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울긋불긋한 낙엽이 찬바람에 떠밀려 내려가는 계절.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바람은 싸늘했고, 건조해진 땅은 긴 휴식기를 준비했다.
예년이라면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 역시 겨울을 날 준비를 했겠지만, 작금 중원 무림의 이목은 사천과 감숙 일대에 펼쳐진 전선에 쏠려 있었다.
천마신교와 정사 연합군이 벌이는 일진일퇴의 공방은 초유의 관심사.
그 거취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에서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이들이 시시각각으로 사천과 감숙에 몰려들었다.
그 인원이 늘수록 전쟁에 소모되는 물자는 막대한바. 그렇기에 중원에 있는 표국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일을 따내기 위해 무림맹 앞에 진을 치고 차례를 기다렸다.
갈산 표국의 표국주 곽웅 역시 다른 이들과 함께 며칠 밤낮을 지새웠다.
그 끝에서 겨우 사천으로 보내는 표물 의뢰를 받을 수 있었고, 표국의 사활을 건 여정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엔 파리떼가 꼬이는 법. 눈먼 재화들이 곳곳에 넘쳐나자 중원 각지에 산적이 들끓었다.
무림맹의 고수들도 아니고 그 대리를 맡은 표국이라면 그들에게 있어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물론 전체로 보자면 미미한 비율이었고, 가뜩이나 전쟁 쪽에 신경이 쏠려 있어 일일이 대응하기 힘든 문제였다.
어차피 빼앗기거나 소실된 표물들은 운송 중인 표국에서 책임지는바. 무림맹 입장에선 그리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중소 표국들이었다.
하지만 누가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 스스로 선택해 의뢰를 받아들인 것. 그들로서는 최대한 조심히 표행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구구구궁-.
사천을 넘어가는 구역 중 한 곳인 장운산 인근. 표물을 실은 마차가 나아가는 길목으로 바위며 나무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급히 멈췄기에 그것들과 부딪치는 불상사는 멈출 수 있었지만, 뒤이어 나타난 괴한들에 의해 표사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으하하하! 또 잔뜩 실어 왔구나!”
수십은 될 법한 산적들이 날붙이를 든 채 마차를 둘러싼다. 곧 그 가운데서 큰 웃음을 터트리며 나온 거한이 제 태도를 땅에 꽂으며 날카로운 살기를 피워 올렸다.
“이 장학호와 대적할 자가 있느냐! 그렇지 않다면 표물을 내놓고 썩 꺼지거라!”
갈산 표국의 표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삼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적 따위 수십이 달려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을 호걸이라 칭한 장학호의 기세는 진짜였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달려들더라도 이겨내지 못할 터.
“장운산의 호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인은 갈산 표국의 국주를 맡은 곽웅이라 합니다.”
곽웅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 앞에 나섰다.
어찌 되었든 서로 싸우게 된다면 양측에 피해가 생긴다. 그러니 이런 경우는 적당히 통행세를 내고 무마하는 것이 보통인바. 하지만 장학호는 곽웅이 내민 주머니를 바라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내게 딸린 식구가 몇 명인데 이딴 코 묻은 돈으로 넘어가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그렇다면 더 드릴 테니 부디…….”
“잔말 말고 표물을 전부 내놓아라. 그리하면 살려주는 것은 생각해보지.”
“이 표물은 사천에서 마교와의 전쟁에 쓸 물자입니다! 호걸께서도 강호인이시라면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지요.”
곽웅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그에게 매달렸다.
무리해서 받은 의뢰다. 표물을 빼앗기거나 손실한다면 몇 대를 이어 내려온 표국은 그야말로 파산지경에 이를 터.
하지만 곽웅은 오히려 기껍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작금 무림맹의 표물 만큼 먹기 쉬운 것은 없지. 자,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다.”
시퍼런 칼날이 그의 목젖에 당도했다. 무림맹의 이름마저 수포가 되어버리자 곽웅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렸다.
“…전, 부 드리겠소이다. 그러니 보내만 주시지요.”
