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청룡신공과 적해의 기운이 서로 꼬리를 맞물리며 합쳐지기 시작했다.
범람하는 장강의 물결을 베어내느라 삼분지 일에 달하는 진기가 소모되었지만, 본래부터 비슷한 경지와 비교해 지닌 내공이 많았던 주호였다.
입신지경에 오른 지금 천지간의 자연지기를 끌어다 사용할 수 있어 그릇의 한계가 없는바. 문제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힘 싸움이라도 해보려는가.”
마인과 연합군이 뒤섞여 난전이 일어난 가운데 궁기는 느긋한 태도로 검을 들었다.
화양을 넘어선 이곳은 마교의 영역이었다. 본대는 저 앞쪽 장강의 상류 쪽에서 연합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바. 하지만 그쪽은 양동에 불과하니 금세 정리를 마친 뒤 이곳으로 지원을 보낼 것이었다.
쿵.
주호와 궁기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들었을 때, 주위에 있던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
“이런 씹……!”
하지만 그 외침이 무색하게도 막대한 기운이 전장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지축이 흔들리며 수백 년을 이어져 온 강의 형태가 뒤바뀐다. 그 안에 휘말린 이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핏덩이가 되었고, 전장은 일순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오늘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쉬아아아악-!
궁기의 검이 채찍처럼 길게 휘둘러진다. 검신이 순간적으로 몇 배나 늘어난 착각이 들도록 길어지더니 이내 주호가 서 있는 자리까지 들이닥쳤다.
“같잖은.”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신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한걸음 물러나는 일도 없이 떨어져 내리던 궁기의 검을 막아냈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가며 거센 불똥을 튀겼다.
파각!
끝에서 거칠게 검을 휘둘러 그것을 떨쳐낸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사라진다. 주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일순간 사라져버린 주호의 신형에 헛바람을 내뱉었지만, 궁기는 씩 웃으며 등 뒤로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쿵-!
땅이 뒤집히며 토사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장강의 물줄기는 이미 끊긴 지 오래. 강 중간이 이들의 싸움으로 엉망이 되어 가장자리에 패인 경로를 따라 줄줄 흘러나갔다.
“검절이라 불리는 대협께서 치졸하게 후미를 기습하는가.”
“수하들의 목숨을 버리는 패로 사용하는 수괴보단 낫겠지.”
검과 검을 맞댄 가운데 서로 이죽거리며 격장지계를 내뱉었다.
허나 고작 그 정도로는 상대의 의중을 거슬리게 한다는 것은 힘든 것을 둘 다 아는바. 그러던 차 궁기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의 여식과 각별한 사이라지. 아까 보니 이 별동대에 함께 왔던데, 네놈의 목을 따고 잡아간다면 참 좋은 꼴을 당하겠군. 참, 동생도 있던가. 이름이 주예향, 이라고 했나?”
꽈아악.
신검을 쥔 주호의 손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빛으로 궁기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실력은 되는지 모르겠군. 네 목을 베어낸다면 소금에 잘 절여 신강으로 돌아간 혼돈의 앞으로 보내주지. 사흉수가 금수만도 못한 존재라 하지만, 동료끼리 그 정도 우애는 있겠지.”
“…네놈.”
“왜, 비꼬는 것을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으니 열불이 나는가.”
주호의 스산한 눈빛에 시퍼런 귀화가 일렁거린다. 조금 전까진 효율적으로 궁기를 상대할 방도를 찾아 헤맸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을 쓰러뜨릴 절호의 수를 갈구했다.
빠악!
“…이, 무식한!”
주호는 먼저 맞대고 있던 검 사이로 힘껏 머리를 휘둘렀다. 설마 그가 박치기해오리라 일말의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궁기는 그대로 이마를 얻어맞았고, 짜르르하게 뇌리를 울리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무식해 보여도 상관없다.”
주호 역시 이마가 욱신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타고 뜨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린 것을 보니 혈관이 터진 것일 터. 하지만 궁기 역시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개의치 않았다.
타아앗!
오히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찼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궁기에게로 몸을 날렸다.
“네놈에게는 체면도 없는 것이냐! 입신지경에 오른 자가 이리 격식 없는 박투를 행하다니!”
궁기는 소리를 박박 지르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의 여유만 있다면 태세를 가다듬을 수 있을 터. 하지만 주호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다.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을 따름이니, 네놈은 명예롭게 죽어 소금에 파묻히도록 해라.”
일 초식 일섬(一閃).
쉬아아아악!
눈부신 빛이 일어나 어둠을 베어 가른다. 궁기는 그 끝에서 제 검을 세웠지만, 이내 지금의 상태로는 막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적어도 더 결정적일 때에 사용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호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고, 그의 날카로운 이빨에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기기 직전이었다.
“암천(暗天)─.”
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그의 가슴을 중심으로 뿜어진 마기가 궁기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한다. 팔다리와 얼굴을 비롯한 피부 위로 시커먼 혈관이 툭 튀어나와 기괴한 모습을 그려내었다.
쉬익, 캉!
이전과 사뭇 다른 농밀한 마기에 휩싸인 궁기의 검이 일섬과 부닥쳤다.
세상을 반으로 쪼갤 듯 쏘아오던 그 공격은 끝내 그것을 넘지 못했고, 이내 주위로 커다란 균열을 남기며 무위로 돌아갔다.
“또 그것인가. 네놈들은 수명을 끌어다 쓰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군.”
적해와는 또 다른 역천의 기운이었다. 단시간에 강한 힘을 손에 거머쥐게 하는 것으로 보아 제 살을 깎아 먹으며 행하는 것일 터.
