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남궁연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별한 오라버니와 오랜만에 해후했다 할지라도 감정에 휩쓸려 주호의 품에서 엉엉 울지 않았나.
분명 추한 얼굴일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기에 고개를 들기 싫었지만, 주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 오라버니도 네가 이토록 장성한 것을 보면 기뻐하시겠지.”
한없이 인자한 목소리다. 남궁연은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으나, 두 눈을 비비는 것으로 그것들을 털어냈다.
“그래요. 더는 울보에, 어리광쟁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드려야죠.”
“그건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남궁연은 그 품에서 살짝 고개를 들곤 입술을 삐죽거리며 주호를 흘겨보았다.
“진정되었으면 다시 가자꾸나.”
“…그래요. 지금 중요한 건 청포석이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주호의 품에서 떨어졌다.
옷자락을 놓는 그 손길에는 많은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 중요한 것은 천우희의 치료에 쓸 청포석이었다.
비동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습기의 농도가 짙어졌다. 종래엔 들이쉬는 공기에서마저 축축함이 느껴질 정도라 남궁연이 살짝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삼 년이란 시간을 홀로 버티신 건가요.”
“그렇다. 처음 몇 달은 미칠 것 같았지만, 적응이라는 걸 또 하게 되더구나.”
“적응이요.”
남궁연은 슬쩍 주호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해오는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람이 이런 곳에 갇혀 삼 년이란 시간을 보냈으니 어찌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녀는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없겠지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주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 이미 지난 일이니. 밖에 나온 직후 한동안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졌단다.”
그 기색을 눈치챈 주호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남궁연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 쓰이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다른 이가 들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다. 그런 인고(忍苦)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
“…….”
남궁연은 살짝 앞서가는 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기연이라면 엄청난 기연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 명문가의 자제인 그녀였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느꼈겠는가. 더군다나 이런 꽉 막힌 공간에서 홀로 삼 년이란 시간을 보냈으니 그 밀도는 평범히 흐른 시간의 수십 배는 더 될 터.
덥석.
남궁연은 문득 그 뒷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더 빨리 내디뎠고, 비어있는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왜 그러느냐.”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호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연 자신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기호지세(騎虎之勢)라 했던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음에도 꿋꿋한 태도로 고개를 저으며 더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마음 같아선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지만, 손을 잡는 것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손바닥엔 땀이 흐르고 심장은 숨을 오랫동안 참은 사람처럼 심히 쿵쾅거릴 정도였으니.
혹시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남궁연은 심히 걱정이 들었으나,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붙잡은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뭐가 그런가요, 라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한 걸음 더 용기를 낸 남궁연은 주호와 보폭을 맞췄고, 이내 그 옆을 나란히 걸으며 조금 전에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더 있나요?”
“우희만 알고 있었다. 그녀와는 사신문으로 엮인 관계였으니.”
‘그런 관계만이 아니었겠죠.’
남궁연은 내심 투정을 부리고 싶었으나, 자신이 왈가왈부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연이 너까지 둘이로구나.”
“…그런가요.”
그나마 뒤에 나온 말로 위안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잠시간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남궁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왔다.
“무황의 진전을 이었다고 공표하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이전까지 숨긴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지금에 와서는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
“…주제넘은 발언을 조금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강호 생활을 몇 년간 했다고 하나 남궁연은 태생부터 명문의 출신이었다.
당연히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을 수 있는바. 더욱이 명석한 그녀의 말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교관님께선 비동 안에 있으셔서 보지 못하셨겠지만, 그 당시 비동혈사 때문에 강호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흉흉했어요. 제 체감상 전쟁 중인 지금보다 더할 정도로 말이죠.”
마도와 정사 연합군의 전쟁은 서로의 이익을 위한 것. 적의 수급을 베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것으로 입신양명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무황의 비동은 달랐다.
“수많은 이들이 지닌 각자의 욕심과 욕망이 휘몰아쳤죠.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저까지 절로 몸서리칠 만한 크기였어요.”
그래도 입신지경인 주호에게 직접 적으로 무황의 전승을 공유하자 하는 이는 아마 없을 터.
아니, 어쩌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온다면 그것을 요구하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안 좋은 쪽의 시선까지 주목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무황의 전승을 이은 것을 알게 된다면 교관님의 지난 행적을 모조리 조사당하겠죠. 세상 곳곳에 지켜보는 눈이 있어요. 저와 교관님이 이곳에 오른 것도 오가다 본 이들이 있겠죠.”
“즉, 비동의 위치가 특정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네. 애초에 비동의 입구가 위치한 곳은 모두 기억할 거예요. 그곳을 기반으로 교관님의 행적을 조사한다면 이곳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죠.”
“흠.”
주호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든 싫든 지난 삼 년간의 삶이 녹아든 공간. 이곳에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이 닿게 하는 일은 싫었다.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집요한 이들이 많거든요. 특히 이런 부류에 관련해서는.”
