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알고 있던 사람이 있습니까?”
“없다. 맹주님이라 할지라도 아직 모르고 계시지.”
선우연의 물음에 주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위천강이 떠나갔을 때 남궁연에게 슬쩍 귀띔해준 것을 빼고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다.
무림 맹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후기지수들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그러면 저희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천후 저 친구는 교관님께서 말씀해주실 거라면서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가.”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야기해도 괜찮건만, 혹시라도 이쪽에 폐가 될까 싶어 입을 다문 것이리라.
그는 한쪽에 있는 주전자로 목을 축이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 한들 천강이 너희를 기만한 것은 아니다. 떠날 때 말하더군. 너희를 대하는 태도만은 진심이었노라고.”
오히려 뒤에서 움직인 것은 자신 쪽이 아니던가. 중원 무림을 수호하는 신비 세력이라곤 하기에 음험한 짓을 여럿 저지른 기억이 있어 쓴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랬었습니다. 품행이 경망되어도 그것에 가식은 섞여 있지 않았지요.”
“그렇네. 가식으로 대하는 태도를 느꼈다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겠지.”
그와 제일 가깝게 지냈던 선우연과 당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 역시 모두 공감하는 표정. 실제로 위천강은 입관 시기를 제외하곤 자신이 우위에 있다며 오만한 태도를 보인 적은 몇 없었다.
“…그나저나 반란 소식은 뭡니까? 마교는 천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절대 권력 구조 아니었습니까?”
잠자코 있던 악비산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그것에 위천강과 함께했던 과거를 얘기하던 다른 이들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곤 주호를 바라봐왔다.
“전에 말했었지. 혈천신교의 세력은 중원 곳곳에 숨어들었다고. 마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중원 쪽은 사신문을 비롯해 여러 곳이 분전한 덕분에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마교는 아니었는 듯싶다.”
“그렇다면 혈천신교와 그들의 손을 잡은 변절자가 문제였겠군요.”
철대환의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천강을 중심으로 모인 구세력이 그들과 대립하고 있다.”
“천마는 뭐하고 있답니까? 제 아들이 그렇게 분전하는 데.”
선우연은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중독되었다.”
“…예?”
하지만 이어진 주호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옆에 있던 당천유와 철대환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헛웃음을 토해냈다.
“아니, 그 천마가 말입니까? 뭐 만마(萬魔)의 정점이자 하늘이 내린 악(惡)이니, 뭐니 하면서 휘황찬란한 위명을 지닌 천마가?”
“천망이라는 독이다. 사도맹주를 은거에 이르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독이지.”
“…….”
그 말에 철대환이 입을 다물었다. 찰나 그에게 시선을 보냈던 주호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낮에 마교의 사절이 찾아왔다. 마검과 권마, 그리고 고루혈마였지.”
“…하나같이 살벌한 이름이군요.”
“권마라면 일전에 교관님과 안휘에서 맞서 싸웠던 이가 아닌가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남궁연이 미간을 모으며 끼어들었다.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고,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절로서 대화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저들은 본진이 불에 타고 있는데 전쟁을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으니.”
“…그렇긴 하겠네요.”
천우희를 구할 치료제를 구하러 갔던 때에 당했던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던 듯 남궁연은 서늘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밀이라 하지 못하지만, 마교 내부도 복잡한 상황인 모양이다. 출정 나온 병력도 전부 세력이 갈린 탓에 이도 저도 못 하는 꼴이 되었다더군.”
“그렇다면 반란 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거기가 문제다.”
주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마검의 모습을 떠올렸다.
구태여 가덕이라는 곳에 사람을 남겨놓을 테니 연락을 취하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이쪽에 전하는 무언가의 저의가 깔린 것일 터.
‘설마 나보고 마교의 본단으로 가라는 것은…….’
마교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그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고, 소수의 병력일지라도 저쪽에 합류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며, 안쪽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어 배신할 위험이 없는 자.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나.’
주호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교관님?”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선우연이 의문을 표했다. 잠시간 침묵을 지킨 주호는 이내 생각을 정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마검은 위천강의 서신을 가져왔다. 내용은 그곳의 사정을 설명하는 평범한 내용이었으나, 그 행위 자체에 요점이 있었군.”
“설마…….”
눈치가 빠른 남궁연이 먼저 그 뜻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주호에게서 대략적인 정보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에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무엇이오, 남궁 소저?”
“…교관님께 도움을 청한 거예요. 자신을 도와달라고.”
“누가? 위천강 그 친구가?”
“네, 틀림없어요.”
“…도움이라니. 여기서 대천산의 일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당천유가 당황해하며 의문을 토해냈다.
단순히 마교의 반란일 뿐이라면 굳이 주호가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검이 이야기했던 서장 쪽의 파동이 사실이라면 마교의 일은 중요한 국면을 가르는 요소가 될 수도 있는바. 섣불리 내뱉긴 어려운 이야기였다.
“최악의 경우엔 대천산에 가야 한단 말입니까. 오랜만에 그 뺀질거리는 얼굴을 보겠군.”
악비산은 벌써 마교행이 확정된 듯한 모습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천후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철대환 역시 그러는 것이 맞으리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끄응.”
