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221화 (221/300)

#221화

“늦어서 미안하오.”

마인을 견제하며 남궁연의 앞으로 내려선 천후는 날카로운 기세로 도를 치켜세웠다.

주호가 신승과의 승무전을 치른 끝에 대환단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전해 들었다.

그렇기에 청룡단과 합류해 안휘에서 그들을 맞이할 생각이었지만, 합류 시간이 조금 늦어진다니 아니나 다를까 적들의 습격이 있었다.

“네놈은.”

마인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천후를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뜬다. 분명히 이 근방에는 다른 세력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쉬아아악-!

그와 동시에 일단의 무리가 혈귀들을 급습했다. 청룡단 부단주 장산철을 필두로 한 일백의 청룡 단원이었다.

“마교의 주구다. 모조리 죽여라!”

후끈한 혈향이 주위를 휩쓸었다.

싸움 양상은 사뭇 치열하게 이어지는 듯했지만, 혈귀들에 비해 청룡 단원의 무위가 월등한바. 속속히 쓰러지는 것은 남궁연의 뒤를 쫓아온 마인들 뿐이었다.

“소저, 괜찮으시오.”

“괜찮아요. 그보다 저 마인에게 대환단과 청포석이…….”

“그렇군. 걱정하지 마시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후가 홍령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위에 서린 불꽃이 새하얀 색으로 물들었고, 이내 기다란 형태를 그려냈다.

주작도법 백염식(白炎式)

일륜(日輪)

쉬아아악-!

거세게 일어난 불길이 초목을 불태우며 마인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도 혈귀를 이끄는 수장인바. 곧 둘 사이로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다.

“…소저 괜찮으십니까.”

장산철이 그녀의 옆으로 내려앉는다. 전황은 청룡단의 압도적인 우세. 머지않아 싸움의 결말이 날 듯싶었다.

“저는 괜찮아요. …윽.”

남궁연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건재함을 표했다.

하지만 외상만 없을 뿐이지 아까의 싸움으로 내상이 제법 큰바. 그렇기에 이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고,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것만 하여도 충분히 칭찬받으실 만한 것이니까요.”

“…죄송해요.”

남궁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주호가 길을 열어줬음에도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대환단과 청포석을 빼앗긴 꼴이라니.

“……!”

문득 주호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며 자신이 왔던 길의 끝을 가리켰다.

“저 너머 협곡 안에서 교관님과 권마가 싸우고 있어요! 어서 도우러……!”

“괜찮습니다. 그곳으로는 다른 지원이 갔거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장산철은 남궁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 험악한 얼굴로 씩 웃어왔다.

피투성이의 천후가 마인을 죽이고 대환단과 청포석이 담긴 보자기를 챙겨온 것도 그 직후였다.

***

“…….”

주호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핏물에 젖어 미끄러지는 검의 자루를 다잡았다.

왼쪽 어깨는 옛적에 뭉개졌고, 온몸은 피투성이다. 하지만 그의 두 다리는 아직 굳건했으며, 검을 쥘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

‘강하다. 너무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마는 지금껏 그가 상대했던 누구보다 강했다. 심지어 신승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진짜 입신지경의 고수는 이러하다는 것을 알려주듯 싸움 가운데 한시도 여유가 없었다.

“과연. 운으로만 그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라는 소린가.”

권마 역시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입신지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의 무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기에 처음엔 열 합 이내로 끝내려 했으나, 주호는 그 모든 공격을 버텨내는 것으로 쓰러지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 짧은 사이에 서로 간의 간극을 더욱 메우고 있는가.’

피투성이가 되어도 그 기운은 여전히 성성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자신의 가슴께를 쿡쿡 찔러오는 것이,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다면 필시 나중에 큰 화를 입을 듯했다.

쿵.

권마가 가볍게 발을 내디디자 이미 무너져 내린 협곡의 잔해가 또 한 번 요동친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반이 흔들렸고, 춤을 추는 것처럼 조각들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꽈아악.

권마를 상징하는 주먹이 꽉 쥐어진다. 이윽고 그 기운이 절정에 달했을 때, 권마는 땅을 박차며 우뚝 서 있는 주호에게로 쇄도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겠군.’

이쪽의 소란이 주위로 전해졌을 터. 전시인 와중이라 무가들의 이목이 곤두서있을 테니 여지를 두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니, 이만 포기하거라.”

권마의 주먹이 머리를 부술 듯 닥쳐온다. 주호는 신검을 들어 올렸고, 이내 벼락처럼 그것에 맞서 휘둘렀다.