“흐흐, 그건 아까의 이야기고. 지금은 셈을 다르게 해봐야겠지.”
“말이 다르지 않소!”
“일단 네놈의 사지부터 찢고 시작하자꾸나. 어차피 이야기할 놈은 수두룩하게 널렸으니. 아까부터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땍땍거리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런.”
곽웅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표사들과 태세를 갖추고 어떻게든 활로를 열려 했을 찰나.
두두두두.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곽웅은 반색을 장학호는 번거롭게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두 대의 마차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앞에 일단의 무리가 점거하고 있습니다. 산적 같은데 곧바로 정리하겠습니다.”
마부석에 있던 젊은 청년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안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무어라 말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내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화사하다 못해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외모가 아닌가. 장학호는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흥분하면서도 냉정히 상황을 살폈다.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마차 내부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즉, 그들 역시 갈산 표국처럼 물자를 싣고 이동 중이라는 것일 터.
마부석에 앉은 청년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그리 뚜렷한 기세는 느끼지 못했다.
“소저들, 물러나시오!”
곽웅은 그들이 휘말리기 전에 어서 도망갔으면 했다.
자신들이야 끽하면 죽기밖에 더하겠나.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저런 흉악한 이에게 붙잡히게 된다면 더 한 수모를 당할 터.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기에 간절히 외쳤으나, 두 여인은 사뿐한 발걸음으로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을 뿐이었다.
“향아. 여인의 몸으로 강호에 산다는 건 생각보다 개 같은 경우를 빈번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소리란다.”
“그런 건가요.”
“당장은 학관에 있어서 나름대로 상식을 지닌 자들만 만났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자들이 대다수야.”
남궁연은 진지한 얼굴로 주예향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굳이 마차에서 자신들이 처리하겠다며 나온 것도 전쟁 이전에 그녀에게 실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나는 내 가문이 뒤에 있고, 너는 교관님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다른 이들보단 낫겠지. 그래도 간혹 피치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남궁연은 고개를 들어 황당하단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산적들을 가리켰다.
“네가 보기엔 어때 보이니.”
“음, 큰 덩치 말고는 전부 삼류 언저리네요. 잘하면 혼자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엔 머리를 먼저 치면 된단다.”
“…어, 꼭 전부 죽여야 하나요?”
“…….”
남궁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옛적부터 영웅담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거늘, 그 탓인지 순한 외모와는 달리 사고방식이 조금 과격하기 짝이 없다.
“비유야. 이 경우엔 수장을 뜻하는.”
“아.”
주예향은 자신의 착각에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수와 싸울 땐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어. 우리는 피에 미친 살귀가 아니니까. 적당하게 팔다리 한군데 부러뜨려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로도 충분해.”
“그렇군요. 확실히 이해했어요.”
“…덮쳐!”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찰나, 상황을 살피던 장학호는 바닥난 인내심을 유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소리 질렀다.
그러자 수십의 산적이 일시에 그들에게 몸을 날렸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곽웅이 표사들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뭐하나! 이대로 두고만 볼 생각인가!”
“…어.”
“담호! 내가 널 그리 키웠단 말인가! 설령 악이 더 강할지라도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정도를 걷는 이가……!”
“국주, 저희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수하의 말에 곽웅은 몸을 돌렸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여인 중 더 어려 보이는 이가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산적들에게 몸을 날리더니 매서운 신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는 병장기들을 전부 피해냈고, 산적들의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빠각.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온바. 촌각도 지나지 않아 십 수 명이 바닥에 구르게 된 뒤에야 산적들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예사 놈이 아니구나. 어디의 출신이냐.”
그저 외모만 곱상한 것이리라 생각했거늘 몸을 움직이는 품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기에 장학호가 앞으로 나서며 묻자, 주예향의 뒤에 있던 남궁연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지? 다친다고 해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
“혼자도 충분해요.”
자신감을 얻은 주예향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
그녀가 자신의 수하들을 상대할 때와 같이 검조차 뽑지 않는 것을 본 장학호의 눈가가 꿈틀했다.
