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빌어먹을 새끼들.”
후퇴를 명한 궁기는 검을 내팽개친 채 전장을 이탈했다.
명확하게 승기를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다. 연합군 본대의 양동을 때까지만 싸움을 지속한다면 먼저 후속 병력이 도착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 아니,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청룡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게 만든 마교 수뇌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래서 문제야. 마교를 장악할 것이었으면 확실하게 대가리를 쳐내고 이쪽 사람을 박아놓았으면 될 일을 무슨 상생이란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한 탓에…….’
원초적인 문제는 혼돈이었다.
정도 무림의 대협이 아니라면 천마라도 되고 싶은 것일까. 구태여 번거로운 수작 없이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될 일 아닌가. 그렇다면 전선이 이리 지지부진할 이유도 없었고, 다잡은 청룡을 눈앞에서 놓칠 일도 없었다.
“내 오늘 마인놈들의 기강을 잡겠다.”
암천은 거두어들였지만,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 몸 사리기에 급급한 돼지들. 뭐가 약육강식의 천마 신교라는 것인가. 감투를 틀어쥐고 있는 놈들은 고이고 고인 썩은 물이었고, 제 이권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사지에 처박는 것은 예삿일. 이전까지는 감히 자신에게까지 수작 부려오지 않았기에 콧방귀를 끼며 넘어갔지만, 오늘의 후퇴 명령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
하지만 본대 진지에 도착한 궁기는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본디 환하게 밝혀져 있어야 할 그곳은 어두컴컴했고, 경계를 서는 무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천의 장강 전선을 지키는 마교 선봉대의 숫자는 대략 이만여 명. 오천에 달하는 인원은 감숙 쪽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지원 갔고, 천오백은 자신과 함께 연합군의 별동대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으니 남은 본대는 만 삼천 명가량의 숫자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얼핏 가늠할 수 있는 기척은 고작 백여 명에 달하는 것이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 본대가 후퇴했다고 합니다. 이곳을 버리고 두 번째 거점에서 전선을 다시 구축했다고…….”
“뭐? 별동대 쪽이 양동이었나? 연합군의 본대가 허를 찌르는 것이었고?”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황급히 진지 안에 들어갔다 나온 수하의 말에 궁기의 얼굴이 굳었다.
단순히 마교 수뇌부의 지랄이라 생각했던 것이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린 듯했다.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본대가 연합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는 것뿐. 하지만 수하는 그 말에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남은 이들에게 듣기로는 또 이야기가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최대한 물자를 회수하고 이동하라면 명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쪽도 복귀하는 대로 영환산 부근의 진지로 후퇴하라는 전언을 남겼답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혼돈이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오합지졸이 아니었거늘,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만에 이렇게 여실 없이 드러나는가.
궁기는 마음속에 조용히 칼을 벼렸다. 한두 명 쳐 죽이는 것으로 화를 풀려 했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을 망친 것을 보니 수뇌부의 나태가 심각한 듯싶었다. 어차피 장로급들은 이쪽의 눈치를 보느라 관망할 터이니 실무진들만 족치면 간단히 그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터였다.
“…영환산으로 이동한다. 우리도 최소한의 물자만 챙긴다.”
그렇게 얼마 뒤, 그들은 밤이 한참이나 깊었을 때가 돼서야 두 번째 거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의 두 번째 거점은 영환산 부근으로, 사천 일대를 기다랗게 가로지르는 산맥이었다.
수성에 있어 천혜의 요새였기에 천마신교 수뇌부 역시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리라 예상했지만, 연합군이 그보다 더 뒤쪽으로 전선을 세워준 덕분에 별다른 손실 없이 손쉽게 그곳을 접수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치열한 싸움 끝에 장강 일대까지 밀고 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물러날 줄이야.
“…뭐,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 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든 서둘러 처리하고 다시 전선을 이으면 그만인 일, 그렇게 그들은 영환산의 전선으로 진입했다.
