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이것 또 처음 보는 얼굴이군.”
백호의 등장에 권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 천지가 아무리 넓다 한들 입신지경의 고수가 발에 챌 정도로 흔한 것이 아니거늘. 하루에 두 명이나 새로운 입신지경의 고수를 만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창을 다루는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겠어.’
서로 손속을 나누는 데에 있어 ‘거리’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수와의 싸움은 그리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지만, 같은 입신지경끼리의 싸움이라면 권과 창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늙은이들은 늙은이들끼리 놀아야겠지. 어떤가. 젊은 친구는 그만 놓아주고 본인과 겨루어보는 것이.”
신창(神槍)이 햇빛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발한다. 권마는 그것이 예사로운 창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군. 간단한 일이라 생각했거늘.”
“강호에 떠오르는 신성(新星)일진대, 뒷배에 아무런 세력이 없겠는가.”
“…어르신, 연이는.”
“걱정하지 말아라. 청룡단이 함께 왔으니 그 아이는 무사하다.”
권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허세라고 보기엔 이전까지 소란스럽던 숲이 잠잠하기 그지없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투기를 거두어들였다.
“일을 그르친 이상 더 싸울 이유가 사라졌군. 굳이 동귀어진까지 하면서 시간을 쓰고 싶진 않은데, 어찌할 생각이지?”
“이런 깊은 곳까지 와놓고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인가. 신승을 필두로 한 소림의 나한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지.”
“…그래서, 본좌의 발을 묶겠다?”
신승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에 권마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수하들을 전부 잃은 상황에서 충돌하게 된다면 이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신승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백중지세에 용호상박일 터. 검절의 목숨을 끊지도 못했고, 저 노인이 있는 한 자신의 패배는 확정된 결과였다.
그렇기에 권마의 선택은 애초부터 하나뿐이었다.
“꼴사납기 그지없지만……!”
파아앗-!
심상치 않은 마기가 그 주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백호는 주호의 앞을 지킨 채 다가올 공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권마의 주먹은 그들이 아닌, 애꿎은 바닥만을 때렸을 뿐이었다.
콰아앙!
황폐해진 대지가 다시 한 번 갈라진다. 이젠 발을 디딜 공간조차 없기에 백호는 주호의 신형을 들고 땅을 박차 몸을 날렸다.
“…도주했나.”
권마의 기운이 순식간에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것을 느낀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연스러운 연기셨습니다.”
“…이 말년에 무슨 꼴인가. 정말로 심장을 졸이는 순간이었네.”
백호는 등줄기가 절로 축축해짐을 느끼며 주호의 신형을 내려놓았다.
만일 권마가 도주를 포기하고 동귀어진을 각오로 싸움을 이어나갔다면 이쪽의 필패(必敗)였다.
겸손 따위가 아니었다. 벽을 넘어선 지금 백호는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들 간의 간극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권마는 완성된 괴물. 더 일찍 경지에 오른 주호마저 저리 밀릴 지경인데 자신이라고 별수 있을까.
“신승께는 미안한 일이 되었군요. 애써 이곳까지 오시게 되셨는데.”
“음? 아, 그건 허세였네. 권마가 신승과 옛적부터 호적수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지. 그렇기에 서로의 강함을 잘 알 테니 물러나지 않을까 싶었어. 다행히 잘 들어맞았군.”
“…허세였다니.”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까. 주호마저도 영락없이 믿었던 신승의 참전이 거짓부렁이었다니,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을 권마의 표정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교관님!”
그때, 저 멀리서 남궁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치열한 싸움을 겪은 듯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음에도 한달음에 그 거리를 넘어왔고, 이내 바위에 기댄 주호의 품에 안겨들며 그의 몸을 살폈다.
“무사하신 거죠? 상처는 괜찮나요?”
“…나는 괜찮다. 연이, 너야말로 고생이 많았구나. 내상도 제법 있는 듯하고.”
“남은 혈귀들 중 고수가 있었어요. 때마침 천 공자와 청룡단이 도우러 온 덕에 무사할 수 있었고요.”
탁.
그와 동시에 천후와 장산철의 신형이 그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단주님.”
“…수고가 많군, 부단주.”
“아닙니다. 우선 이것을.”
장산철은 품에서 꺼낸 단약을 남궁연에게 건네주었다. 내상을 치유하고 몸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효능을 지닌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포장지를 벗겼고, 주호의 입에 단약을 가져갔다.
“난 괜찮으니 네가 먹도록 하여라.”
“서 있지도 못하시면서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더 말씀하시지 않으면 제가 씹어서 입으로 넘겨드릴 테니 그리 아세요.”
“큼.”
옆에 있던 백호나 다른 이들이 살짝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주호 역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슬쩍 시선을 피했으나, 남궁연의 서슬 퍼런 기세에 결국 단약을 먹었다.
“…참, 대환단과 청포석은.”
“제가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천후가 품에서 보자기를 꺼내 보이며 대답하자 주호는 잘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돌아가자꾸나. 우희가 기다릴 터이니.”
***
며칠 후, 사신문 본단.