일 초식 일섬(一閃).

혼원일극신공을 극한으로 운용해 전력으로 펼친 초식이었다.

권마 눈엔 이전과 같은 공격으로 보이겠지만, 그 위력은 천지 차이인바. 권마는 그것마저 부숴버리기 위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파각.

주먹을 감싸고 있던 강기가 깨어져 나간다. 주먹은 면(面), 검은 선(線)이다. 힘의 집약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쉬이 무시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휘두른 주먹을 거두는 것은 권마의 위명에 걸맞지 않을 따름이었다.

콰앙-!

검결을 찢고 기파를 와해했다.

그 뒤에 나타난 것은 신검(神劍)의 칼날. 분명 철과 맨주먹이 부딪쳤을진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으며 거센 고성만이 그곳에 울려 퍼졌다.

“힘겨루기라도 하자는 것이냐.”

권마는 씩 웃으며 주먹을 비튼다. 그러자 한층 더 막대해진 힘이 신검을 밀어냈고, 이내 항거할 수 없는 반탄력이 주호의 손아귀를 찢고 그것을 튕겨냈다.

신검을 놓친 주호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금 권마의 주먹이 내질러졌을 때, 그 역시 팔을 끌어당기며 그 공격에 맞섰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콰아아아앙-!

서로의 주먹이 맞닿았다. 무너진 지반이 다시 한 번 더 무너져 내렸고, 자욱한 먼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아무리 멸천이 청룡신공 최강의 초식이라 할지라도 권마의 정수가 담긴 일 권조차 막아내긴 무리일 따름이었다.

파가가각-!

주호의 오른팔을 타고 해소하지 못한 여력이 그 옷가지와 팔뚝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근육은 뒤틀리고 뼈는 신음을 토해내는 것이 그 한 번의 경합으로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이제 어찌할 텐가. 검절이라 하는 이가 검도 놓쳐버렸으니. 설마 이 권마에게 맨손으로 맞서겠다는…….”

척.

주호의 팔이 마치 뱀처럼 기묘하게 구부러지며 그의 주먹을 옭아매 온다. 절정에 달한 금나수 법이었지만, 권마의 눈동자에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보잘것없는 술수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다니. 내가 잘못 생각……!”

하지만 이내 등 뒤에 닿는 날카로운 감촉에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초식 유성(流星).

권마가 튕겨낸 신검이 어느새 궤도를 바꿔 후미를 습격한 것이었다.

“같잖은!”

권마는 노호성을 토해내며 호신강기를 온몸에 둘렀다. 시뻘건 강기와 신검의 밀고 밀리는 접전. 주호는 일순간 그의 신경이 신검 쪽으로 쏠린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나갔다.

우득.

주먹과 손목이 뒤틀린다. 그런다고 한들 권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엔 어렵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종래엔 권마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신승의 천수관음을 찢어발기려 창안한 초식이다. 어디 한 번 그 잘난 잡기로 막아보아라.”

그의 주먹으로 시커먼 마기가 뿜어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묵혼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주호의 몸이 밀려날 정도로 농밀한 힘이었다.

“마혼(魔魂).”

쉬아아아악-!

권마의 곁에서 역류한 마기가 그 일대 전부를 휩쓸었다. 처음엔 단지 그뿐인 듯했지만, 이내 곳곳에서 벽력탄 수십, 아니 수백 개가 일시에 터진 듯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궁.

지축을 울리는 진동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내려앉았던 어둠이 걷혔을 때,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너진 협곡은 그 잔해조차 온데간데없이 소멸해있다. 그저 바람에 날리는 부스러기만이 덧없는 흔적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컥.”

주호는 그대로 쭉 밀려나 그나마 남아 있는 잔해에 파묻혔다.

전신을 강타한 아득한 충격에 시뻘건 피를 토해낸다. 그러면서도 겨우 정신을 차려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권마는 제 등에 꽂힌 검을 뽑아 그의 발치로 내던졌다.

“쥐어라. 검째로 소멸시켜줄 것이니.”

주호와 달리 권마의 상처라고 해봤자 살갗이 조금 찢어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바. 신승을 죽이기 위해 남겨둔 절초를 이곳에서 사용했다는 것에 분이 차 손끝이 절로 떨릴 정도였다.

절그럭.

주호는 신검을 주워들며 입가에 흘러내리고 있는 피를 닦았다.

