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26화 (226/300)

#226화

중얼거리듯 말한 것이라 남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주위를 살피고 있던 주호의 귀에는 더없이 선명히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고 손바닥으로 강 표면을 첨벙이던 고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윽.”

어둠을 꿰뚫는 그 시퍼런 시선에 무인의 몸이 움찔한다. 마치 잘못을 저질렀다 들킨 사람처럼 죄지은 표정을 지었으나, 얼른 말하라는 그의 손짓에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 제가 며칠 전에 수색대의 일원으로 이곳 지형을 살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분명 제가 서 있는 곳까지 물이 차올랐었는데 지금은 그 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착각일 가능성은?”

“오차는 있겠지만, 이 정도 수준의 오차라면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한 수준입니다.”

“음.”

주호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뭉친 흙을 보니 얼마 전까지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있었다.

사실 그리 신경 쓸 요소는 아니었지만, 별동대의 작전에 앞서 마음에 걸리는 요소가 생긴 탓에 눈여겨보았을 따름이었다.

“이제 절반쯤 건너왔습니다.”

“서두를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진백이 남은 연합군의 인원을 살피러 갔을 때, 주호는 돌연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진? 이렇게 갑자기?”

하필 지금 지진이 발생한 것일까.

곧 다른 이들도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저마다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그중 몇몇은 이것이 지진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 어……!”

제일 선두에 있던 누군가 강의 상류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동시에 모든 인원이 그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홍수가 난 것처럼 범람해오는 물길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무슨!”

“근래 비가 내린 날은 없거늘 이렇게 갑자기?”

모두가 의문을 표할 때 아까 강물의 수위를 살피던 무인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소리 질렀다.

“수공(水攻)! 수공입니다! 다들 피해요!”

“이런 씹……!”

“이런 미친 새끼들! 장강의 물길을 틀어막았다고?”

곧이어 닥쳐오는 물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본 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땅을 박찼다.

연합군 수준의 고수라 할지라도 저 정도 물길에 휩쓸리면 그대로 물고기 밥이 되어버릴 터.

그렇기에 다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나갔으나, 곧 장강의 물길은 그들의 지척에 이르렀다.

“교관님!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선우연이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매화 검법이 완숙에 이르렀어도 물을 베어 가를 수 없는 법. 이대로는 풍운 무림의 꿈을 이룰 새도 없이 익사해 죽을 위기였다.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열 명 남짓.’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인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이곳을 노리고 기습해올 것을 읽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거센 물살에 휩쓸리게 된다면 몇몇밖에 살아남지 못하게 될 터. 그렇기에 주호는 달려나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쏟아져 내리는 물살 앞으로 몸을 날려 내려섰다.

“강을 베어 가르는 것은 처음이다만…….”

신검을 다잡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동시에 막대한 기운이 서리며 토해진 청명한 울음이 도망치던 이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인간의 몸으로 감히 보일 수 있는 모습일까. 별동대 천 명의 기세를 합친 것보다 더욱 큰 기운이 하늘 위로 솟구치며 세상을 뒤덮었다.

“…검신(劍神).”

누군가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 단어가 좌중의 정신을 빼앗았다. 그와 동시에 신검에 서린 시퍼런 기운이 잿빛으로 물들었고, 망설임 없이 바로 지척까지 이른 장강의 물살을 향해 휘둘러졌다.

삼 초식 나찰(羅刹).

신승의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베어내고, 권마의 마혼(魔魂)을 막아낸 최절초가 터져 나왔다.

쉬아아아악-!

달빛이 비치는 강물보다 더 칙칙한 잿빛 기운이 그것을 반으로 베어 갈랐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았는지 질퍽한 대지를 깊게 파고들었고,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 갈라진 듯 커다란 상흔을 남겨내었다.

슈우우욱.

기세를 타고 쇄도하던 장강의 물결이 치솟아 오르는 막대한 힘에 흐름을 잃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더러는 주호가 만들어낸 깊은 틈을 파고들어 그 안에 머물러 물줄기를 약하게 만들었다.

쏴아아-.

종래엔 그들이 서 있는 곳의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만 수위가 증가한바. 별동대는 작전 중만 아니라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담담히 신검을 수납했고, 그들을 바라보며 저 앞을 눈짓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것을 보니 마인들이 꾸민 술수가 분명하다. 다들 준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으로부터 수백 아니, 천여 개에 달하는 시뻘건 점이 찍히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 역시 눈치챘는지 저마다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에게로 쇄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퍽-!

가장자리에 서 있던 고수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시뻘건 선혈이 흩날린다. 그것은 어두운 밤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으로 뒤이어 자욱한 혈향이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매복이다!”

“적의 숫자는 우리와 비슷하다! 모두 겁먹지 말고 싸워!”

각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이 목청을 높이며 무인들의 기세를 다독였다.

주호는 입술을 깨물며 후기지수 일행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안쪽이라 당분간은 안전하겠지만.’

이쪽의 기습을 상정했다면 필시 평범한 전력으로 나올 리 없다. 그러니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속전속결로 저들의 목을 쳐내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타핫!

조금 전의 일격으로 진기의 소모가 컸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힘으로 땅을 박찬 그는 재차 연합군 고수의 뒤를 기습해 가슴을 찔러가던 마인의 목을 붙잡았다.

우득.

단말마를 내지를 틈도 없이 목을 꺾어 숨을 거두었다. 곧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을 본 고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을 때, 주호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둘, 넷, …일곱.’

