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31화 (231/300)

#231화

서신을 전부 읽은 주호는 그것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이들은 서신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한 듯싶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마검을 바라보았다.

“어쩔 텐가.”

“…….”

서신을 적은 것은 위천강이었다.

안에 적힌 내용은 홀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 그렇기에 주호는 고개를 돌려 당정학에게 말했다.

“마교의 소교주가 보낸 것입니다. 이들의 말처럼 화평을 맺고 싶다고 합니다.”

“…내용을 볼 수 있겠는가.”

당정학이 슬쩍 손을 뻗어 서신을 향할 찰나, 마검이 그것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어이쿠, 안 되네. 소교주께서는 그에게만 이것을 보여주라고 하셨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마검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당정학은 인상을 찌푸렸다.

“검절 이 친구에게만? 대체 둘이 무슨 관계에 있기에?”

“음. 말을 정정하겠네. 정확히는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보여주라 하셨지. 만일 맹주가 있다면 맹주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네.”

“감당? 지금 당가의 가주이자 무림에서 독패라 불리는 내게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했나? 자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가!”

기가 차지도 않는 발언에 당정학은 언성을 높인다. 하지만 마검은 이전과 같은 태도로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게.”

“어허!”

“어쩌겠는가. 누가 배신자이고 배신자가 아닌지 구분할 도리가 없으니 말이야.”

쿵.

당정학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만천화우를 쏟아낼 것 같은 살벌한 표정으로 마검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우리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는 말을 지껄인 것인가.”

“글쎄. 나야 모르지. 굳이 자네들이 아니라고 해도 자네들 곁에 있는 이들이 배신자일 수도 있고.”

“더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

“단일 세력으로 오랫동안 마도에 군림했던 신교조차 교주께서 중독되어 발이 묶이셨을 정도네. 종래엔 반란을 일으켜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지.”

마검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물며 수많은 문파와 조직을 연합군이라는 이름 아래 그러모아 묶은 자네들이 서로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가.”

“…….”

당정학은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 기세는 아주 날카로운 것으로 툭 하고 건드린다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의 전조를 보는 듯했다.

“문제는 중원으로 나온 본교의 군세가 모두 한 편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 말은?”

분노한 당정학을 대신해 주호가 대화의 고삐를 틀어잡았다.

“사천과 감숙에 있는 선봉대의 숫자는 각각 일만 오천과 이만으로 도합 삼만 오천에 이르지. 이들은 확실히 소교주 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네. 어젯밤까지 정리를 마쳤으니.”

정리, 주호는 그 단어를 입안에서 곱씹었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을까. 마검은 담담히 이야기했지만, 주호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청해 쪽에 있는 본대이지. 오만 명이나 되는 마인의 전권을 틀어잡고 있는 것은 혈천신교와 결탁한 대표적인 세력의 수장인 귀창(鬼槍)이다.”

“…빌어먹을 새끼지.”

뒤쪽에 있던 고루혈마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툭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귀창이라면 같은 마교의 장로 중 한 명일 텐데.”

“녀석은 옛적부터 혼돈과 짝짜꿍이 잘 맞았다. 화산파를 비롯해 여러 문파에 강시 같은 존재들이 습격한 적이 있을 터지. 그것도 녀석들의 소행이다.”

“각각 색에 따라 흑내이, 백내이라 불리는 것들이지.”

“남은 한 놈은 마뇌인가.”

“백가 그놈은 내 손수 목을 딸 것이네. 그놈이 교주님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감히 배신해?”

세 마두는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배신자에 대한 처단을 운운했다.

“사천과 감숙에 삼만 오천. 청해의 본대가 오만. 그것이 전부인가?”

“흠.”

주호의 물음에 마검은 팔짱을 꼈다. 군세의 숫자 역시 중요한 내부 정보에 들어가는바. 쉽사리 발설하는 것이 저어됐지만, 저들의 협력을 끌어내려면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이것 참, 밑천 다 털리게 생겼군.”

“어떡하겠나. 이쪽이 을인데.”

마검의 투정에 권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방에 삼만 정도의 병력이 있다. 이들은 중도 세력으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더군.”

“…말은 중도지만, 여차하면 저쪽에 붙겠다는 소리인가.”

“정확히 보았네. 박쥐같은 새끼들이지.”

주호의 말에 마검은 너무나도 쉬원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천마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자 이리 뿔뿔이 사오 분열하는 모습이라니.

“소교주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이라면 마인들의 여론을 끌어오기는 힘든 것인가?”

어느덧 화를 가라앉힌 당정학이 물었다. 제법 그럴 듯한 이야기였으나, 마검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신교에 절대적인 것은 천마(天魔) 이외엔 없다. 소교주도, 우리 같은 장로도 약하다면 언제든 바뀔 수 있지. 그나마 적통이라는 상징성이 있어서 저렇게 뭉칠 수 있는 것이네.”

“그렇다면.”

“문제는 아까 말했듯 서장 쪽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야. 포달랍궁의 무승들은 물론이고 남만의 아귀들은 이미 누군가의 지령을 받는 모양새로 움직인다는 보고가 있었네. 그 원흉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겠지.”