진기는 반절 가량이 소모되었으나,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앞뒤 잴 것 없이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하자 흘러내리던 피가 멎고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어가기 시작했다.

‘나찰(羅刹). 이제 그것밖에 없다.’

사용할 수 있는 수는 전부 사용했다. 남은 것은 신승의 천수관음을 꺾은 삼 초식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형(形)도 태(態)도 모두 불완전. 오로지 의념만을 담아 휘두른 검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 가운데 그때처럼 제 위력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망설일 틈은 없었다.

키이이이이익-!

신검이 하늘 위로 세워지자 기괴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마치 누가 비웃는 것 같기도, 조소를 흘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의 울음이 들려왔으며 여인의 절규가 적막을 채우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 무슨.”

권마조차 미간을 찌푸리며 기괴하다 평할만한 현상이었다.

갑작스럽게 기세가 뒤바뀐 것은 경계해야 할 만한 일. 결과는 바뀌지 않으리라.

탓-!

둘의 신형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마혼(魔魂)과 나찰(羅刹). 더 없이 패도적인 주먹과 더 없이 패도적인 검의 충돌이었다.

시커먼 어둠이 다시금 사위를 휩쓸고, 불그스름한 잿빛이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끄으윽……!’

주호는 자신이 지닌 힘을 한계까지 쥐어짜냈다. 신승을 상대할 때는 혼원일극신공을 발하는 비율에 칠 할의 적해를 섞었다.

하지만 눈앞에 닥쳐오는 마혼의 기세는 신승의 천수관음보다 더 매서운바. 지금의 나찰로는 부족하기에 적해의 비율을 더욱 끌어올렸다.

칠할 오푼. 고작 오푼을 더한 것만으로 잿빛 기운의 색이 짙어지며 그 주위로 적색 전류가 튀어 올랐다.

파아아앗-!

극대화된 파괴력은 일순간이나마 권마의 주먹을 밀어낼 정도. 싸움의 끝에서 주호는 희열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라면!’

이것이라면 권마를 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오만이었다.

콰아아아앙-!

서로의 기운이 원류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이며 서로 공멸을 이룬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폭발로 인한 반탄력으로 둘의 신형이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

권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손등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았다.

밀렸다. 단 한 순간이지만, 자신은 분명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해 밀려나고 말았다.

십 년 전, 신승과 마지막으로 싸운 뒤 처음으로 입는 상처. 주호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였으나, 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 문제였다.

“…우웨에엑.”

질척한 시뻘건 선혈이 그 입에서 토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승무전에서 입었던 내상보다 더 심각한 상처. 당장이라도 운기를 해서 속을 다스려도 후유증이 남을 정도였지만, 그는 떨리는 두 다리를 두드리며 신검의 자루를 부여잡았다.

“…좋다. 네놈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격일지니.”

권마의 기세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진심으로 주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는 듯 폭발적인 기운이 아스라이 휘몰아쳤다.

살기와 마기는 뒤섞여 유형화되었고, 보기만 해도 몸이 절로 굳는 수라의 형상을 이루었다.

“…….”

주호는 무황의 비동에서 나온 직후, 처음으로 상대를 보며 오한을 느꼈다.

저건, 저건 더 이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대로 싸운다면 필연적인 결과밖에 맞이하지 못할 터.

하지만 끝내는 이를 악물며 검을 들었다. 그렇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을 때.

쉬아아아악-!

주호와 권마 사이로 날카로운 강기가 쇄도하며 기다란 선을 그었다.

“웬 놈이냐!”

갑작스럽게 난입한 존재에 권마가 인상을 쓰며 그 강기를 깨부쉈을 때, 주호의 앞으로 한 인영이 사뿐한 몸놀림으로 내려섰다.

“꼴이 말이 아니군.”

“…백호 어르신!”

백호(白虎) 양인철.

신창을 쥔 그가 허허로이 웃음을 흘리며 그 앞에 자리했다.

‘허나 그는 아직…….’

입신지경에 이르지 못했다.

아무리 사신수의 무공을 익혔다 할지라도 그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것일 터.

“…어?”

하지만 양인철의 상태창을 본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자네가 소림으로 떠난 사이 나도 조금 깨달음을 얻어서 말이네.”

[상태창]

이름: 양인철

별호: 백호

직업: 사신문 백호단주

나이: 예순셋

소속: 사신문 백호단주

무공: 백호신공

경지: 화경(一/十)

호감도: 上上

사신문에 새로운 입신지경의 고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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