“네놈의 사지가 갈가리 찢겨나가도 그리 가벼이 입을 놀릴 수 있을지 보자꾸나.”
궁기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대해진 기운으로 주호를 노려보았다.
‘이건 긴장 좀 해야겠군.’
최소 권마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경계해야 할 점은 이전의 적들과는 달리 궁기는 부풀려진 제힘을 흐트러짐 없이 온전하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툭.
발끝이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궁기의 신형이 사라졌다. 주호는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운 채 그의 움직임을 가려내었지만, 전장에는 다른 기운들이 가득한바. 설마 후기지수 쪽을 노리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그 반대편으로 날카로운 살기가 짓쳐 들었다.
“큭!”
신검의 위로 시커먼 핏줄이 툭툭 튀어 오른 일권이 작렬했다. 찰나 검신을 돌려 면으로 그것을 막아낸 주호는 충격을 흘려내지 못했고 십 보나 밀려나 바닥에 깊은 족적을 그려내었다.
궁기의 공세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닥쳐온 날카로운 예기에 주호가 몸을 비틀었을 찰나, 옆구리를 향해 막대한 경력이 쇄도했다.
‘양동? 머리는 이기어검. 그렇다면.’
막아야 할 것은 명확한바. 그 자신 역시 이기어검을 쏘아내 서로 기세를 죽이는 것으로 공멸했고, 두 손을 교차해 옆구리를 가격하려던 궁기의 주먹을 막아냈다.
“어디 한 번 버텨보아라.”
궁기는 사악하게 웃으며 주먹을 비틀었다. 주호는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두 눈을 부릅떴지만, 이를 악물지언정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종래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바닥을 뻗어 궁기의 팔을 휘감고 관절을 꺾으려 했다. 허나 궁기는 그것을 용납지 않았고 몸을 빙그르르 돌려 주호의 가슴을 걷어차는 것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컥.”
가까스로 방어해냈지만, 호신강기를 뚫고 마기가 침투해 장기를 건드렸다.
입가에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손끝이 떨려오며 다리는 비틀거렸다.
궁기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여유를 주지 않고자 재차 달려들며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일단 두 팔을 받아 가마!”
양옆에서 하나씩 붙잡고 팔 자체를 뽑아내리라. 아무리 청룡이라 할지라도 암천을 발동한 자신의 힘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궁기는 과감하게 공세에 나섰지만,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멸천(滅天)-.”
두 팔을 뻗어 태극을 그린 주호의 앞으로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막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청룡신공의 푸른빛이 아닌 칙칙한 잿빛의 색. 이건 분명 아까 쏟아지던 장강의 물결을 베어냈던 그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쉬아아아아아악-!
막대한 기파가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을 휩쓴다. 궁기는 주호의 지척에서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붙인 채 버텨내려 했으나, 그 여파를 온몸으로 맞은 탓에 허공으로 붕 뜬 채 저 멀리 날아가 토사에 처박히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는 곧바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암천의 기운 덕분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 다만, 암천을 사용하고도 허를 찔려 이토록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내 반드시 너의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호흡을 정돈한 채 몸을 일으키자 피 묻은 토사가 떨어져 내린다. 궁기는 엉망이 된 꼴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청룡을 잡기 위해선 이마저도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툭.
바닥에 파묻힌 신검을 빼 든 주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를 따지자면 그쪽이 더 좋지 않았다.
장강을 베어 가를 때부터 시작된 무리한 기운의 운용은 빠르게 그의 체력을 소진 시키고 있는바. 다행이라면 궁기가 암천을 사용해 단기 결전을 바라보고 있어 싸움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사흉수란 이름답게 진흙탕에서 구르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쉽게도 그건 어울려주지 못하겠군.”
그의 이죽거림에 궁기 역시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제 검을 불러들였다.
아직 암천이 허용하는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궁기는 이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토사의 위에서 빠져나와 다시 그 앞에 섰고, 재차 격돌을 준비할 찰나.
삐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전장에 메아리쳤다.
“……!”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주호였다.
연합군 내의 신호에서 이러한 것은 없다. 그러니 상대 쪽에서 발한 모종의 신호란 것일 터.
‘설마 본대가 저들의 시선을 끄는 데 실패했나?’
지금 상황에서 적들의 추가 지원이 온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큰 피해만 본 채 도주할 수밖에 없다.
궁기라는 강대한 적을 둔 지금 전장을 이탈하는 것도 예기치 않은 상황. 자신은 남아서 이들의 발을 묶어야 했다. 그렇기에 긴장한 태도로 궁기의 반응을 살폈다.
“씨팔, 대체 왜!”
쨍그랑!
궁기는 화를 참지 못한 채 제 검을 내팽개쳤다. 지금의 신호는 즉시 퇴각을 명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청룡의 사지를 잘라 그 머리를 질질 끌며 되돌아갈 수 있거늘.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즉시 퇴각 신호를 보내는가.
“…….”
궁기는 입술을 씹었다.
자신이 끌고 온 이들은 마교 소속의 마인들인바. 일단은 이쪽의 휘하에 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고 있지만, 갑작스럽게 퇴각 명령이 떨어져 동요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물러난다. 네놈, 정말로 운이 좋은 줄 알 거라.”
궁기는 이를 으득거리며 후퇴를 명했다. 마음 같아선 마교고 나발이고 혼자라도 남아 청룡을 비롯한 이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혼돈이 말해 놓은 것이 있기에 가까스로 이성을 챙겼다.
“서둘러 꺼지거라. 꽁무니를 말고 도망치는 거면 말리진 않으마.”
주호로서는 천만다행인 상황.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