“……?”
영내에 접어들자 곳곳에 자리한 마인들이 보였다. 하지만 패전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고, 그 규모도 이전과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새로이 충원된 이들인가 싶었지만, 그 면면도 전부 익숙한바.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않고 후퇴한 것이 명백해 보였다.
“이런 씨팔……!”
궁기는 제 수하들을 내팽개친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뎌 수뇌부의 막사로 향해 그 문을 열어젖혔다.
“…….”
작전 회의 중이었는지 마교의 수뇌를 비롯해 각 부대의 지휘관, 그리고 장로들과 마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기는 그런 이들을 보며 거칠게 제 기세를 피워 올리며 이죽거렸다.
“정사 연합군에게 꼬랑지를 말고 도망친 놈들이 사이도 좋군. 말하라, 후퇴 신호를 보낸 것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목 위에 달린 그 쓸모없는 살덩이를 내려놓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니.”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그들의 목을 쳐낼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인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서로 간에 침묵이 흐를 찰나, 상석에 앉아 있던 권마가 입을 열었다.
“대천산에서 반란이 일어났소.”
“…반란?”
궁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천마신교의 주요 지분을 차지하는 마도십가 중 반수가 넘는 인원을 끌어들였다. 그런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나다니, 설마 도태된 이들이 봉기라도 한 것인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본대를 물릴 정도라는 것인가.
‘설마 혼돈이 돌아간 것도 이러한 낌새를 눈치채고……?’
궁기가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 권마는 몇몇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
자신과 같은 장로인 고루혈마, 그리고 각 부대를 휘어잡은 철염수라대주 등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막사 안은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문득 그 이질감을 눈치챈 궁기가 고개를 들었을 찰나, 돌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랜만이군, 궁기.”
“…….”
자신을 이토록 격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는 마교 내에서도 몇몇이 없었다.
궁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마교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 장로원주 마검(魔劍).
분명 감숙 전선을 이끌고 있을 그가 어째서 사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그리고 그런 중대한 사안을 어째서 자신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는가 그다지 좋지 않은 예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마검,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지?”
궁기는 대천산에서 일어난 반란을 머리에서 지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상황. 끓어오른 머리를 식히며 냉정히 주위를 둘러보려 했다.
“신교는 마도 천하의 유일한 명맥을 잇는 곳이다. 긴 역사 가운데 외세의 침입을 받은 적은 있었어도, 내부로부터 골병이 든 적은 드물었지. 하지만 몇십 년 전부터 스멀스멀 암 덩이가 자라나 작금엔 손 쓸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지 무엇인가.”
“그래서, 나를 숙청하겠다? 이 궁기를?”
“숙청이라니, 말이 과하군. 이것은 본교의 업으로 행하는 정화이니.”
마검의 두 눈동자에 시뻘건 불꽃이 깃든다. 그 선명한 적의를 본 궁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사건건 자신들의 행보에 딴지를 거는가 싶더니 기어코 일을 벌이는 것인가.
“네놈들도 다 같은 생각이더냐.”
궁기는 뒤쪽에 있던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는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들이 이제는 꼿꼿한 태도로 물러남이 없었다.
삽시간에 달라진 그들의 태도에 궁기는 크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으하하하하! 좋다, 좋아! 수십 년을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했어도 꼴에 자존심은 있다는 것인가! 허나…….”
궁기는 일그러진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검을 향했다.
“천마의 상태는 알고 있겠지. 신교불패에 천마무적이라. 불패는 깨어져 나갔으니, 이제 무적을 시험할 차례인가.”
“이, 개새……!”
고루혈마가 제 손톱을 세운 채 달려들려 하자, 권마가 조용히 가로막는다. 궁기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곤 어떨 테냐는 표정으로 마검을 바라보았다.
