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자세한 설명을 들은 뒤 단철량인 헛웃음을 흘렸다. 배포가 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교의 소교주임을 알고서도 제 밑에 끼고 있었다니.
“…자네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렇다 할지라도 제발 내게 귀띔 좀 해주게나.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당황하는 꼴을 면치 않겠는가.”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심장이 떨어질 뻔했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보다 정정하신 분이.”
“한창때의 청년이 뒷방 노인과 창창함을 겨루려 하는가. 양심이 있는 것인지, 쯧.”
마교의 소교주가 중원에 들어왔다는 것은 무림맹으로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잠행이 무려 이년에 가까이 계속되었었다면 마교의 최상위 수뇌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일 터.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 내 왈가왈부하지 않겠네. 가급적이면 부디 얼마 전에는 내게 알려주시게나.”
단철량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차를 마셨다. 마찬가지로 찻잔을 움켜쥐고 있던 주호는 그 말에 살짝 머쓱한 미소를 짓더니 제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저, 그것이.”
“…또 무언가 있나?”
단철량의 눈이 가늘어진다. 하지만 주호는 이번엔 정말로 숨기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을 내뱉었다.
“제자 중 철대환이란 아이가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마 부맹주의 아들인 듯싶더군요.”
“사도맹 부맹주의 아들? 사도맹주 철혈패도의 손자라고?”
그건 또 무슨 이야기냐는 듯 단철량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의심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산서에서 검마와 일전을 벌인 직후의 일이니까요.”
“…벌써 반년도 더 전의 일이 아닌가.”
“단순히 성이 같은 것은 너무 빈약한 이야기이니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요.”
사실 조사랄 것도 없었다.
검마와의 일전 이후 다시 학관으로 돌아와 교관 일을 하던 중 후기지수들의 상태창을 보며 성장세를 확인하고 있을 때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
‘동류의 무공이었지.’
철대환은 검마처럼 검법을 익히지 않았지만, 수라쇄혼권처럼 겹치는 무공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뒤로부터 의심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선 확신을 가진 채 단철량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 어찌하겠나. 그 부분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마교라면 모를까, 사도맹과 손잡은 지금 그 부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자신이 신경 쓸 사안도 아니라는 듯 단철량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부분은 마교 쪽이니.”
“그렇네, 마교의 반란. 이걸 어떻게 해야 이쪽의 이득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단철량의 눈동자에 복잡함이 서렸다. 이미 몇 시진이나 갑론을박을 토해내며 회의를 진행했음에도 뚜렷한 대안을 찾을 수 없던바. 아니, 사실 딱 한 가지 있긴 했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던 차 주호가 내뱉은 말은 그의 고민을 어렵지 않게 해결해주었다.
“…….”
단철량은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은 차가 식을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 저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자네를 두 번이나 사지(死地)로 내모는군.”
무황의 비동으로 보낸 것은 나름의 배려였다.
세상은 무공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관심을 쏟을 다른 것은 얼마든지 있고, 그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 경험차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는 이야기가 다른바. 전쟁 이전이라도 고민했을 터인 판국에 한창 전쟁 중인 지금은 말 그대로 사지나 마찬가지였다.
“단 노인도 아시다시피 이편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마교와 전쟁 중이니 공식적으로 지원을 보내는 것은 어불성설. 그렇다고 전쟁의 판국을 가를 반란을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요.”
“가볍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네.”
“마검이 경고했던 서장에서의 움직임도 결국엔 현실로 닥쳐왔지 않습니까. 당장 마교와 전선을 펼친 가운데 그들까지 막기는 어렵겠지요. …피해도 더 크겠고.”
전쟁은 아직 두세 달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 죽거나 다쳐 전선을 이탈한 이들이 부지기수. 지금은 승리한 전공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 비수는 밑바닥에서부터 스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겠습니까. 제자가 저리 도와달라고 애타게 소리치는데. 가주는 것이 스승 된 도리겠지요.”
“…애틋하기 짝이 없군. 나중에 마교에서 한 자리 받겠어.”
“단 노인께서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무림 역사상 최초로 맹과 마교 동시에 직위를 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참 영광이로군요.”
주호의 실없는 소리에 단철량은 쓴웃음을 흘렸다.
차는 이미 다 식어버린 지 오래.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전부 마시더니 비어버린 잔을 천천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많이 힘들 걸세. 마주치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할 테고, 막상 대천산에 도착한다고 하여도 환영받지 못하겠지.”
“그렇겠지요.”
“성공적으로 일을 완수한다고 하여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걸세. 물밑에서 벌어지는 일은 으레 그렇지 않은가.”
“딱히 대의를 쫓거나 명성에 집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해야 하기에 가는 것이지요. …단 노인은 운명이란 것을 믿으십니까?”
“운명?”
진지한 이야기 중 그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단철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삼류 무사에 불과했던 제가 고작 사 년을 거쳐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천운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네의 노력이 큰 지분을 차지한 것은 변함이 없네. 하지만 자네는 그것이 무엇의 필요로 인해 이루어진 사실이라 보는가?”
