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꼬리를 잡혔다.
골짜기 가득 뒤덮은 빨간 점을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지?’
사신문에서 나온 직후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혈천신교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영역 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은 무리일 터.
만약 어떻게 잠입했다고 한들 주호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림 쪽에서인가.”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그렇게 사람이 몰려 있었으니.”
“빌어먹게 되었군.”
주호는 품 안에 있는 대환단과 청포석을 의식했다.
자신을 추적했으니 필시 예사롭지 않은 이들이 나올 터. 패배하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이 두 개가 파손이라도 된다면 피를 토하며 절규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까요. 저리 대놓고 매복해있는 것을 보니 다른 함정을 파놓은 듯싶은데.”
“정면 돌파하겠다. 다른 곳은 또 어떤 수작을 부려 놓았을지 모르니 말이야.”
“알겠어요.”
그와 동시에 둘은 땅을 박차며 골짜기 안으로 몸을 날렸다. 적들이 반응하기 전에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작정하고 준비해놓은 듯 주변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쉬사사삭-!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수많은 암기가 일시에 솟구쳐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일순간 그들의 발을 멈칫거리게 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
주호는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괜찮지만, 달려나가는 와중 그녀가 이 모든 암기를 피해내긴 어려울 것이다.
독이라도 발라져 있다면 스친 상처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터.
그렇기에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간결했다.
웅웅.
가볍게 내민 손으로 막대한 기파가 휘몰아친다. 검막을 펼칠 필요도 없이 주호가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거대한 소용돌이가 협곡 안을 휩쓸었다.
“가자.”
“네.”
떨어져 내리던 암기는 모두 그것에 휘말려 사방으로 비산했다. 더러는 제 주인에게로 되돌아가 피를 흩뿌리기도 한바. 주호와 남궁연은 그 사이를 질주하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쉬이이이익-!
그런 그들의 앞으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숨에 이쪽의 목을 치려는 듯 시뻘건 검강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빛살처럼 쇄도한바.
고작해야 초절정을 넘는 그 경지에 주호는 코웃음 치며 가볍게 신검을 뽑아 그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직후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 수급을 챙기려 했으나, 도중 몸을 움찔하며 검을 거두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교관님?”
뒤따라오던 남궁연이 보기에는 상대의 목을 벨 완벽한 기회였다. 하지만 도중 출수를 멈춘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자, 주호는 침중한 얼굴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가신 상대가 나타났구나.”
그 말과 동시에 저 위에서부터 한 인영이 이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속도조차 줄이지 않은 채 천근의 무게를 담아 바닥을 내디디자 사방으로 토사가 비산 하며 자욱한 흔적을 만들어낸다. 남자는 그 가운데 천천히 걸어 나오며 더 없이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
상대의 상태창을 확인한 주호는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성성한 백발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나풀거린다. 신장은 짧지만, 전신은 마치 각각이 생명을 지닌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신승과 자웅을 겨뤘다는 애송이가 네놈이더냐.”
권마(拳魔).
마교의 장로 중 한 명으로, 이전에 산서에서 상대했던 검마(劍魔)와 달리 입신지경의 오른 절대 고수였다.
‘…가늠할 수 없다.’
주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승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강호를 종횡했던 이가 아니던가.
그 전신에서 뿜어지는 패도적인 기세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는 형국에 전력으로 맞부딪치면 얼마나 강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권마라니. 상당히 엉덩이가 무거우신 분께서 발걸음을 하셨군.”
“본좌를 아느냐.”
권마는 주호가 자신을 알아보자 기분이 좋아진 듯 클클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마치 과시하듯 주먹을 꽉 쥐었고, 근육 위로 시퍼런 힘줄이 도드라지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세수는 벌써 육십이 넘었건만, 느껴지는 열기는 한창때의 젊은이를 압살할 정도의 것이었다.
“본좌도 옛적부터 신승 그놈과 자웅을 겨뤘지만, 번번이 동수를 이루었지. 마음 같아선 소림에 직접 쳐들어가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말이야. 그러던 차에 네놈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니 어찌 흥미를 지니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호는 권마의 말을 들으며 기감을 펼쳐 주위를 훑었다.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자신 뒤에 있는 남궁연이 문제였다.
자신과 권마가 싸우게 된다면 그 옆에 있는 수라혈귀를 비롯해 일백의 혈귀대는 곧바로 그녀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재능이 넘치고 성취가 뛰어나다고 하여도 그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절대 불가. 애초에 수라혈귀 하나만 있어도 남궁연이 벗어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연아, 이것을.”
마침내 결단을 내린 주호는 품에서 보자기를 꺼내 남궁연에게 넘겨주었다.
남궁연은 대환단과 청포석이 들어있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지켜낼게요.”
“최대한 막아보마.”
아까 말했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한다면 능히 혈귀대를 상대해낼 수 있을 터.
“걱정하지 마세요. 고작 이런 마인 무리 따위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
“믿으마.”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호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벼락과 같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그 가운데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신속에 이른 한 수.