마인들 가운데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닌 고수가 일곱 있었다.

최소 초위현이나 장산철이 나서야 겨우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터. 잠시간 그들의 상태창을 살피던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칠혈성(七血星)?”

청혈도제와 황혈창마를 비롯한 몇몇은 자신의 손에 죽었고, 천우희를 기습했던 적혈마검은 백호가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사이에 다시 인원을 충원한 것인지 그들은 온전한 일곱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아니나 다를까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에 그 일곱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자신에게로 쇄도해왔다.

“대협!”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초위현이 황급히 땅을 박차며 주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장산철 역시 그를 돕기 위해 닥쳐왔고, 일곱의 칠혈성 중 둘이 떨어져 나와 각각을 막아 세웠다.

“이놈들!”

장산철이 기세 좋게 고함을 외치며 선공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앞을 막아선 칠혈성 중 한 명과 백중지세의 실력을 지닌바. 그것은 초위현 쪽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방 넘어오진 못할 듯싶었다.

“청룡. 전대 청혈도제가 네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지.”

쉭.

소매 밑으로 시퍼런 언월도의 날을 내린 청혈도제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의리는 없지만, 적어도…….”

“쫑알쫑알 시끄럽군.”

“…뭐라?”

“내게 죽은 청혈도제는 비록 적일지라도 그 패기만큼은 인정할 만한 사내였다. 허나 네놈은…….”

주호는 천천히 신검을 뽑으며 그 끝으로 청혈도제에게 겨눴다.

“말을 섞을 만큼 가치가 있어 보이진 않는군, 애송이.”

“…이 새끼가.”

그의 욕지거리가 무슨 신호라도 된 듯 다섯 혈성들은 동시에 땅을 박차며 주호에게로 쇄도해왔다.

“발끈하는 꼴을 보아하니 혈천신교도 인재가 없군. 고작 이런 놈에게 칠혈성의 좌를 주다니.”

그는 조소를 지으면서도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들은 자신의 힘을 갉아먹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바. 진짜는 칠혈성 전부를 쓰러뜨리고 나타날 혼돈 혹은 궁기일 것이었다.

‘그러니 모두 한 호흡에…!’

청룡검식 경계의 검, 만검(萬劍)

오의를 사용하기엔 진기의 사용이 아까웠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청룡검식. 예전에는 감히 힘을 아끼면서 펼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초식이었지만, 소성(小成)을 이룬 지금은 그것만큼 효율적인 초식이 없었다.

쉬아아아아악-!

주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질풍의 칼이 어지러이 쇄도한다. 제일 처음 그것을 맞이하는 청혈도제는 비웃음을 흘렸다.

일점에 집중해 자신들 한 명 한 명을 쓰러뜨려도 모자랄 판에 이리도 산만한 공격이라니.

당대 청룡의 수준이 높은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 칠혈성을 상대로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패기가 없다고? 보여주도록 하마, 청혈도제의 신위를!’

붕붕붕-!

언월도가 거세게 회전하며 그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자신이 정면에서 저 공격을 막아낸다면 다른 이들이 알아서 틈을 파고들을 터.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에 온 힘을 담아 제 언월도를 내리쳤을 찰나.

파각-!

“…어.”

부서진 것은 오히려 청혈도제의 쪽이었다.

마치 두부가 뭉개지듯 그 끄트머리부터 갈라진 칼날은 순식간에 그를 지나쳤고, 청혈도제는 몇 걸음 가다 말고는 멈춰 서고 말았다.

“이, 이게 대체…….”

무엇을 본 것인지 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실핏줄은 모조리 터져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고, 그보다 먼저 전신에 생겨난 실선이 매정하게 갈라지며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죽음을 선고했다.

단순히 청혈도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틈을 노리며 닥쳐가던 다른 네 명의 칠혈성도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이한 채 이미 살점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뒤였다.

쉬아악-!

초위현과 장산철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남은 둘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 목이 떨어져 나갔고, 주호는 발밑에 고이는 시뻘건 피를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련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군.”

최소한 이전 칠혈성은 상황과 전력 차이의 구분은 했었다. 그렇기에 격장지계를 써도 잘 넘어오지 않았지만, 단순히 비교하는 말 한마디에 발끈하며 달려드는 꼴이라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설마 단순히 발목을 붙잡는 것도 못 하고 있을 줄이야.”

그 직후 그들의 앞으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흑호(黑虎)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내로,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세가 풍겨 나왔다.

초위현과 장산철이 주춤하며 주호의 앞을 지켰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둘에게 말했다.

“별동대를 수습하도록. 원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되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주호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궁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 간의 싸움은 인지를 초월한 것. 조금 전에 보인, 쏟아져 내리는 강물을 베어내는 것보다 더 큰 여파가 이 주위를 휩쓸 것이었다.

“…부디 무운을.”

“기다리겠습니다.”

초위현과 장산철이 각각 인사를 내뱉음으로 자리를 떠났을 때, 주호는 신검을 들어 올리며 궁기에게 겨누었다.

“우리, 그간 쌓인 것이 좀 많았지?”

“괜찮겠느냐. 꽤 날뛴 듯한데. 원한다면 조금 기다려줄 수 있다.”

“하하.”

궁기는 조소를 흘리며 그렇게 말했지만, 주호 역시 의연한 태도로 그것을 받았다.

“의도한 장본인이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가. …뭐.”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합니다.]

“그렇다 한들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