“마도 천하를 위해서다. 교주께서도 감수하신 일이지. 오히려 기꺼워하셨다. 감히 천마(天魔)를 그깟 독으로 봉해둘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천마가 옥쇄의 각오로 나섰으니 이쪽으로 붙었던 변절자들의 마음이 흔들린 것인가.”
“애초에.”
챙!
마검은 검을 뽑아 궁기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그들은 변절자가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천마신교는 마도 아래 하나의 태양만을 섬겨왔다. 그러한 척을 했을 뿐이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군. 과연 전부가 네놈들과 같은 뜻일까.”
수십 년을 자신들의 뒤를 닦으며 꿀을 빨았다. 그런 가운데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마검은 엄숙한 태도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정화’할 것이라고. 본래의 본분을 망각하고 외도를 따를 무리를 살려둘 이유는 없겠지.”
“그래서 전쟁 가운데 반란을 일으켰다?”
“마도 천하를 위한 중원 정벌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것이지, 네놈들의 간악한 목적을 위한 부산물이 아니다.”
“…씨팔.”
빠득.
궁기의 이가 갈렸다.
대충 운을 떠보니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이때를 준비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현재 자신의 직속 수하들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바. 함께 전선에 나온 혈천신교의 고수라고 해봤자 몇백 선이니 마인들의 숫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당장 이 자리만 해도 마검과 검마를 비롯한 굵직굵직한 이름의 고수들이 포진해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하지만 궁기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전선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했다고 혼돈에게 한 소리 듣겠군.”
쿵.
시커먼 기류가 그 전신을 감싼다. 지휘소는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고, 고수 중 일부는 단지 기세를 감당한 것으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으음.”
검마와 권마를 필두로 입신지경의 고수들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나선바.
“오너라, 비루한 버러지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명줄을 끊어주마.”
그 가운데 선 궁기는 샛노란 동공을 뜬 채 그들을 노려보며 흉포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
신강 대천산.
천마신교 본단은 본래 전쟁의 준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자욱한 피 냄새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몰아쳐! 한 번에 쓸어버린다!”
천마신교라는 이름 아래 마인이라 불리던 이들이 편을 나누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전대 천마가 혈천신교라는 정체 모를 이들과 손을 잡은 이래로 신교에 큰 변화가 있던바. 천마를 등한시한 변절자들이 많아졌기에 정화를 위한 시간이 도래했다.
쉬아악!
시뻘건 핏줄기가 치솟아 오른다. 가차 없이 변절자를 베어낸 위천강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기는 더없이 좋다. 저들도 이쪽의 공세를 예상치 못한 듯 보이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적들을 베어나갔다.
“감히! 신교가 성전(聖戰) 중일 때에 반란을 일으키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신교의 교도들이더냐!”
혈천신교의 앞잡이 중 하나인 귀영대주가 악을 쓰며 소리 지르자, 위천강은 이죽거리는 태도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귀영대주. 본교의 교도로 녹을 받아먹던 네놈이 할 소리인가. 천마께서는 배신자들이 보이는 후안무치한 행태를 묵인하셨다. 다 자신의 자식들이니 그저 한순간의 일탈일 뿐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 유예도 끝이 났다. 아직 저들 편에 서 있는 네놈이 역도다!”
“소교주!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것이오! 중원 정벌로 인한 마도 천하가 코앞에 있는 가운데 내분을 일으키다니!”
“마검이 그러더군 감숙 쪽은 이미 정리가 끝났다고 말이야. 사천 전선이 끝나는 대로 우리는 휴전을 맺고 태세 정비에 들어갈 것이다. 마교는 오늘부로 정화된다!”
파아아앗!
좌중을 아우르는 막대한 마기가 위천강의 전신에서 뿜어진다. 그러자 그 곁에 선 마인들이 마치 한몸이 된 것처럼 외쳤다.
신교불패!
천마무적!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위천강은 이 싸움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 씨팔. 남궁 소저 보고 싶다.”
누구도 듣지 못한 중얼거림이 전장의 소음에 섞여 사라졌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