“허나, 네 오라버니의 봉분이 있다.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
주호의 우려는 그것이었다.
남궁의 적자가 그 품을 떠나 이런 외진 곳에 묻혀 있다. 자신이 남궁연이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본가로 옮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남궁연은 짧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굳이 교관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시기에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지금은 전쟁 가운데에 있었다.
남궁세가 역시 그 일각에 참전했고, 모두가 전의를 불태우며 마교를 척살할 준비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 년 전에 목숨을 잃은 장남의 시신을 가져온다면?
“…그렇군. 연이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니에요, 그만큼 저를 생각해주셨다는 거니까요.”
“알겠다. 네 말을 따르는 것이 나을 듯하구나. 비동 쪽은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남궁연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주호와의 거리를 반보 더 좁혔다.
그렇게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비동의 심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저분이.”
남궁연은 발걸음을 멈춰선 채 심처 가운데에 자리한 제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백발이 단정히 묶여 있다.
분명 수백 년이 지났을 것임에도 그 피부엔 주름 하나 없었고, 곁으로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았다.
무황(武皇)
고금제일인을 눈앞에 둔 남궁연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 모습에 압도되어 정지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런 모습이었다. 족히 삼백 년은 지났을 터인데 저리 멀쩡한 모습이니 그 경지가 얼마나 높았을지는 예상조차 되지 않는구나.”
“…등선하신 건가요?”
“모르겠다. 갑자기 눈을 뜨실 수도 있겠지.”
주호로서도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상태창의 공능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으로 보아 등선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상식으로 재단하기엔 무황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대했다.
“…조금 보니까 왠지 교관님과 닮은 것 같아요.”
“그러느냐.”
주호는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공을 물려받아서 외모까지 닮아진 것인가.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퀘퀘하고 습기에 찬 공기는 여전하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듯한 익숙한 환경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잠시 구경하고 있거라. 청포석은 이 뒤에 있는 창고에 있으니.”
“아, 저도 구경해도 되나요?”
“문제없다. 다만, 볼 것은 없을 테니 기대하지 말도록 하거라.”
무황은 몰라도 다른 것들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비동에 함께 보관할 정도였으니 본래라면 제법 명성을 날리는 것들이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녹이 슬다 못해 툭 건드리면 부스러질 지경이었다.
“…구석에 샘이 솟아있군요.”
“덕분에 말라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석회질이 섞여 있어 수질은 그리 좋지 못하다만 내게는 천운이었을 따름이지. 덕분에 벽에 이끼가 자라 식량이 떨어진 이후로는 그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정말로 고생하셨네요.”
남궁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아팠다.
주호가 이런 고통 가운데 성장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은 알까.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그의 성장을 재능과 천운이 겹쳐 이뤄진 것으로만 떠들어댔다.
무림맹 앞에서 마교의 고수와 싸워 매서운 신위를 떨친 것으로 그 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그처럼 젊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은 필시 무언가의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무지몽매한 자들.’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그것에 가로막혀 아등바등하는 이들이 무엇을 알겠나.
부스럭.
남궁연이 그렇게 홀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 주호는 신중한 얼굴로 녹슨 더미를 뒤적거렸다.
“…찾았다.”
종래엔 파헤치다시피 그것들을 밀어버렸고, 마침내 찾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청포석(靑葡石).
연한 녹색이 흐르는 울퉁불퉁한 형태의 돌이었다.
처음 이것을 발견했을 땐 안쪽에 무언가 들었나 싶어 깨부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전부 박살 내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로군.’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감싼 뒤 품에 넣었다.
“청포석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막상 이곳으로 왔는데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무서웠거든요.”
“정말로 다행이다. 챙길 것은 다 챙겼으니 그만 돌아가자.”
대환단과 청포석.
필요한 것을 모두 손에 넣었으니 천우희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주호는 살짝 들뜬 기분으로 남궁연과 함께 서둘러 비동을 나섰고, 다시 절벽을 무너뜨려 그 입구를 막았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진 못하겠죠?”
“눈썰미가 좋은 이라고 할지라도 자연스러운 산사태라 여길 것이다. 애초에 지반이 그리 단단한 곳이 아니라 내가 파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니.”
무너져 내린 비동의 입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사 년 전 그곳을 처음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어찌나 세상이 낯설던지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 정도였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한 발자국을 내딛자, 그 뒤로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시원히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사신문까지는 대략 엿새인가요. 그리 늦지는 않겠네요.”
“돌아가는 길은 청룡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일정이 늦지 않았으니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겠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청룡단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기에 주호와 남궁연은 하산을 서둘렀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교관님.”
“그래.”
남궁연의 부름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밖으로 나가는 깊은 골짜기.
[적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양옆으로 수두룩한 빨간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