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사천행이 결정되었으니 우선 함께 갈 인원을 선별해야 했다.
주호는 제 휘하에 있는 후기지수들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요. 이럴 때를 위해서 지금까지 피나도록 수련한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특히 사천 쪽이면 제가 빠질 수 없지요.”
선우연과 당천유는 누구보다 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참전을 표했다.
특히 당천유는 제 가문인 당가가 전선에 휘말려있어 만약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홀로라도 가겠다며 강경한 의지를 보였다.
“저는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다음은 악비산이었다.
본격적으로 백호신공의 가르침을 사사받는 중인 악비산의 기세는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워졌다.
몸을 추스르는 동안 가볍게 대련해보니 창을 다루는 후기지수 중에서는 이제 적수가 없을 정도의 수준에 오른바.
잘만 한다면 천후와도 좋은 비무를 벌일 수 있으리라 보였다.
“저는 이미 준비를 끝내놓았어요.”
남궁연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학관에 입관할 당시에는 다른 이들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경지였으나, 지금은 그들 중 손에 꼽을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
특히 같이 검을 사용하는 선우연보다 한 수 위의 실력으로 간간이 있는 대련 때마다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주었다.
“…….”
철대환과 천후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천후는 이미 그들 가운데 정점에 이르렀고 철대환 역시 조금 느리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한 성취가 있어 조금만 있으면 가로막고 있는 벽을 뛰어넘을 듯했다.
그렇게 여섯 후기지수의 동행이 결정된 가운데 주호의 시선은 남은 넷을 향했다.
“너희들은…….”
그의 목소리에 갈등이 서렸다.
저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직 이런 싸움에 참전할 정도로 경험을 쌓지 못한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가주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설사 제가 화를 당한다고 하여도 가주께서는 교관님을 책망치 않으실 겁니다.”
팽우혁은 그런 주호의 고민을 눈치채곤 먼저 선수를 쳤다.
하늘 높은 줄 알았던 우물 안의 개구리가 개안(開眼)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그 옆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어야 할 때. 아버지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난세(亂世)에 더는 없을 영웅이라고.’
고작 이십 대 중반에 입신지경에 든 강호에 내로라하는 초고수들과 자웅을 겨루는 신성.
검절이라는 이름은 이미 널리 퍼졌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은 오히려 축소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만일 전쟁이 큰 피해 없이 정사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면 주호의 이름은 그 누구보다 드높게 될 터.
팽가를 위해서라도 그 뒤를 쫓을 생각이었다.
“사문이 휘말린 일이에요. 제가 가지 않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으라는 말이 있듯 남궁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당소혜와 남궁휘도 전혀 물러서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결연한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마지막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주예향의 발전은 눈부셨다.
학관에 입관할 때까지만 해도 고작 이류 끝자락에 불과했던 경지가 이제는 일류를 넘어 완숙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영약을 구해다 부족한 내공을 보충하고, 자신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덕도 있을 터.
하지만 그녀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성취였다.
“향아, 비무와 실전은 다르다. 한순간의 판단이 생과 사의 명운을 가를 것이다. 너는 네가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무림인이 된다는 것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일 각오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주예향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기회가 온다면 주저함 없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용기. 실전에 있어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주예향은 잠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는, 갈피를 잡지 못한 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라버니의 결정에 따를게요.”
“아니, 네가 결정해야 한다. 너도 이제 어엿한 한 명의 무림인이니.”
주호가 그 어깨에 손을 올리자 움찔했다.
이전과 같이 그저 가냘프기만 한 몸이 아니다. 그녀라면 충분히 결단을 내릴 수 있을 터. 적어도 주호는 그렇게 믿었다.
“…….”
주예향은 시선을 피했다.
두 손은 제 옷자락의 끝을 만지작거렸고, 입술은 머뭇거리기만을 반복했다.
끝에선 당소혜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했지만, 그녀는 그런 주예향을 바라봐오며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이었다.
‘…내가 정해야 한다는 걸까.’
사실 무림인이 되길 원하면서도 그런 어두운 부분 쪽으론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직 자신에겐 먼 이야기이리라.
든든한 오라버니도 있었고, 새로 사귄 친우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그들이 자신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꼭 사람을 죽여야만 무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그런 생각이 가슴 한편에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주예향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나약한 마음으로는…….’
다른 이들을 보아라.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는 고난을 감내하지 않는가.
무림인이 되기로 했다면서 그러한 것에 눈을 돌린다면 그저 어리광쟁이에 불과할 터였다.
“…갈게요. 아직은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걸 전부 이행하기는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겠어요.”
그렇기에 가까스로 제 의지를 그러모아 그리 대답했다.
완벽에 가까운 대답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현 의지를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후기지수 전원의 의사 확인을 끝마쳤다.
“천후.”
“부단주에게 준비하라 일러놓겠습니다.”
물론 사천으로 가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신문 나름대로 계획이 있으니 청룡단이 동행해 전쟁의 물밑에서 암약할 예정이었다.
“출발은 내일 동틀 무렵이다. 각자 준비하도록.”
“예.”
후기지수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간 피를 깎으며 수행했던 성과를 보일 때가 도래했다.
***
사천 아안시(雅安市).
장강의 상류가 펼쳐진 풍경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정자가 자리했다.
작금 사천은 감숙과 더불어 중원 무림의 가장 격렬한 격전지로 꼽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자 위를 거니는 두 명의 남자에게선 그러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삐이익-.