당천유의 물음에 선우연은 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상황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가운데 뭘 하겠다고 대천산에 간다는 것인가.
“아직은 가정의 이야기다. 그리고 설사 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 홀로 갈 것이니.”
“그렇습니까.”
“흐흐.”
천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악비산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절대로 홀로 가게 두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남궁연도 당연스럽다는 듯 슬쩍 몸을 주호 쪽으로 기울였다.
“…밤이 늦었다. 그만 쉬도록 하여라.”
주호는 그런 이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막사를 떠났다.
잠시 뒤, 그의 기척이 전부 사라진 가운데 남궁연 역시 자리를 떠날 찰나 선우연이 입을 열었다.
“남궁 소저, 그리고 자네들. 정말로 대천산으로 갈 것인가? 마교의 본산이네. 섣부른 결정으로 갈 곳이 아니야. 이번엔 정말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네.”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는가? 그러면 말이라도 해주세.”
당천유 역시 그 옆에 합세해 그들을 바라본바. 천후와 악비산, 그리고 남궁연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대표로 남궁연이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단지 교관님께서 가신다고 하면 따라갈 거예요. 따로 아는 것은 없고, 단지 그뿐일 뿐이에요.”
“…천후, 악비산 자네들도?”
“그렇네.”
“그렇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에 선우연과 당천유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분명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괜스레 소외된 느낌이 들어 사뭇 섭섭했으나, 어쩌겠는가. 자신들이 참아야지.
“…장문인께 이야기하면 뒤집히겠군. 그냥 몰래 다녀와야겠네.”
“나는 그나마 다행이로군.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교관님 꽁무니에 꽉 붙어 다녀오라고 하실 테니 말이야.”
막사 가운데 복잡한 상념이 서린 긴 한숨이 가득했다.
***
사흘 뒤, 무림맹에서 출발한 연합군의 본대가 장강 전선에 합류했다.
본대는 총 칠만에 달하는 인원으로 삼만은 감숙 전선으로, 사만은 사천 전선으로 이동해 각각 전선의 전력을 공고히 했다.
더욱이 포함된 병력은 어쭙잖은 중소 문파의 무인이 아닌, 구파일방과 세가 연합 그리고 그 속가를 비롯한 진짜배기 고수들이 속해있는바. 연합군의 질적인 수준은 단숨에 몇 배로 뛰어올랐다.
본래라면 고착화된 장강 전선을 뚫고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며 사천에 들어온 마교의 군세를 몰아낼 작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에서 일어난 반란과 마검이 가지고 온 소식은 잠시 그들의 발을 주춤하게 했다.
“…그렇다면 회의는 이쯤 마치도록 하겠소. 각 문주 및 지휘관께서는 각자 이끄는 부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조치하길 부탁드리는 바이요.”
연합군 본대가 합류한 직후 다섯 시진이나 이어지던 기나긴 회의가 끝났다.
안건이 안건인 만큼 방침을 신중히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바. 그마저도 먼저 정보를 입수한 당정학을 비롯한 이쪽의 지휘관들이 대략적인 뼈대를 짜놓은 덕분에 시간이 비약적으로 단축된 것이었다.
“…신명나게 싸울 일만 남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곳에 와서도 지지부진한 회의에 발목을 잡혀 있는 꼴이라니.”
맹주 막사로 돌아온 단철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뒤를 따라온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게 맹주께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상대 쪽에서 천마라도 나서지 않는 이상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그 이전까지는 자네가 어떻게 처리해줄 것이 아닌가. 직접 싸우지 못해도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일은 없으니 말일세.”
“하하…….”
사뭇 뻔뻔한 말이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주호였다.
전장에 나왔음에도 맹주의 거처는 무림맹에 있을 때와 그리 다름없었다.
그는 손수 차를 끓여 주호에게 대접했고, 자신 역시 천천히 그것을 음미하며 기나긴 회의에서 오는 여운을 떨쳐내었다.
“그래서 회의 때 나온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겠지?”
단철량은 과연 노장(老將)답게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주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꿰뚫었다.
주호는 잠시 차를 마시며 머뭇거렸다. 마교의 소교주가 자신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명제. 그것을 숨긴 것인데 무어라 한 소리 듣지 않을까.
“…뭘 그리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가. 어울리지 않게 고민 그만하고 어서 말이나 해보세.”
“무어라 하시지 않으실 겁니까?”
“자네가 내게 해준 것이 있는데 다그치기라도 하겠는가. 실제로 이쪽 전선을 준비하고 연합군을 무사히 준비하는데 자네 지분이 반절 이상은 들어가 있는 상황이거늘.”
넉살 좋게 웃음을 지으며 말해오는 단철량의 말에 주호는 짧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교에서 반란을 이끄는 마교의 소교주 있잖습니까.”
“그렇지.”
“사실은 학관에서 제 제자였습니다. 위천강이라고,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지요? 하여튼 숨기려고 숨긴 게 아니라 중요할 때 써먹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하하.”
“…….”
그 말을 들은 단철량의 얼굴이 웃는 상태로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