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주먹이 내질러진 경로를 따라 허공이 일그러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괴물이 몸을 뒤틀며 나아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주호는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분명 제때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직후 어깨의 옷자락이 사정없이 찢겨나간바. 그 위에 서린 호신강기조차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것을 보니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깨 자체가 뭉개질 뻔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의 뒤쪽으로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지축이 뒤흔들리며 지형이 바뀌어버릴 정도의 여파. 밖으로 빠져나가던 협곡의 길이 토사에 휩쓸려 막혀버리고 말았다.
“가볍게 한 번 날려본 것에 그리 경거망동하는가.”
“…두 번 가볍게 날렸다간 이 골짜기가 다 무너져 내리겠군.”
“엄살이라도 피우는 것이냐. 신승에 맞선 이가 고작 이 정도에 움츠러든다고? 듣기로는 천수관음을 꺼냈다고 하던데, 그건 본좌조차 승부를 장담치 못하는 절기이다.”
권마는 사뭇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냉정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비록 비무라곤 하나 그런 신승에게 승리했다면 고작 이 정도로 벌벌 떨어선 안 되지.”
“권마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다니 놀랄 일이로군.”
“냉정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네놈도 그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면 보는 눈이 있을 것 아니더냐.”
그 말에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제 강함에 취해 날뛰는 이라면 어떻게든 방심을 유도해내 빈틈을 찌르겠지만, 마인 주제에 어찌 저런 냉철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찰나의 여유 동안 몸에 쌓인 충격을 대부분 털어낸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닌 모든 것을 쥐어 짜내 신승 때처럼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밀려나며 버티는 것이 한계일 터. 어차피 남궁연만 무사히 청룡단과 합류해 도망치면 되는 문제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우선, 최대한 소란을 일으켜 이쪽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쉬아아아악-!
기습적으로 휘둘러진 신검의 검결이 대지를 거칠게 가르며 앞으로 질주했다.
그 끄트머리에 걸쳐 서 있던 권마는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쩍 한 발자국을 옮기면 어렵지 않게 피해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에 선 채 그저 오른쪽 어깨를 뒤로 당긴 후, 강하게 허공을 후려쳤다.
쩌엉-!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먼지가 치솟는다. 손을 휘저어 가볍게 그것을 갈라낸 권마는 제 어깨를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서로 몸풀이는 대충 끝났으니 제대로 해보아야겠지. 네놈은 급하지 않은 것이냐. 수라혈귀가 죽었다 할지라도 쫓아간 혈귀가 무려 일백이다. 남궁의 여식이라지? 숨겨둔 한 수는 있겠지만, 홀로 그 인원을 감당하기는 무리겠지.”
“연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주호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는 믿었다.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넘치는 재능에 피나는 노력까지 곁들였다. 거기에 실전 경험까지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혈귀들에게 쉬이 잡히지는 않으리라.
지금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권마(拳魔)라는 천근의 바위보다 무거운 존재였으니.
“…….”
주호는 두 눈을 부릅뜨며 권마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되는 싸움. 목숨을 걸고 벌이는 난타전 가운데 작은 요소 하나라도 놓친다면 그것이 패배로 직결되는바.
파아앗-!
신검(神劍) 위로 작열하는 빛이 휘몰아친다. 흘깃 그것을 바라본 권마는 기껍다는 표정으로 두 주먹을 들었다.
“어디 한 번 신승을 곤란케 한 솜씨 좀 볼까.”
쿵.
땅이 말 그대로 터져 나가며 권마의 신형이 사라진다. 주호는 천천히 신검을 들어 올렸고, 허공을 뒤덮은 파공성에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눈으로 좇는 것보다 먼저 활짝 열린 기감이 위험을 감지해온다. 첫 일격은 좌측 안면. 권마가 말했던 대로 흘려내는 것은 불가하다. 괜히 만용을 부렸다가 이전과 같이 뇌려타곤으로도 피해내지 못한다면 얼굴 자체가 짓이겨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신검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몸 앞으로 내민 그것 위로 묵직한 충격이 내리꽂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헉 소리가 나올 정도의 것이었지만, 주호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고작 일 권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연격은 마치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듯 신검의 위를 두드렸다.
“…….”
주호는 이를 악문 채 귀화가 서린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그 모든 것을 막아내었다.
물론 전부 완벽하지는 못했다.
세 번에 한 번꼴로 그 몸이 들썩이며 반 보씩 밀려 나간다. 하지만 어느 공격 하나에도 치명타를 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사이에 반격을 섞어 날카로운 기습을 가했다.
“흠.”
그 끄트머리에서 소매가 살짝 잘려나간 것을 본 권마는 몸을 훌쩍 날려 뒤로 물러섰다.
‘처음엔 벅찬 듯싶더니, 이걸 따라왔다고?’
그는 고개를 들어 묘한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젊은 입신지경의 고수. 가히 놀랄 만한 일이지만, 자신을 만난 이상 오늘로 끝이었다.
서로 쌓아온 역사의 깊이가 다르다. 정점에 이르렀으니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권마란 이름 앞에서 감히 그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재미있군.”
권마는 거칠게 호흡을 내쉬는 주호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저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으러 온 것이거늘, 이런 호승심을 느끼게 하다니.
“경의를 표하마. 진심으로 가주지.”
권마의 기세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
쉬익, 탁.
나무의 가지 위로 몸을 날린 남궁연은 기척을 숨긴 채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이미 여러 차례 교전이 있던 듯 검 위로 시뻘건 선혈이 얼룩져 있다. 잠시간 기척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끈질긴 놈들이야.’
주호는 분명 그 앞에 나선 노인을 권마(拳魔)라 불렀다.