주호가 그곳으로 돌아왔을 때, 문주 하월벽과 약선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대환단과 청포석을 건네받자마자 집중 치료에 들어갔고, 그것이 오늘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청룡께서도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가서 일 보시게나.”
방을 드나들며 약선의 치료를 돕는 시동이 조심스럽게 말해왔지만,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번번이 그를 돌려보냈다.
사흘간 그가 먹고 마신 것은 남궁연이 먹여준 단약과 약간의 물뿐이었다.
본단으로 돌아온 뒤로 주예향과 남궁연이 번갈아 가며 식사를 가져왔지만, 그는 한술도 뜨지 않은 채 그저 치료 중인 천우희의 방문 앞을 지켰을 뿐이었다.
“…….”
사실 그 본인도 제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잠은 몇 시진마다 반각 정도 짧게 자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었고, 식사는 입맛이 없었기에 그저 목만 축이는 것으로도 족했다.
권마와 싸운 것으로 얻은 내상과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머릿속에 아른거렸지만, 천우희의 치료가 진행 중인 지금은 그것을 제외하곤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찾아온 깊은 밤중,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선잠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어느 날 천우희와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대화였다.
서로 무림인이 아니었더라면 무엇을 하고 있었겠느냐에 대한 주제로, 이미 둘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나는 아마 낙향해서 가문을 물려받아 일하고 있었겠군. 상계에는 영 재능이 없었지만, 그래도 산이와 향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았을까.
-주가장주 주호라. 솔직히 그리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직접 들으니 좀 씁쓸하군.
주호는 그녀의 농에 쓴웃음을 지으며 빈 술잔을 채웠다. 그러곤 고개를 들여 알딸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었지?
천우희는 고아였던 그녀를 문주가 사신문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무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으니 지니고 있던 꿈이 있었을 터.
그때의 천우희는 살짝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앓던 지병 때문에 오래 사는 게 목표라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하고 싶었던 게 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했을 터.
하지만 아쉽게도 꿈은 그 뒤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호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방을 나온 약선은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이내 문가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주호를 보곤 혀를 찼다.
“자네, 설마 계속 이러고 있었는가.”
“…하하.”
“동경을 좀 보게. 우희보다 자네가 더 먼저 죽을 판이야. 몸도 성치 않은 이가 무엇을 하겠다고.”
약선이 품에서 동경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에 수염은 정리되지 않아 듬성듬성 나 있다. 두 눈은 술을 마시고 며칠 밤 날을 센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내상에서 기인한 후유증이 시퍼런 입술의 색으로 나타났다.
“…치료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주호는 그것을 먼저 물었다. 나흘이 지나가던 시각까지 치료가 이어졌다. 이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차도가 보였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조심스레 그런 희망을 담아 바라보자, 약선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네.”
“…그렇습니까.”
“이런 종류의 치료는 나 역시 생전 처음 하는 것이야.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알 수 없네. 아무리 대환단이라 할지라도 만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예. 그저 힘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악화되던 상태가 멈춘 것은 눈에 보일 정도네. 일단은 경과를 지켜보면서 어찌할지를 정해야지.”
악화가 멈췄다는 것에 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無)에 수렴하던 가능성을 유의미한 수치로 끌어올렸으니, 지난날의 여정이 헛되이 되지 않았음이었다.
“의식을 되찾으려면 조금 시일이 필요할 걸세. 그러니까 청승맞게 그만 그러고, 자네도 몸 좀 챙기게.”
“…알겠습니다. 얼굴만 보고 그렇게 하지요.”
신승은 한숨 푹 자고 자신을 찾아와 치료를 받으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주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고, 침상에 누워있는 천우희의 앞에 앉았다.
“…후.”
파리한 안색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사자(死者)에게 감도는 불길한 기색은 걷어져 있었다.
대환단의 효능인지 싸늘하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질 정도인바. 주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손등에 제 입술을 맞추며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힘내라.”
네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터이니.
손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주호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서신이 왔네.”
천우희의 치료 직후 주호 역시 제 몸을 돌보았다.
긴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 피폐해진 정신을 달래고, 약선의 도움을 받아 내상을 치유했다.
그렇게 구할 정도 만전의 상태로 되돌아왔을 찰나, 그를 찾아온 하월벽이 서신을 내밀었다.
“사천 쪽의 전선에서 혼돈과 궁기로 추정되는 이들이 발견되었다더군. 만약 그곳으로 갈 것이면 전선 쪽에도 도움을 부탁한다고 쓰여 있었네.”
그 연락은 일전에 주호가 단철량에게 부탁해놓은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호 곳곳에 흩어진 무림맹의 눈이라면 제법 신뢰할 수 있을 터.
“가겠습니다. 당장 쓰러뜨릴 수 있다고 확언은 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꾸미는 꿍꿍이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요.”
“우희는 걱정하지 말게. 약선의 말로는 아주 천천히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하였으니 내 쪽에서 극진히 보살피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천행(四川行).
전쟁으로 휘몰아치는 그 가운데, 주호의 첫 참전이 예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