권마는 느긋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기습이라 할지라도 막아낼 자신을 보이는 것. 실로 절대 고수라 할 만한 여유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두 눈이 부릅 뜨였으니.
“커억-!”
수라혈귀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내렸다. 상체와 하체가 나뉜 것을 보니 회생 불가의 상처. 애초에 자신을 노린 공격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권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놈!”
협곡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울려 퍼진다. 감히 자신을 두고 다른 이를 먼저 공격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권마는 여유롭게 관망하는 태도를 버리고 힘껏 진각을 밟았다.
쿵-!
대지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힘은 이내 경락을 타고 올라 권마의 주먹을 휘감았고 그 끝이 허공에 내질러졌다.
“…큭!”
주호는 신검을 세워 제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허공을 격하고 때려진 일 권이 그 위를 묵직하게 도달한바. 절로 두 눈이 크게 뜨이며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 위에 서린 여파를 온전하게 해소하지 못해 주호의 몸이 원래 서 있던 곳에서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으니.
종래엔 내상을 입었는지 피를 토해내며 비틀거릴 정도였다.
“…과연.”
주호는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연 권마(拳魔)라 불릴 법한 일 권. 전신의 근육, 뼈마디, 오장육부 중 충격으로 울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애초에 조금의 손해는 감수하고 공격한 것이지만, 이건 상정 외로군.’
단순한 위력만으로 따지자면 신승의 여래신장보다 더 강하지 않는가.
자칫 잘못하면 다리가 풀릴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더 긴장해야 했다.
“다들 뭐 하고 있나! 어서 쫓아가서 산 채로 내 앞에 끌고 와!”
수라혈귀를 잃은 권마는 신경질적으로 제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수장을 잃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혈귀들이 힘껏 땅을 박차며 남궁연이 달려나간 쪽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
주호는 침중한 기색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들 모두를 쳐 죽이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피해를 보았다간 서로 간의 균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감히 본좌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렸느냐. 신승조차 감히 그러질 못하거늘.”
권마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며 제 주먹을 맞대었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야수의 기세는 흉포하기 그지없다. 단 한 순간이라도 실수한다면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터.
쉬이익-!
권마는 직접 몸을 날렸다.
마치 거대한 나무를 휘두르는 듯한 그 묵직한 파공성에 주호가 헛바람을 토해내며 물러설 때, 권마는 찰나에 그 지척까지 따라붙으며 귀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의 사지를 뭉갠 다음 그 아이 앞으로 데려가마. 애틋한 사이로 보이니 제법 볼만한 얼굴이 되겠지.”
“…권마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혀가 제법 길군.”
“놈!”
허공에서 진각을 밟은 그의 일 권이 다시금 작렬한다. 전과 달리 그 몸에 직접 닿는 공격이었지만, 주호 역시 대비하고 있던 바였다.
휘릭.
모든 공격엔 방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읽어낸다면 그 어떤 공격이든 피해내거나 흘려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특히 권공은 빠르고 강하지만, 그 궤도가 직선이라는 한계에 있다. 그렇기에 권마의 어깨로부터 방향을 읽어낸 주호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은 채 함께 몸을 돌리며 흘려내려 할 찰나, 권마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비틀었다.
“어리석은. 그런 같잖은 기예로 본인의 주먹을 피해낼 수 있을 것 같더냐.”
쉬아아악-!
주먹의 끝이 멈춰 서며 허공을 강타하자 막대한 기파가 사방을 휩쓴다. 당연히 그 지척에 있던 주호 역시 실이 끊어진 연 마냥 나풀거리며 튕겨 나가 몇 번이고 바닥을 굴렀다.
“…….”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최대한 충격을 흘려보낸 주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세를 가다듬었다.
권마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씩 웃고는 제 주먹의 끝을 쓰다듬었다.
“막거나 부딪쳐라. 권마의 주먹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그 두 가지뿐이니.”
“…퉤.”
장기가 상한 것인지 속이 쓰리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은 채 신검을 들어 올리며 아직 자신이 건재함을 뽐냈다.
[혼원일극신공을 운용합니다.]
신승 때처럼 이것저것 재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다. 더욱이 그때는 승무전의 이름이란 비무. 지금은 서로의 목숨을 탐하는 생사 결전이었으니 지닌 모든 것을 끌어모아야 했다.
척.
주호는 일 초식 일섬(一閃)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자신이 지닌 초식을 모조리 때려 박아 권마의 정신을 빼놓을 생각이었다.
“호오.”
드디어 진신 절기를 꺼내는 것인가. 이전과 사뭇 달라진 주호의 기세를 느낀 권마는 씩 웃으며 제자리에 두 다리를 붙인 채 대지 위에 우뚝 섰다.
“그렇다면 이쪽도 보여주어야겠지.”
슈우우우욱-.
그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원을 그리자 그 안으로 공진(空眞)이 형성되며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기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 권마의 커다란 주먹이 그 중심을 강타했다.
“묵혼(墨魂).”
“……!”
상태창에조차 없는 마공(魔功)의 발현. 항거할 수 없는 막대한 거력에 주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