‘그 방심이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후웅-!
커다란 태도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그야말로 주예향의 몸을 일도양단할 기세였으니. 그 지척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손이 제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쉬익-캉!
“……!”
빛살처럼 자신의 태도를 두드리는 그 공격에 장학호의 두 눈이 커졌다.
‘쾌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속도였다.
분명 공격을 먼저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상대의 검이 먼저 이쪽에 닿아왔다.
자칫 잘못했으면 단 한 순간에 목숨을 빼앗겼을 터.
“하아아아압!”
하지만 장학호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도맹의 출신으로 사도칠패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나름대로 잘나가던 무인이지 않았는가.
싸움에 있어서도 잔뼈가 굵을 대로 굵었기에 쾌검을 상대함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쿵.
서로의 영역이 맞물린다. 저돌적이라 할 수 있을 움직임으로 그 품에 파고든 장학호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각오로 다시 한 번 태도를 휘둘렀다.
‘힘과 내력에선 나를 따라오지 못할 터.’
쾌검은 속도로 힘을 얻는다. 하지만 검을 휘두를 간격조차 내주지 않는다면 그저 맥없이 약한 검이 될 뿐이었다.
쾅!
장학호의 태도와 주예향의 검이 맞물린다. 힘과 내력 싸움으로 몰아가는 의도가 먹힌바. 그렇기에 그는 혼신을 다해 태도에 무게를 실으며 그녀를 찍어 누르려 했다.
“…….”
주예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이 쾌검의 사용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미 주호가 옛적에 가르쳐준 상황으로 그에 대한 대책 역시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합!”
주예향은 짧은 기합성과 함께 맹렬한 기세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장학호의 예상과 달리 주호가 가져온 온갖 영약을 모두 섭취한 그녀의 내력은 또래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었다.
캉!
“……!”
진각을 내디디고 힘의 방향을 반전해 태도에 강한 반탄력을 가한다. 그러자 상정 이상의 충격이었는지 태도는 제 주인의 손아귀를 찢고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척.
“더 덤비실 생각이에요?”
종래엔 그 목에 검을 가져가자 장학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져, 졌소. 살려만 주시오.”
그러면서 제자리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으니, 상대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따낸 주예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비무를 제외하고 첫 실전이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미소를 지으며 뒤에 있던 남궁연에게로 고개를 돌릴 찰나, 장학호의 얼굴이 돌변하며 제품 안에서 무언가가 담긴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촤아악!
새하얀 분진이 허공에 퍼지며 그녀를 덮쳤다. 주예향은 그 끝에서 그것을 눈치채곤 황급히 검을 휘둘렀으나, 한 박자 늦었을 따름이었다.
쉬아아아악-!
그때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남궁연이 쏜살같이 앞으로 쇄도하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나운 검풍(劍風)이 주예향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고, 쏟아지던 분진을 날려 보냈다.
“끄아아악!”
그 반대편에 있던 장학호가 되려 그것을 뒤집어쓴 것은 필연적인 일.
즉효성 독이었는지 피부가 벌겋게 일어나며 머지않아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바닥에서 온몸을 뒤트는 그 모습에 남궁연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꼴을 보아하니 해독제도 없나 보네. 자업자득으로 생각해.”
“…언니.”
“방금 봤지? 세상은 녹록하지 않아.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금세 뒤통수를 쳐오는 이들이 한가득하니까. 두 번 세 번 주의를 기울여도 부족해. 나였더라면 녀석이 무릎을 꿇는 즉시 머리를 내리쳐 기절시켰을 거야.”
“명심할게요.”
독은 절정에 이르렀다.
장학호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해 제 목을 쥐어뜯고 있는바. 싸늘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남궁연은 마지막 온정으로 고통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제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경련은 죽음으로 멈추게 되었다.
잘린 목에서 자욱한 혈향이 피어올랐을 때, 주예향은 경직된 얼굴로 그것에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남궁연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익숙해져야 해. 그것이 강호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