“하늘은 필요로 하는 자를 높이 들어 쓴다고 했습니다. 무림맹 후문을 지키는 하급 무사가 입신지경의 고수가 된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딱히 특별한 이유를 부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눈앞에 닥친 일에 도망치지 않을 것이리라 말씀드릴 뿐이지요.”
“…의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몰랐네. 보아하니 회의 이전부터 결심했나 보군.”
단철량의 말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을 비롯한 마두들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부터 막연하게 생각은 했습니다. 어쩌면 대천산에 가야 할 수도 있겠다. 설사 그것이 누군가 정한 작위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주호는 기이한 이끌림을 느꼈다.
요 몇 년간 강호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급격한 변화인 만큼 그 마무리도 비슷할 터. 마침표를 찍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설령 그렇다 한들, 내 인생은 계속될 터니.’
지금은 그때를 위한 초석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
쉬익, 쉭.
허공을 향해 주먹이 힘껏 내질러진다. 수천, 수만 번을 들어왔지만,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이 거슬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후우.”
상반신을 풀어헤친 채 초식을 수련하던 철대환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시간은 저녁에 이르기 조금 전. 부대 전체에 휴식이 내려졌기에 그사이를 틈타 조용한 곳에서 홀로 수련에 매진 중이었다.
꽈아악.
주먹을 쥐자 굵직한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바위도 부술 힘을 내뿜는다. 하지만 철대환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쯤 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작년 입관 당시 일곱 명의 후기지수는 각자 조금의 차이가 있었으나, 저마다 동일한 출발 선상에 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제법 상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떠나간 위천강을 제외하고 천후, 악비산, 남궁연은 모두 절정의 벽을 넘어섰다.
이제는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감히 가늠조차 되질 않을 정도로 서로 격차가 벌려진바. 아직 벽을 눈앞에 둔 채 허덕거리고 있는 것은 자신과 선우연, 그리고 당천유뿐이었다.
조급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안다. 하지만 쉬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었다.
다시 한 번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기수식을 취하던 철대환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교관님?”
무슨 일이 있어 다른 동료들이 찾으러 온 줄 알았건만, 나무에 기대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주호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괜히 못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움직임에 생각이 많구나.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괜히 저 혼자 뒤처지는 것만 같습니다.”
평소처럼 아니라며 담담한 태도를 보일까 생각했지만, 철대환은 이내 사실대로 제 생각을 내뱉었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주호는 나무에서 등을 떼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생각해보면 너와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지.”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철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궁연과 긴밀한 사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천후와는 사신문이란 곳으로 함께 묶여 있고, 악비산도 근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선우연은 화산이라는 이름 아래 인연을 쌓았고, 당천유는 그의 동생인 당소혜를 치료해주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었다.
오직 자신만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리 개의치 않았다. 별생각 없이 정천 학관에 입관한 것이고, 주호 밑에서 사사할 수 있었던 것도 천운이 따른 것이리라 생각했다.
“이야기 이전에 가볍게 대련이나 하자구나.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지.”
“…좋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철대환은 기수식을 취하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쉬아악!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거친 파공성이 귓가를 스친다. 철대환은 쌓인 감정을 담아 하나하나 초식을 펼치며 주호를 뭉갤 듯 공격해 나갔다.
툭.
구부러진 손가락은 마치 매의 발톱을 흉내 낸 듯하다. 단단한 바위마저 찢을 위력이었으나, 가볍게 밀어낸 주호의 손짓에 제 기세를 잃고 말았다.
종래엔 허공을 움켜쥘 뿐인 헛손질에 그친바. 철대환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제 절기를 모두 펼쳐 나갔다.
수라와 같이 혼을 찢는다고 하여 수라쇄혼권, 철을 짓이김에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하여 무영철쇄장이라 하였다.
그가 발하는 일권 일장 그 어느 것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모자란 것은 조급함에 빠져 넓게 보지 못하는 시야임이라.
단숨에 철대환의 상태를 파악한 주호는 방어 일변도로 나가던 태세를 순식간에 뒤바꿨다.
주먹이든 장법이든 모두 팔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는바. 권각술을 사용하는 하수를 상대하려면 그 품에 파고드는 것만큼 쉬운 상대법이 없었다.
“…크윽!”
철대환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내 큰 나무에 뒤를 막히고 말았다.
서걱─.
주호의 손날이 가볍게 휘둘러진다. 철대환은 제 목이 서늘해짐에 따라 본능적으로 그곳을 더듬었지만, 베인 것은 그 뒤에 있던 거목일 뿐이었다.
그그그극.
장정 둘이 팔을 벌려도 지름을 전부 채우지 못한 나무가 쓰러져 내린다. 철대환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고, 창백한 얼굴로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시, 심검(心劍)입니까?”
상대의 마음을, 의지를 베는 검.
자신을 너머 나무를 베어낸 것이 그것이냐고 묻는 말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리 느꼈다면 그것은 심검이겠지.”
“…….”
철대환은 그 말끝에 묻어 있던 어렴풋한 현기를 잡아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깨달음의 실마리를 주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기에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것에 집중하려 했으나, 주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너는 어찌하여 사도맹을 나왔느냐.”
그 말에 여러 생각으로 복잡하던 철대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