새하얀 비둘기가 어디선가 날아와 정자 난간에 내려앉는다. 다리에 묶인 연통을 보아 전서구임이 틀림없었다.
남자 중 한 명이 손수 그것을 풀어헤치고는 연통에 적힌 전서를 읽어나갔다.
“…권마가 실패했다는군. 모종의 세력에게 습격당해 제 수하마저 모두 잃었다는 모양이야.”
“그 늙은이는 워낙 겁이 많잖소. 마교의 권마라 불리는 이가 뭐 그리 몸을 사리는지.”
혼돈의 말에 궁기는 비웃음을 흘리며 권마의 이름을 조롱했다.
“모종의 세력이라는 건 아마 청룡단이겠군. 혈귀들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조직은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야.”
“사신문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것이오.”
“그들은 항상 물밑에서 암약해왔네. 이번에 나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지.”
“그보다 나는 청룡이 무슨 연유로 소림에 간 것인지 궁금하오. 승무전까지 열어 신승과 비무를 벌여야 할 이유가 무에 있을까.”
“듣기로는 대환단을 조건으로 신검을 대가로 걸었다더군.”
“허어, 사신문주의 가슴이 철렁했겠군. 청룡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신검을 내걸다니.”
궁기는 혀를 쯧쯧 차며 멀뚱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돈을 턱을 괴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상념에 잠겨 있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복용하기 위해 대환단을 필요로 한 것은 아닐 테지. 신검을 대가로 걸 정도라면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일 터.”
“지인 중에 병마에 시달리는 이라도 있나 보오.”
“…주작, 주작이로군. 청룡과 그녀는 긴밀한 사이라 들었다. 근래 주작의 행적이 뜸하다 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나.”
“너무 억측 아니오?”
궁기가 사뭇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혼돈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런 유추는 직관으로 해야 하는 법이네. 깊게 생각해서 요소요소가 추가되었다간 도리어 중심에서 벗어나기 마련이지.”
“…뭐, 그렇다 칩시다.”
화륵.
혼돈은 시커먼 삼매진화를 일으켜 서신을 태워버렸다. 그러곤 전서구를 그대로 날려 보냈고, 난간을 붙잡은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마 이대로 신강으로 돌아가야 할 듯싶네.”
“신강? 어째서입니까. 이쪽의 계획이 막바지에 달했거늘.”
“그러하기 때문이야. 마교에서도 조금 말썽이 있었나 보더군. 소교주를 필두로 해서 본교의 세력을 밀어내려는 정황이 포착되었어.”
“그 위천강인가 뭔가 하는 꼬마군요. 천마 본인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궁기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마교의 기둥이라 일컫는 마도십이가 중 반절 이상이 자신들의 편으로 들어섰다.
그런 가운데 정통을 이은 소교주가 다시 복권한다면 그들은 배반에 대한 피의 숙청을 면치 못할 터.
그 누구보다 소교주의 행보를 막아야 하는 것이 십이천가의 배신자들이었다.
“도철과 도올은 감숙으로 보냈네. 그들이라면 침체된 전선을 뚫기에 어렵지 않겠지.”
“사천은? 나 혼자 하란 말이오? 이곳의 전선이 더 넓지 않습니까.”
“그만큼 자네를 믿고 있다는 것일게. 아, 무림맹 쪽으로 우리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더군. 사신문 쪽으로 흘러들어 갔으니 청룡이 올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네.”
“…무림맹 그 잡것들이?”
궁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작금 강호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마교는 계획했던 대로 무사히 장악했지만, 반절은 손에 넣었던 사도맹을 비롯해 구파와 세가 연합의 변절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갈려 나갔다.
‘마치 이쪽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은 없었다. 연락 체계도 굳건했고, 분명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터.
심지어 신교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변절자마저 숙청당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신기한 노릇이지. 어찌 이쪽과 관계된 이만 쏙쏙 찾아낼 수 있을까.”
“…본교 깊숙한 곳에 배신자가 있다면.”
“아니, 그럴 순 없네. 신마(神魔)의 지배력은 절대적이야. 설령 나라 할지라도 그것엔 거스를 수 없네.”
“그렇다면?”
“아마 저쪽에서 모종의 수단을 강구해낸 것이겠지. 사실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네. 마치 육안으로 그 신상 명세를 파악할 수 있는 주술이라도 개발해낸 것이 아닌가 싶군.”
“…또 터무니없는 소리를.”
궁기의 핀잔에 혼돈은 다시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뒤는 부탁하네. 혹시라도 청룡이 오면 잘 맞아주도록 하고.”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오.”
“그렇군, 자네에겐 빚이 있었지. 새로이 충원된 칠혈성 전원도 놓고 갈 터이니 요긴하게 쓰게.”
그 말을 끝으로 혼돈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청룡이라.”
난간을 붙잡은 궁기의 손 위로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그는 잠시간 장강의 풍경을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칠혈성(七血星).”
그와 동시에 일곱의 초절정 고수가 그 뒤에 나타나 부복했다.
원래의 칠혈성 중 대다수가 주호의 손에 명을 달리한바. 그렇기에 신교에선 더욱 강한 고수들로 새로운 칠혈성을 꾸렸다.
궁기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곧 손님이 오실 것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맞이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존명.”
이번은 반드시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궁기의 두 눈이 넘실거리는 살기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