즉, 자신들을 습격한 무리는 마교의 도당이라는 것. 그렇기에 여지를 주지 않으려 주호가 만들어 준 틈을 타 전력으로 땅을 박찼지만, 금세 지척까지 추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스스.
잠시간 태세를 정비하고 있던 기감으로 불온한 기척이 느껴졌다.
남궁연은 즉시 지니고 있던 비수를 날렸고, 기척을 숨긴 채 접근하고 있던 혈귀들이 그것을 쳐내며 불똥을 튀어냈다.
“합-!”
바로 뒤에 따라붙은 이들은 제거하고 가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며 혈귀들 가운데로 쇄도했다.
쉬익!
혈귀들의 무공은 살인에 특화된바. 하지만 남궁연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허공에서 몸을 틀었고, 제 허리를 찔러 온 혈귀의 목젖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촤아악-!
시뻘건 피가 튀긴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 얼굴과 옷에 묻었지만, 실전에서 그런 것을 신경 썼다간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랐다.
실제로 그녀가 혈귀를 베어냄과 동시에 그 등 뒤로 각각 다른 방향에서 두 자루의 검이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어림없어요.”
두 팔을 벌린 그녀의 몸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찔러온 검을 흘려냈다.
마음 같아선 그것들의 궤도를 틀어 서로의 목에 박아넣고 싶었지만, 체력과 진기의 소모를 아껴야 했으니 효율적인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쉬익-!
남궁연이 휘두른 검이 허공 위로 기다랗게 궤적을 이룬다. 그 직후 두 개의 머리가 다시 허공을 노렸고, 목 위가 비어버린 몸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후우.”
초식이라곤 일절 사용되지 않는 실전의 검. 주호는 누누이 이야기했다. 실전과 수련은 다르다. 백날 자신의 무공을 수련해봤자, 그것을 실전에 녹여내지 못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보다 못한 것이라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말을 실감하고 있던 그녀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다시 땅을 박찼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기다리고 있는 청룡단이 있다.
그들 역시 상황을 살피고 있을 테니 이쪽에 무슨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눈치챘을 터.
최소한 그들과 합류할 때까지, 아니 그들이 올 때까지만 버틴다면…….
쉬아아아악-!
머릿속이 여러 생각들로 복잡해져 있을 때, 남궁연은 귓가에 들리는 거센 파공성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 쉴 새 없이 울린다. 황급히 발걸음을 멈췄고, 본능적으로 검을 끌어당겨 제 몸을 지켰다.
퍽-!
막대한 충격이 그녀의 몸을 덮친다. 바닥을 구르고 튕겨 나간 남궁연은 이내 커다란 나무 기둥에 등을 부딪치는 것으로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으.”
황급히 태세를 가다듬으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속에서부터 울컥 피가 뱉어져 나왔다.
내상이 심각했다. 어떻게든 막아냈다고 생각한바. 하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선홍빛 피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왔다.
“…귀찮게 하는군.”
다른 혈귀들과 달리 한층 더 무거운 기세를 품은 마인 한 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걸어 나왔다.
남궁연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앞에 떨어진 검을 쥐려 했으나, 마인은 그녀의 몸을 걷어차 그 시도를 무위로 만들었다.
“음?”
“……!”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른 남궁연은 제품에 있던 보자기가 빠져나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인이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어느새 다른 혈귀들이 그녀의 머리와 몸을 짓누르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했다.
“돌? 아니, 다른 무언가인가. 일단 보관해두고, 이건…….”
곧 목함의 뚜껑을 연 마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선명한 황금빛 환단. 곱게 쌓인 비단에 쓰인 소림이란 글씨는 마인의 손끝을 떨리게 하는 것이었다.
“…대환단, 대환단이로구나! 승무전으로 무엇을 요구했나 싶더니 대환단을 요구하다니!”
마인에게 있어 대환단은 그리 쓸모가 없다. 하지만 복용하는 것 말고도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했으니 그저 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여자는 제압하라. 권마께서 검절을 죽이면 곧바로 합류하도록 하겠다.”
“존명.”
“…윽.”
자신의 혈을 점하고 두 팔을 묶는 억센 손길에 남궁연은 땅에 얼굴을 파묻었다.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끌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전부, 전부 말씀드릴게요.”
“말한다?”
대환단을 어루만지고 있던 마인은 그 말에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가 남궁세가의 여식인 것은 알고 있다. 차기 남궁세가의 소가주로 내정되어 있었고, 검절과 긴밀한 관계라는 것까지도.
그러니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꽉.
마인은 남궁연의 턱을 부여잡은 채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엇을 알고 있지?”
“…맹, 맹의 계획이요.”
“말해보도록. 미색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나, 난 그런 것에 현혹될 정도로 무르지 않다. 허튼짓할 시엔…….”
마인의 검 끝이 남궁연의 뺨에 닿았다. 새하얀 피부 위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자,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 안휘로부터 강서, 호남, 귀주, 그리고 운남을 거쳐서 사천 전선을 공격하고 있는 마교를 습격할 별동대가 이동할 움직일 예정이에요.”
“별동대?”
마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전쟁에서 별동대를 운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출발지가 안휘라는 것은…….
“제 아버지인 검제께서 직접 이끄시는 별동대에요.”
“검제!”
정도 무림의 절대 고수 중 한 명.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마인은 두 눈을 컸다. 그 정도의 고수가 움직였더라면 무림맹의 핵심 작전이라는 것일 터.
“…라고 믿어줄 줄 알았느냐. 영악한 계집.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하거라.”
마인은 서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검제란 이름으로 충격을 주어 판단을 흐리게 만들 작정인 것을 모를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숴버릴 듯 강하게 움켜쥐었지만, 남궁연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늦었잖아요, 천 공자.”
화아아악-!
갑작스럽게 일어난 새빨간 불꽃이 둘 사이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