그 처리는 전부 일임받았다.”
“…그렇다면.”
“당장 전쟁 직전까지 닥친 마교의 소교주도 순순히 보내준 마당에 공동 전선을 펼친 사도맹의 후계에게 그럴 이유가 있을까.”
“하하…….”
자신을 무슨 중요한 존재로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그는 주호의 말에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음을 깨닫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난 품에 들어온 사람은 내치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도록.”
“…제가 눈물이라도 흘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철대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제법 감동한 눈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허면 사도맹으로 영영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이냐.”
“예. 이미 그곳은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이대로 강호를 떠돌다가 적당한 곳을 잡고 들어가야지요. 다행히 친우를 잘 사귄 덕분에 갈 곳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지?”
악비산은 백호의 후계로 내정되었다. 같은 사신수인 현무는 그것을 보고도 못내 부러워하는바. 자신도 백호처럼 적당한 후계자를 좀 물색해 달라고 했지만, 그간 여러 일로 바쁜 차라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악비산의 예를 들며 사신문에 관해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들은 철대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현무, 말입니까.”
“비산도 뼈를 깎는 수련 끝에 겨우 인정받았다. 너도 그리할 수 있겠느냐.”
“…사신문의 저력은 대강 짐작이 갑니다. 긴 역사 가운데 홀로 그 정도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문파보단 그곳이 낫겠지요. 허나 비산 그 친구는 악가의 출신이 아닙니까. 정도 문파라는 확실한 꼬리표가 있지만, 저는 사도맹의 출신, 그것도 철혈패도의 계보를 잇는 직계인데…….”
믿을 수 있겠느냐.
그 망설임이 서린 눈동자에 주호는 작게 웃으며 철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인이었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내 두 눈을 믿으니 말이야.”
어쭙잖은 각오로 시련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무언가 모종의 의도를 지닌 채 후계에 입후보한다고 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제풀에 떨어져 나가게 될 터.
“생각은 하고 있거라. 자세한 것은 이번 일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곰곰이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철대환의 모습에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이야기가 뒤틀린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히 잘 매듭을 지은 듯싶었다.
***
저녁 이후 주호 휘하 후기지수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엔 주예향을 비롯한 후배 네 명까지 동석한 자리로 사뭇 장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되었다.”
주호는 이전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넷에게도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정보의 노출을 우려해 마교의 소교주니, 대천산으로 가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맹주의 명을 받아 극비 작전을 떠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렇군요.”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안 되겠죠.”
팽우혁은 주호의 생각보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휘 역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당소혜도 그리 섭섭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위험한 거죠?”
“그러니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는 거겠지.”
주예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당소혜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천산으로 가는 길은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바. 이들도 자신의 몸을 건사하기 어려운 상황일진데 아직 어리숙한 후배들까지 챙기기는 어불성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곳에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향아. 소혜 옆에 꼭 붙어 있도록 하여라. 당 가주께도 부탁드렸으니 신경 써주실 것이다.”
단철량과 맹의 중진을 비롯해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의 우두머리가 대거 참전했다.
그러니 당정학의 어깨도 많이 가벼워진바. 지금은 연합군 지휘관에서 물러나 당가의 병력을 비롯해 자신 밑에 할당된 이들만을 이끌었다.
“알겠어요. 가급적이면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을 테니 오라버니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올해가 지나기 전엔 돌아올 테니 잠시간의 이별이겠구나.”
인사를 마친 그들은 곧 막사를 떠났다. 이제 장내엔 주호를 비롯한 여섯 후기지수만 남은바.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선우연과 당천유를 바라보았다.
“결정은 내렸느냐.”
다른 이들은 이미 가겠다고 확고히 의사를 내비친 상태. 아직 고민하는 것은 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묻자, 선우연이 먼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절하면 머리채라도 잡고 끌고 가실 기세이신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군.”
주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지라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마음 같아선 청룡단 전원을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너무 이목을 끌어모으는바. 자신이 이곳을 떠나면 청룡단은 전선을 이탈해 사천으로 오고 있는 백호의 밑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슬쩍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마두 한 명이라도 목을 따지 못한다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지당하신 말씀이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단철량이 말했던 것처럼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일.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런 곳으로 내몰고 싶겠나.
‘어깨가 무겁군.’
후기지수들은 이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무인이 되었으나, 저들은 다 자신을 믿고 기꺼이 이들을 내어준 것일 터였다.
“밤이 되면 그 즉시 이곳을 이탈해 나아간다. 목적지는 이곳과 영환산 중간에 있는 가덕이란 마을이다. 그곳에서 마교 측 협력자와 만난 이후 구체적인 계획을 건네받을 것이다.”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요?”
남궁연이 살짝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당연히 믿을 수 없지. 그러니 항상 의심하며 움직여라. 그 가운데 믿을 것은 여기 있는 일곱밖에 없을 테니.”
그 말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나름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강호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이들도 대천산은 전부 초행인바. 주호 역시 마인은 여럿 잡아 죽였지만, 그 안으로 직접 발을 내디디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되는 마음이 들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천강이 그 자식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데 도와주러 가야지.”
“소교주니까 반란을 진압한다면 제법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요?”
“…하하.”
툭 내뱉어 나온 농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다. 가끔은 선우연과 당천유의 실없는 소리도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