“…서장.”

그 말은 전과는 달리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정사연합군의 전선은 감숙-사천을 잇는 형태로 펼쳐져 있다. 청해에 자리잡은 마교의 본대가 물러나지 않는 이상은 언제까지고 그것을 유지할 터.

하지만 서장의 세력들이 용솟음친다면.

“운남.”

“그래, 그곳밖에 없지.”

사천의 밑으로 운남이 있었다.

서장과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그곳은 애초에 중소 문파만 있는 곳이라 특별히 구심점이랄 것이 없었다.

더욱이 운남 소속의 무인들 대부분 사천으로 몰려와 있는바. 빈집이라도 다름없는 상황에 공격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운남이 무너지면 그 뒤로 귀주, 광서, 호남까지 파죽지세로 뚫릴 겁니다.”

“호남까지 밀린다면 호북, 강서, 그리고 중원 무림의 심장인 하남과 안휘도 코앞이네.”

당정학을 비롯한 연합군의 고수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휘부는 항상 최악의 가정을 심중에 두고 움직여야 했다.

그런 가운데 작금의 상황은 머리가 절로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군.”

마검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후우.”

“이쪽은 돌아가고 싶어도 청해의 본대가 가로막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쪽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몰래 나아가 신교에 도움을 준다면 모를까.”

마검은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

그사이 당정학은 고민에 빠졌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가. 무림맹 쪽으로 들어온 정보는 그도 확인을 마쳤다. 신뢰도가 팔 할이 넘으니 사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일 터.

마교도 그렇지 않고서야 장강에서 물러나 영환산으로 물러날 이유가 없으니 설득력이 있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끝내 그가 결론을 내린 것은 주호에게 은밀히 전음으로 묻는 것이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신중히 알아보아야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차피 전쟁을 잠시 멈춘다고 하여도 이쪽의 손해는 없어. 부상자가 많으니 태세를 가다듬는 것도 좋은 일일세. 그사이 기습해오거나 다른 꿍꿍이를 펼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맹주님을 비롯해 다른 문파의 고수들이 곧 도착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장강 상류 일대를 차지하려는 것이 그들의 합류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려고 했던 것이니 조금 기다려도 될 듯싶습니다.

-그런가.

주호와의 대화를 끝낸 당정학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검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좋을 대로. 자비를 구하는 것은 우리니 말일세.”

전혀 그런 태도가 아니었지만, 마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했다.

“이곳과 영환산 중간에 가덕이라는 곳이 있더군. 생각이 정리된다면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게.”

마검은 다시금 주호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고, 그것을 끝으로 회합은 막을 내렸다.

***

마교의 마두들이 가져온 정보로 인해 연합군의 수뇌부는 늦은 밤까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정보의 진위 여부뿐만 아니라 상정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구비했고, 머지않아 본대가 온다면 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나갔다.

“후우.”

굵직한 사안들이 끝났을 때가 돼서야 주호는 지휘 막사를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제법 서늘해진 밤공기가 그를 반긴다. 몸은 멀쩡했지만, 정신이 지쳤기에 잠시간 바람을 쐴 찰나 누군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교관님.”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이냐.”

남궁연의 등장에 주호는 흘깃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도 저물어 가고 있는 늦은 시각이다. 설마 이때까지 자신을 기다린 것일까.

“네. 저만이 아니에요. 다른 이들도 전부 교관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군.”

주호는 천후에게 위천강의 정체를 알려주었던 낮의 일이 떠올랐다. 그 뒤로 여러 일이 많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가벼이 넘어갈 사안은 아니었다.

“뭐라고들 했느냐.”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요. 저야 옛적에 미리 말씀해주셔서 괜찮지만요.”

“그 아이들에겐 설명이 더 필요하겠구나.”

“네. 그래서 제가 대표로 온 거예요. 아, 제가 알고 있었다는 걸 티내진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연을 따라 막사로 향했다.

다른 곳들은 전부 불이 꺼진 상태였지만, 그들의 막사만은 열린 문 사이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후기지수 일동은 심각한 얼굴을 짓고 있던바. 주호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향이랑 다른 아이들은 없구나.”

“후배들은 상관없는 이야기잖습니까. 밤이 늦어 전부 재웠습니다.”

“잘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

주호는 침상 한쪽에 걸터앉으며 마른세수했다. 정신적으로 피곤했으나, 이들의 눈을 보니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지. 위천강은 마교의 소교주가 맞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선우연의 물음이었다.

주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라니.”

“입관 심사 당시 그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때를 기억하느냐.”

주호는 고개를 들어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위천강과의 만남에는 그녀가 엮여 있는바. 남궁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저에게 치근덕거렸었죠.”

“…그 친구답군.”

당천유가 쓴웃음을 짓자, 주호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익힌 무공은 사람의 기운에 민감하다. 물론 말 그대로 처음부터 마교의 소교주란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가 마인이라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지.”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상태창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바. 그렇기에 주호는 그것에 관해서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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